이라크 전쟁/한국군

1 개요

이라크 전쟁에 파병된 한국군에 대한 항목.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규모만 따지면 3,000명이 넘어서 한국은 미국, 영국에 이은 3위였다. 호주폴란드는 전투병을 파병했지만 각각 2,000명, 200명 정도였다. 영문 위키백과 이라크 전쟁 다국적군 관련 내용에도 한국 자이툰 부대만 따로 항목이 있을 정도.

2 여론

한국의 경우 초기 미국의 파병요구에 보수세력을 중심으로 한 찬성론이 있었다. 물론 진보세력들은 반대. [1] 반대측에서는 불필요한 전비의 사용은 물론, 이라크전이 명분없는 전쟁이므로 참전하였다가 주변 아랍국가들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이며, 자칫 테러의 위협성을 높인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반면 찬성측에서는 미국이 한국과는 각별한 관계의 최우선 우방국이며, 이라크에 대한 민주주의 전파 및 아랍지역의 평화라는 깃발 아래에 유럽의 국가들 역시 참전의사를 밝히는데 한국만 외따로 빠진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며, 이후 미국과의 외교가 난맥을 겪을 수 있다는 점에서 찬성을 주장했다나중에 무조건 파병반대가 아닌 비전투병, 대민지원 병력에 대해선 상당히 공감이야 하긴 했지만. 기왕 보내는 거 전투병 파병을 보내야지 전투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도 있긴 했다.[2]

결국 당시 정부이던 참여정부는 양 쪽 어느 의견도 무시할 수 없다고 판단. 치안 유지 및 시설재건. 즉 평화지원차의 자이툰 부대를 파병했고 그 주둔지도 아르빌 등 사실상 '쿠르드 지역' 으로 정함으로써 전쟁에서는 발을 뺐다. 개입을 아예 안 하자니 미국이 원망하고 특히 당시 정부는 간신히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국가를 안정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협조가 절실한 가운데 미국을 자극할 수 없었으며,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적극적으로 파병하자니 아랍국가들의 반감을 살 것은 물론 테러의 위협이 높아지는 결과가 올 수도 있었으니 나름의 현명한 타협안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타협적이고 중립적으로 보이는 안'은 결국 누구의 만족도 얻지 못하는 부작용도 존재하는데, 노무현 정부의 경우에는 결국 여론은 애초에 친노였던 사람들만 만족했을 뿐이었다. 결백성이 강한 진보 진영에서는 '어쨌든 파병했으니 침략 가담'이라고 욕하는 반응이 다수였으며, 노무현 정부를 안 좋게 보던 보수 진영에서는 '하려면 제대로 할 것이지!'라는 반응이었고, 미국에서는 이리저리 간 보면서 발빼는 모습이라는 비아냥을 받았으며, 아랍 측에서는 아무튼 싸잡아서 침략자 취급으로 테러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정치권에서 한나라당은 적극 참전을 지지했고 한나라당 여러 정치인은 이라크에 직접 다녀와서 안전하다며 참전하자고 뜻을 밝히다가 되려 조선일보 빼고 보수 언론에게도 '안전지역에서 다국적군 경호 아래에 정해진 곳에 있으니 안전하지?'란 비아냥을 듣었다. 정치인으로서 다국적군의 경호를 받는것과는 달리 파병된 한국군은 직접적인 공격 위험에 노출되야만 하는데도 당시 이라크에 다녀왔던 한나라당 의원들은 확실한 한국군 참전을 위해 앞뒤문맥 접어두고 이라크는 안전하다는 말부터 먼저하다가 빈축을 사는 등 여러모로 무리수를 두었었다.

한나라당 소속 모 국회의원은 신용불량자들을 모아 이라크전쟁에 내보내자는 취지의 말을 했다가 맹비난을 받았으며, 같은 당 소속 모 의원은 한국군의 실전경험을 쌓기 위해 전투병을 참전시키자고 주장하여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 애당초 명분도 없는 전쟁에 전투병을 보낼 필요도 없을 뿐더러 미군들도 수없이 죽어나가는 게릴라전에서 실전경험을 쌓아봤자 그 경험을 대체 어디에 쓸 것이며 수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그런 실체없는 경험 하나 쌓자고 무의미하게 희생시켜야 한단 말인가? 또한 모 의원은 파병 논의 때 '이라크에 병력을 파병해 미국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가 지나치게 미국에 경도되었다며 역풍을 받기도 했다.

2.1 언론

당시 보수 표방 언론도 반응이 매우 달랐는데 우선 조선일보는 참전을 적극 지지하며 월간조선에서 이라크 전쟁 초기에 특집 기사로 사담 후세인을 김일성 뺨치는 독재자랍시고 상당한 분량으로 보도했으나 후세인을 미국이 지지하던 이란-이라크 전쟁 이야기라든지 럼스펠드가 당시 이라크에 가서 후세인을 격려했던 이야기는 쏙 빼먹었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파병지로 처음 거론되던 키르쿠크 유전지역을 취재하며 안정적이니 한국군이 주둔하고 전투병 보내도 문제없다고 개드립쳤다가 한겨레에게 이뭐병 까였다. 달랑 며칠동안 있어서 안전하다고? 키르쿠크라면 더 위험하다는 보도가 나오고 한국 정부에서도 위험하다고 판단해 쿠르디스탄 자치령이 있는 아르빌로 파병지를 옮겼고 결국 키르쿠크에서 연이은 폭탄공격이 벌어지면서 조선일보만 과장된 보도를 한게 드러났다.

이와 대조적으로 다른 보수 언론들까지 진보 언론과 대충 비슷하게 파병에 대하여 제한적 지지를 보냈다. 동아일보는 미국이야 중요한 우방이지만 이번 전쟁은 너무 억지라며 참전을 부정적으로 봤다. 그렇다고 무조건 반대도 아니지만 전투병 파병은 아랍권에서 한국에 대한 부정적 시각만 늘이고 한국군이 전투력 도움이 될지몰라도 반대로 이슬람권에서 한국에 대하여 나쁘게 영향을 끼치며 국익적으로 나쁘게 본다. 게다가 이 전쟁을 걸프전쟁과 달리 극히 미국과 일부만 벌이고 세계에서 반대가 많은 전쟁이다. 그래도 일단 한미동맹인지라 대충 평화유지군 파병 정도로 타협하자는 투로 노무현 정부에 대하여 이해하는 보도를 했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 이후에 게릴라전이 커지면서 전쟁이 길어지자 주간동아에선 만화로 거봐, 이라크 전쟁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이잖아~라는 태도를 싣기도 했다.주간동아는 동아일보보다는 조금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서인지 몰라도 이라크 전쟁 초반부에 끝없는 밀림과 수렁이 가득한 곳에 스스로 들어가는 미군을 그리면서 제대로 예견하는 시사만화를 그렸던 바 있던만큼, 그 시사만화가도 나중에 그 밀림에서 여태 나오지 못하는 미군을 연이어 그리면서 거봐 내가 뭐랬어, 이건 시작이라고~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정말로 10여년 뒤까지 미국 골머리를 앓게하는 이라크가 되었다.

중앙일보도 동아일보랑 비슷한 보도를 하며 우방 미국이야 중요하지만 이번 전쟁은 베트남 전쟁과 달리 너무 국제적으로 부정적이라[3] 이런 태도를 보였고 컬럼에서도 아랍권 분위기도 생각해야 한다며 평화유지군 파병 정도만 해도 된다는 반응이었다.

진보 언론인 한겨레는 전투병 파병반대이지만 역시 비전투 대민지원 병력 파병에 대해선 지지했으며. 경향신문도 전투병 파병은 반대하며 비전투 평화유지군이나 의료 및 현지 민간인에게 도움이 되는 부대라면 찬성했다. 진보계열 말고도 중도성향 신문들도 거의 이렇게 뜻을 보였기에 조선일보를 빼면 거의 모든 언론은 전투병 파병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3 결과

그러나, 이라크 전쟁이 길어지고 미군도 점차 지쳐하자 참전을 지지하던 이들도 뜻을 돌린 게 많아졌으며 지금은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 파병 논의에 대하여 아주 친미적인 이들이나 밀리터리 계열 일부나 지지를 보였을 뿐, 깊은 수렁에 같이 들어가자는 이들은 없었고 조선일보나 한나라당도 더 이상 파병 및 전투병 참전에 대하여 침묵하게 되었다. 애시당초 미군도 죽어나가는 전장에서 한국군이 파병되어 봐야 결국 수백명의 전사상자만 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적어도 수백에서 많게는 수천의 저항세력을 사살하는 전과도 올리겠지만 애시당초 피해가 아닌 결과로 승패를 결정하는 자들이 이라크 저항세력인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4]

결국 한국군은 쿠르드 지역에서 재건과 민심 안정에만 힘쓰다가 2008년 말 조용히 철군하는 길을 택했고, 그 덕택에 이라크의 심장부에서 벌어지는 난장판을 피할 수 있었다. 물론 간혹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5] 페슈메르가의 저지로 대부분 막혔고, 애시당초 저항세력들도 굳이 한국군을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처음부터 자기들과 충돌하지 않기로 작정한 군대와 굳이 정면으로 충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게다가 지역 쿠르드족과 한국군의 관계가 좋았기 때문에 저항세력이 공격을 하여 한국군을 도발할래야 할수도 없었다. 게릴라전의 특성상 지역에서 주둔군과 지역민간의 갈등이 커야 활동을 할수 있는데 쿠르드 지역은 게릴라들이 설칠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2014년 현재 이라크 내전이슬람 국가를 보면 전투병 파병은 더더욱 거론될 필요도 없을 듯 하다. 해당 항목 보면 알겠지만 이곳에 한국군이 몇만이 투입되어 봐야 이라크 정부군이 형편없는 이상, 한국군이 가서 막아준다고해도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처럼 이라크 정부군에게 넘겨주고 철수한다고해도 맥없이 무너졌던 남베트남의 사례를 반복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6]

2015년 초중반까지는 이라크군이슬람 국가에게 일방적으로 털리고 있었지만 내전이 중후반에 접어들면서 오합지졸이었던 이라크군의 실전 경험이 상승, 여기에 중동 각지에서 몰려든(...) 시아파 민병대의 도움까지 더해지면서 이라크 정부 쪽으로 승기가 확실히 기울고 있다. 모술 같은 경우 주민 대부분이 수니파로 구성되어 있는지라 더 지켜봐야겠지만.

4 이라크 파병의 이해득실

당시 이라크에서 연합군은 기존의 연합군 사령부를 2003년 6월 14자로 제7합동통합임무부대(CJTF-7 : Combined Joint Task Force-7)로 명칭 변경을 하고, 2003년 11월 기준으로 효율적인 점령통치를 위해 이라크 18개주를 6개 지역으로 구분하였다. 각 지역은 북부구역(아르빌등 쿠르드자치구역, 모술), 북중부구역(키르쿠크, 티크리트), 바그다드구역, 서부구역(라마디, 팔루자), 중남부구역(나자프), 남동부구역(나시리야, 바스라)로 구분 되었다. 광활한 면적의 다른지역과 달리 바그다드만 그 상징성과 인구 560만명이라는 중요성 때문에 단일 구역으로 분류 되었다.

이중에서 북쪽의 4개 지역은 미군이 관할하고, 중남부는 폴란드 다국적 사단, 남동부는 영구 사단이 담당하였다.

2004년 6월말에 탄생하는 이라크 임시정부로 주권이양에 맞추어, 5월 15일자로 제7합동통합임무부대를 해체하고 다국적군 이라크(MNF-I : Multi-National Forces in Iraq)를 창설하였다. 가장 큰 변화는 쿠르드 자치구를 담당하는 북부지역이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여서 기존의 미 공수101사단을 스트라이커 1개 여단만 남기고 철수 하는 것이 골자이다.
다국적군은 여전히 남쪽의 2개 지역만 담당하여
중남부 – 다국적사단(중남부) : 폴란드군 주도 + 18개국 참가
남부 – 다국적사단(남부) : 영국3사단 주도 + 12개국 참가
식으로 사단 명칭만 변경 되었다.

미군은 중남부 – 다국적사단(중남부) : 폴란드군 주도 + 18개국 참가
남부 – 다국적사단(남부) : 영국3사단 주도 + 12개국 참가

한국군의 파병이 거론되자 미군은 전투병이 너무 필요한 시점이라 북중부의 키르쿠크 지역을 담당해주길 원했다. 이지역은 이른바 수니파 삼각지역으로 이라크 내에 최대 접전지역이다. 사실 미군 담당 4개 지역중에서 서부구역에는 책 <팔루자 리포트>에도 나온 라다디와 팔루자라는 지옥같은 도시가 있고, 바드다드 구역이야 말로 현세에 강림한 아수라장이다. 그에비해 북부지역은 이라크 자유작전에서 전투가 없던 지역으로 안정적이다. 서쪽의 모술은 북부 최대의 도시라 그 중요성 때문에 미군이 주둔중이고, 동쪽의 아르빌과 쿠르드 자치구는 전쟁과는 별 관련 없는 평화지대라서 미군 부대 자체가 주둔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한국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키르쿠크 지역은 거부하고, 다국적사단의 관할 안으로도 들어가지 않고, 약간 어이 없게 평화로운 쿠르드 자치구의 주도인 아르빌로 파병가는 길을 선택했다. 당시 한국정부는 파병 목적을 전쟁으로 상처입은 이라크의 재건이 목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은 쿠르드 자치구역에서 일어 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재건할 작업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이라크 재건 사업에 참여하여 경제적 이득을 취한다는 것 역시 처음부터 불가능 하였다. 당시 이라크에서는 누구든 쿠르드 족을 돕는 자들은 국물도 없다고 했는데, 한국은 ‘에이 설마~’ 하며 쿠르드 자치 지역으로 파병 갔다. 이 때문에 이라크 자치 정부에 단단히 찍혀서 한국 업체들은 이라크 재건사업에 참여하기가 오히려 힘들어 졌다. 당시 조선일보 등에서 그 유명한 “이라크는 빨대만 꼽아도 석유가 나오는 곳이다”라는 주장이 나왔는데, 석유가 나오는 곳은 영국군 지역인 이라크 남부 지대였으며, 이라크 정부는 쿠르드 자치구에서의 석유개발 사업 자체를 금지하였다. 결국 이라크 파병가서 그 대가로 유전개발 사업에 참여하는 것은 아시발꿈이 되어버렸다.

인명사고는 한국군 경비병이 총 갖고 장난치다가 합동으로 근무 서던 이라크 경비병을 쏴 죽인 것 뿐. 가끔 모술에 있는 다국적군 사령부에 방문 하러 가거나, 모술로부터 보급품 수령할 때가 꽤나 위험했다고 한다. 다만 막장 상황인 수니파 삼각지대, 바그다드, 또는 팔루자-라마디에 비해 모술도 별다른 전투가 없는 조용한 곳이었다. 어쩌다 기지로 박격포탄이 한번 날라오면 그게 신문에 날 정도였다.
초대 부대장인 황의돈의 회고록을 읽어 봐도, 이라크가 위험하다는 글만 있지 귀국할 때 까지 전투 자체는 없었다. 책 후반부는 고국의 VIP들이 부대방문을 오면 아르빌 근처를 관광시켜주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나온다.[7]

다국적 사령부의 전투지역으로 가달라는 요청을 뿌리치고, 굳이 외국군의 존재 자체가 필요 없는 쿠르드 자치구역으로 간 것은, 이후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비난 받은 것을 생각해 볼 때 현명한 선택이였다. 다만 당시 첫째 인도적인 견지에서 이라크 재건 사업을 돕는다. 둘째 우리의 맹방인 미국을 돕는다. 셋째 전투 경험을 쌓을 수 있다. 넷째 향후 이라크 재건 사업에서 우선적으로 참여하여 경제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다라는 명분으로 파병 갔었는데, 쿠르드 자치구로 가는 바람에 네가지 다 망했다. 여기에 덤으로 당시 참여정부를 지지하던 세력은 보통 파병반대 세력이였는데 이들의 지지를 한번에 잃어 이후 재임기간 내내 레임덕에 시달리게 되었다.

위의 이유는 정치적인 문제이고 전술적으로 보자면, 당시 M1A2SEP탱크나 M2보병전투차도 녹아나는 막장 상황에서, 60 트럭 몇 대 몰고 이라크에 나타나서, 다국적군 사령부를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이에 미군 측에서 긴급하게 장갑 험비와 지뢰방호차량인 MRAP등 장갑차량을 제공하였다.[8] 파병 1진은 급하게 와서 맨몸으로 왔다고 치고,(실제로는 어른들의 사정으로 파병이 1년가량 지연 되었지만) 몇 년후 파병을 마치고 철군할 때 까지 한국군은 결국 장갑차량을 보내지 않고 미군에게 빌려 쓰는 것으로 대체 하였다.

물론 당시 급조폭팔물 등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을때라 미군조차 MRAP가 없어 긴급히 남아공 제품을 수입해서 썼고, 장갑험비가 부족하여 운전병이 개인적으로 험비에 철판을 붙이고 대지뢰용으로 바닥에 모래주머니를 깔아 사용할 때였다. 당시 필자가 인터넷에 차라리 맨몸으로 삽만 들고 파병가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어설프게 무장하는 것 보다는 이라크 저항군이 불쌍해서 봐줄 거라고. 당시 밀리터리 게시판은 긴급히 MRAP를 수입하여 가져 가라는 여론이 대세였지만, 한국 정부는 자체적으로 개발할 것이라고 하며 그전까지 그냥 60트럭 타고 가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10여년이 흘러 2016년 현재 아직도 그놈의 한국형 MRAP 차량은 개발 중이다. 이제 와서 개발 돼도 곤란한 게, 차량이 너무 이라크 안정화 작전 같은 특수한 상황에 특화되어 있어, 당시 찍어내듯이 만든 MRAP 차량은 대부분 고연비에 운전성이 나빠 갖다 버리고, 급조폭발물 방어에만 특화된 차량 대신 범용성 있는 차량을 개발 중이다. 한국군 측에서는 엄청난 예산이 필요한 자체 개발 대신 필요한 만큼만 소수의 차량을 긴급 수입 해서 사용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지금 와서 국산 MRAP를 개발 완료하여 전세계 시장에 수출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후 한국은 UN군으로 타 국가에 파병 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때마다 맨몸으로 나타나 MRAP 등을 빌려 달라고 하는 등(결국 미군 쓸 것도 없다고 거절 당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라크에서 그렇게 많은 것을 보았지만, 배운 것은 없었다.
  1. 민주노동당이 조사한 것이라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당시 여론조사에서 75% 가까이가 이라크전 참전을 반대했다.
  2. 일부 친미 밀덕후들이 한국군의 실전경험을 위해 기갑부대나 기계화부대를 파병해야 한다고, ***코리아와 같은 밀덕 사이트에서 주장하기도 했다. 참고로 아프가니스탄에도 한국군 파병 주장을 하기도 했으나 이라크 때와 달리 여긴 묻혀졌다.
  3. 사실은 베트남 전쟁도 이라크 전쟁만큼 반전 분위기가 강했다. 이라크전과는 달리 베트남 전쟁은 상당수 미국인들조차 부정적으로 보던 전쟁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는 그런 거 없었다. 일단 한국군 안 보내면 미군이 빠져서 안보 공백이 심각해질 상황이었고 월남을 같은 '공산주의 괴뢰 도당'에 맞서는 모습으로 과거 6.25 당시의 한국의 모습에 이입한 모든 언론은 공산주의에 맞서는 정의로운 전쟁이라며 세계적 비난을 무시하고 당연히 참전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옹호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반공측면에서만 보자면 한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할 충분한 대의명분도 있었다. 물론 호치민 세력은 북쪽의 악당들과는 비교하는것 자체가 실례일 정도로 부류가 달랐기 때문에 이렇게 목숨걸고 막아야할 수준의 막장들이 아니었지만...
  4. 하지만 이것이 문제인것도 91년 걸프전에서 일본이 제대로 기여를 못해서 국제적 비난과 정치외교에서 불이익을 받았던 전례와 같이 한미관계에서의 정치적 관계에서 악영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양날의 검이었던 셈...
  5. 02군번 육군 장교 중 한 명이 자이툰 부대 모 여단 여단장 전속부관으로 근무했을 당시, 여단장 집무실 근처에 박격포탄이 떨어져서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6.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이 주둔했던 1번 국도지역의 남베트남 지역은 되레 인구가 증가하고 유입되고 밤에도 민간인들이 활동할수 있는 지역일 정도였다. 애초에 VC들이 한국군을 겁내서 활동에 소극적인 지역이 되어버리자 생긴 일이었는데 문제는 한국군이 철수하자마자 그동안 숨죽였던 VC들이 들고 일어났고 남베트남군은 통제도 못했다. 게다가 북베트남군의 남진으로 싸워보지도 않고 너무나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그 지역들을 내줘야했다.
  7. 참고로 황의돈 부대장은 육군참모총장까지 승승장구 하였지만, MB정권이 들어서면서 부동산 문제로 사퇴한다. 한겨레에 의하면 MB의 포항 동지상고 후배인 김상기를 육군참모총장으로 만들기 위해 뒤에서 꾸민짓이라고 한다작전명 ‘황의돈 퇴출 일주일 전격전’.
  8. 이동중에 미군 전차도 줄줄이 작살나는데, 한국군은 60트럭 타고 모술까지 보급품 받으러 다녔다. 특별히 파병용으로 오픈형인 60트럭 화물칸에 철판을 키 높이로 둘러 쳐놓기는 하였다. 다만 위는 뚫려 있었고, 지뢰를 막는 다던지 하는 개념은 없었다. MRAP좀 사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