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베컴

이름데이비드 로버트 조지프 베컴
(David Robert Joseph Beckham, OBE[1])
생년월일1975년 5월 2일
국적잉글랜드
출생지런던
신체조건183cm, 76kg, O형
포지션윙어, 중앙 미드필더
선수시절 등번호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 7번
레알 마드리드 CF, LA 갤럭시 - 23번
AC 밀란, 파리 생제르맹 FC - 32번
유소년 클럽브림스다운 로버스 FC (1982-1988)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88-1993)
소속 클럽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93-2003)
프레스턴 노스 엔드 (1995) (임대)
레알 마드리드 CF (2003-2007)
LA 갤럭시 (2007-2012)
AC 밀란 (2009) (임대)
AC 밀란 (2010) (임대)
파리 생제르맹 FC (2013)
지도자마이애미 FC (2015-)
국가대표115경기[2] 17골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앨런 시어러
(1996~2000)
데이비드 베컴
(2000~2006)
존 테리
(2006~2012)
2001 UEFA BEST 11
FW
다비드 트레제게
FW
티에리 앙리
MF
킬리 곤살레스
MF
지네딘 지단
MF
파트리크 비에이라
MF
데이비드 베컴
DF
비셴테 리사라수
DF
파트리크 안데르손
DF
사미 히피아
DF
코스민 콘트라
GK
산티아고 카니사레스
2003 UEFA BEST 11
FW
뤼트 판 니스텔로이
FW
티에리 앙리
MF
파벨 네드베드
MF
지네딘 지단
MF
데이비드 베컴
MF
루이스 피구
DF
호베르투 카를로스
DF
파올로 말디니
DF
알레산드로 네스타
DF
파울루 페헤이라
GK
잔루이지 부폰
1999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
데이비드 베컴
1999 FIFA 올해의 선수상
수상
히바우두
2위
데이비드 베컴
3위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2001 FIFA 올해의 선수상
수상
루이스 피구
2위
데이비드 베컴
3위
라울 곤살레스
1999 Ballond'or
수상
히바우두
2위
데이비드 베컴
3위
안드리 셰브첸코

1 상세

황금의 오른발
택배 크로스의 달인
축구 역사상 가장 높은 스타성과 시장성을 보유한 선수[3]

영국의 전 축구선수연예인. 풀네임이 길어서 흔히들 데이비드 베컴이라고 부른다. 본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조각같은 외모[4]와 뛰어난 축구실력으로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고 미인(빅토리아 베컴)과 결혼한 뒤 4명의 자식과 단란한 가족까지 꾸민 현실세계에서 대표적인 인생의 승리자. 현재 영국인으로서 전세계의 일반인들에게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스포츠 스타중 가장 가십과 파파라치등 세인의 관심이 몰려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실력도 있지만 뛰어난 외모 때문에 비슷한 기량의 타 선수들보다 광고 수입등으로 몇 배의 수입을 올리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질투와 질시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국대에 대한 충성심이 누구보다 강하며, 일단 대표팀에 발탁되면 어느 잉글랜드 선수보다도 뛰어난 공을 세우곤 한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세계 축구계의 중심인 유럽을 떠나 미국에서 뛰면서 예전의 미칠듯한 인기와 세인들의 관심은 다소 떨어진 것으로 보이며, 최근엔 해외축구계에서 생각보다 많이 거론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2009년 말에 남아공 월드컵 조추첨을 하는 멤버로 뽑히고 동년배 선수들이 모두 은퇴하고도 남은 2012년에도 2012 런던 올림픽/축구 영국 단일팀 와일드카드 0순위로 거론된다거나(실제로 뛰지는 않았지만...) 여자 축구 청소년 대회 결승에서 갑툭튀하여 선수들을 홀리는 등(...)[5] 그 영향력은 여전히 지대하다.

2003년엔 대영제국 훈장 4등급(OBE)을 받았다. 4등급이므로 작위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알렉스 퍼거슨, 바비 롭슨 등이 받은 기사작위(Knight Bachelor)는 2등급 훈장에 준하는 것이다. 4등급 OBE는 이보다는 두 단계 낮은 것이다. 자세한 설명은 대영제국 훈장 항목 참조. 같은 4등급 훈장을 받은 또 다른 축구 선수로는 라이언 긱스, 앨런 시어러가 있고, 그들에게 또한 'Sir'는 붙지 않는다.

한국 한정 별명으로는 백암선생이 있다.

2 클럽 경력

2.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맨유 전설의 유스 출신 선수들인 Class of 92[6]. 왼쪽부터 라이언 긱스, 니키 버트, 데이비드 베컴, 개리 네빌, 필립 네빌, 폴 스콜스, 테리 쿠크 누군가 홀로 빛이난다
600px
2011년 개리 네빌의 은퇴 경기에 이들은 다시 모여 그때와 같은 포즈를 취하고 찍었다. 애들이 이렇게 삭았어요 니키는 아예 사람이 바뀐것 같은데

1993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한뒤 점점 실력이 일취월장하면서 팀내 주전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준수한 킥력과 그림같은 프리킥 솜씨 등 뛰어난 축구 실력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전성기로 이끈다. 구단 최초의 트레블의 중심[7]에 있었으며, 1995년 윔블던전에서 기록한 하프라인 슛은 프리미어 리그 10주년 기념 베스트 골 10선에 포함되기도 한 환상적인 골. 부상 전엔 환상적인 킥력 외에 돌파도 준수했는데 베컴은 맨유의 명실상부한 에이스로서 모습을 보였다. 다이내믹한 윙어의 최고봉이었던 라이언 긱스의 왼쪽과 후방에서 활동량과 로빙 패스로 받쳐 주는 베컴의 오른쪽은 시대를 풍미한 좌우 날개 조합이었다. 2002년 발목 부상 전까지는 정상급 윙어 다운 다이나믹함을 보여 줬으나, 부상 이후 드리블 돌파 능력은 크게 떨어졌다.

98-99시즌에서 01-02시즌까지 4년 연속 리그 도움왕이었으며, 99/00 시즌은 무려 33어시스트를 기록하였다. 맨유시절 어시스트 해트트릭 기록만 9회로 공격 첨병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2003년 2월 15일, FA컵에서 아스날에게 패배한 뒤 알렉스 퍼거슨과 라커룸에서 충돌, 결국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하게 되었다. 당시 상황을 서술하자면, 경기에서 패배한 후 라커룸에서 알렉스 퍼거슨이 데이비드 베컴에게 "플레이가 이게 뭐냐. 애쉴리 콜에게 완전히 발렸잖아."는 식으로 호통을 쳤는데, 발끈한 베컴이 "영감님은 아르센 벵거에게 완전히 발려버렸고요."는 식으로 맞받아치자 열받은 퍼거슨이 축구화를 발로 차버렸다. 그런데 그게 우연히 베컴의 얼굴을 직격해서 눈썹 위가 찢어졌다. 폭발한 베컴이 퍼거슨에게 달려들었으나 팀메이트들이 엉겨붙어 간신히 떼놓았다고. 덕분에 둘 사이는 봉합이 불가능해졌고, 시즌 종료 이후 베컴은 팀을 떠나게 되었다. 이번에 퍼거슨의 2번째 자서전에서 퍼거슨이 밝히길 베컴이 자신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갈등이 생겼다고 한다. 훈련을 할 때 베컴이 비니를 쓰는 모습을 보고 (비니를) 벗으라고 했는데 무시한 것부터 시작해서 밑에도 나와 있듯이 빅토리아와의 사랑에 빠지거나 하는 등 축구에 소홀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에게 실망했다고 한다. 만약 그가 축구에 더 집중했다면 자기가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도 맨유에 남아있었을 것, 정말로 축구 자체에 헌신했다면 레알 마드리드에서 LA 갤럭시로 이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성토했다. 물론 베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저런 축구 외적인 잡음들을 매우 싫어했던 퍼거슨과 이런 크고 작은 갈등이 쌓이고 쌓여 결국 2003년 축구화 사건이 터지면서 파국을 맞게 되었다. [8] 현재는 시간이 흐르면서 당시의 앙금이 가라앉으면서 화해했다.[9]

2.2 레알 마드리드 CF

David-Beckham_GI_2631481b.jpg

최고의 스타성과 상품성을 가진 데이비드 베컴이 화려한 네임밸류를 자랑하는 갈락티코스 1기의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자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베컴은 클럽과 대표팀에서 7번을 달았으나, 레알 마드리드의 7번은 레전드 라울이기에 23번을 달았고, 이후 23번은 베컴의 상징이 된다.[10] 그러나 본래 포지션인 오른쪽 미드필더에는 포르투갈의 전설적인 윙어 루이스 피구가 존재했기에 중복된 포지션으로 인해 중앙 미드필더로 기용된다. 익숙치 않은 포지션에서 활약하면서, 게다가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 클로드 마켈렐레가 떠난 상태이기에 더욱 고전을 면치 못했다. 사실 베컴도 부상으로 인해 돌파 능력을 잃었고 맨유 시절에 비해 확실히 기량이 쇠퇴했다. 당시 갈락티코스 1기의 레알 마드리드는 모래알 조직력과 구멍난 수비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었다. 수많은 감독들이 경질되었으며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직은 '독이 든 성배'라는 소리를 듣게된다. 엄청난 이적료를 주고 영입한 베컴이 부진한 활약을 펼치자 스페인의 언론들은 그를 비난하는 기사를 써내려갔고, 더 자극적인 가십을 써 내려가기 위해 베컴의 사생활 취재에 집중하며 기자와의 몸싸움을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베컴의 레알 마드리드 진출은 실패로 끝나는 듯 싶었지만, 리그 적응에 완전히 성공해 루이스 피구를 인테르로 이적시키고 원래 자리인 오른쪽 미드필더 자리를 되찾았다.

이 시기 레알 마드리드는 02-03 시즌의 리그 우승 이후 세 시즌 째 무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승청부사라 불리던 파비오 카펠로가 06-07 시즌 감독으로 선임되지만, 이는 베컴에게 재앙으로 작용한다. 카펠로는 언론을 통해 대놓고 베컴을 중용하지 않을 것임을 밝히고, 베컴은 힘든 시간을 거치다가 시즌 종료 후 LA 갤럭시로 이적을 할 것을 밝히게 된다. 그리고...

그러나 반전이 시작된다. 베컴처럼 퍼거슨과의 불화 때문에 레알로 이적하게된 뤼트 판 니스텔로이는 이적시즌인 06-07 시즌 초반에는 다소 부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점점 팀에 적응하게되고 이는 택배 크로스 전문가인 베컴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호재였다. 언론을 통해 대놓고 베컴을 디스하던 카펠로도 일단 리그 순위가 간당간당하다보니 당장 골배달 잘하는 베컴을 안 쓸 수가 없었고, 06-07 시즌 레알 마드리드는 초반에는 위태위태한 출발을 하였으나 막판에 대폭발한 니스텔로이-라울 투톱에 이를 보조하는 베컴의 엄청난 활약으로 대역전 우승을 하게 된다. 파비오 카펠로 감독은 우승청부사의 명성을 레알 마드리드에서도 이어나갈 수 있었지만 결국에는 시즌 종료 후 경질당하게 되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레알 마드리드답지 않은 축구를 했다" 라는 이유였으나, 실은 "당신이 필요없다던 베컴의 활약으로 우승해놓고 그게 어떻게 당신 능력임?" 이라는 뉘앙스가 강했다. 그만큼 해당 시즌의 베컴은 대단했고, 베컴의 택배 수취 전문인 판 니스텔로이는 리가 데뷔 시즌에 득점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2.3 LA 갤럭시 / AC 밀란

116983811__357676b.jpg

이적 이후 LA 갤럭시의 간판 스타로 활약. 하지만 이적 당시 갤럭시 구단은 비난을 많이 받았다. 아직은 야구나 농구, 미식축구, 아이스하키에 절대적으로 밀리는 메이저사커 리그에서 베컴이 받은 돈은 다른 팀 동료들이 받는 돈을 다 합치고도 남는 돈이었기 때문.[11]

gun__1233939955_beckham_milan.jpg

미국 시즌이 끝날때 쯤이면 AC 밀란으로 임대와서 뛰기도 했다. 밀란의 감독이었던 카를로 안첼로티는 베컴을 굉장히 아까운 인재로 여겼는데, 안첼로티는 베컴은 미드필더로서 투쟁심, 활동량, 수비력, 축구지능, 킥력 등 미드필더에 필요한 모든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맨유에서 플레이 스타일을 한정짓는 바람에 재능만큼 꽃피우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특유의 정확한 크로스에 노련미 넘치는 플레이까지 더해지며 밀란의 미드필드에 활력을 불어넣는 쏠쏠한 활약을 펼친다. 밀란의 팬들은 베컴의 활약에 매우 만족해했고, 베컴 역시 밀라노의 생활을 즐겼다. 2010년에 안첼로티가 떠난 밀란에 왔을 때에는 절묘하게도 밀란이 맨유와 챔피언스리그에서 대결하면서 처음으로 올드 트래포드에 서게 되었는데 비록 선발출전하지는 못했지만 교체로 투입될 때 전 관중이 기립박수로 환대해줬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후 팬들이 건네 준 노란색/녹색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퇴장하며 더 큰 환호를 받았다. 다만 그 스카프는 그 당시 경기장에서 구단주에 대한 항의 시위를 이어가던 팬들의 상징이라서 약간 논란이 있었다. 베컴 본인은 시위에는 큰 관심이 없고 그저 팬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는 듯. 그러나 2010년 시즌에 밀란에서의 최종전에서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하면서 2010년 월드컵 출전이 좌절되었다. 기량이 예전만 못하다거나 세간의 관심에서 조금 멀어졌다고 해도 베컴은 여전히 잉글랜드 국대 캡틴급의 위상을 가진 인물이었던데다, 베컴 없이 치르는 국제 대회는 참 오랜만이었기에 잉글랜드 축구팬들에게는 큰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성적도 늘 그렇듯이 큰 아쉬움이었다

일단 2012년 12월에 열리는 MLS컵 결승을 마지막 무대로 퇴단 절차를 밟고 있다. 선수생활을 계속 이어가려는 의욕을 보이고 있는데 아직 차기 행선지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 다만 현지 언론에 따르면 중동으로 팀을 옮겨 마지막 축구 인생을 불사르리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미러, 피플 등에서) 현재 유력한 행선지로 꼽히는 곳은 카타르의 알 사드[12], UAE의 알 와슬 등이며 프랑스의 모나코나 PSG도 관심이 있다는 설이 있다. QPR의 레드냅 감독도 토튼햄 감독하던 시절부터 계속해서 베컴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지만 베컴은 맨유가 아닌 프리미어리그 팀에서 뛰는건 상상도 할 수 없다면서 계속 거절했다.

2008/09 시즌과 2009/10 시즌 겨울 기간에 임대로 와서 AC밀란에서 활약을 한것에 대해 밀란 팬들은 긍정적이지만 정작 LA갤럭시와 MLS팬들은 당연히 좋아하지 않았다. 휴식을 취해야 할 기간에 임대로 가서 활동하는 바람에 체력적으로 문제가 생기고 덤으로 부상까지 달고 왔기 때문. 2008/09 세리에 A에서는 짧은 기간에 18경기나 출전했지만 그 여파로 정작 2009 MLS에서는 11경기 밖에 뛰지 못했다. 게다가 2009/10시즌 다시 세리에 A에서 겨울기간 임대가서 11경기에 출전했지만 2010 MLS에서는 또 그 여파로 7경기 밖에 뛰지 못한게 그 예이다.

2.4 파리 생제르맹 FC

130319114953-beckham-psg-rich-list-horizontal-gallery.jpg

그렇게 차후 행선지를 저울질하며 입단 타진을 하고 있던 중 아스널 선수들과 같이 훈련을 하게 됐는데, 언론에서는 베컴이 아스날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는 기사를 써댔다. 베컴은 아스날 그리고 아르센 벵거 감독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MLS가 쉬는 겨울마다 아스날에 합류해 훈련을 해왔지만, 맨유의 서포터이자 레전드로서 맨유의 라이벌인 아스날의 유니폼을 입을 수는 없기에 아스날 입단설을 일축했다. 아르센 벵거 감독 역시 베컴은 아스날에 몸을 만드는 중이며, 아스날은 베컴에게 이러한 편의를 제공할 뿐이라고 입단설을 부인했다. 그리고 베컴은 자신 대신 아들인 로미오를 아스날의 유스팀에 입단 시키는 것으로 대신했다(...)[13] 그리고 신흥 강호로 떠오르는 파리 생제르맹 FC 입단한다는 기사가 떴다. 빅토리아 베컴의 명품수집을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있더라

PSG는 1일(이하 한국시각)구단 홈페이지를 통해 "베컴과 올해 6월 30일까지 계약을 했다"고 공식발표했다. 연봉 등 구체적인 계약 조건은 밝히지 않았으나, 주급은 15만 파운드(약 2억5000만원) 수준이며 5개월 이후 1년 계약 연장을 하는 조건이 첨부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젠 파리에서 택배크로스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베컴의 실제 연봉은 0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베컴은 PSG 입단 직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5개월치 주급 전부를 어린이를 위한 자선사업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베컴의 계약 조건은 일단 6월 30일까지 5개월 계약한 뒤 이후 1년 계약 연장 여부를 논의하는 방식이다. 베컴은 첫 5개월의 급여를 모두 기부하겠다는 뜻이다. 박찬호가 국내 프로야구에서 뛰었던 2012 시즌 연봉을 모두 기부한 것과 닮았다. 베컴의 5개월치 급여는 50억원이 넘을 전망이다. 이 돈이 모두 자선사업에 쓰인다고. 아마 자신도 현역 마지막 팀이라고 보고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닌가 싶다.

2.5 은퇴

BBC기사

BBC, AP통신 등을 통해 2012-13 시즌을 끝으로 현역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다고 밝혔다. 베컴도 2000년대를 풍미했던 수많은 별들과 함께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은퇴 이후에는 FA의 홍보대사를 하고싶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기사도 돌고 있다. 2013년 5월 16일부로 은퇴.

2007년 LA갤럭시로 이적할 당시, 데이비드 베컴은 MLS의 프랜차이즈를 인수할 권리를 부여받았았는데 2014년 2월, 권리를 실현하여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 마이애미(가칭)의 구단주 취임이 확정되었다. 2016년 또는 2017년에 본격적으로 리그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구장 문제 등이 금방 해결되지 않아 리그 참여가 더 늦어질 뻔 했지만 2015년 7월 경기장 문제가 해결이 되었고 이후 2~3년안에 MLS에 진입할 예정이다.

3 국가대표

0023ae9885da0c465b1146.jpg

잉글랜드의 상징인 킥 앤 러쉬 스타일에 그의 초정밀 택배 크로스는 반드시 필요한 옵션으로, 프리킥과 함께 대형 스트라이커가 없는 잉글랜드 대표팀의 강력한 공격수단이다.

베컴처럼 정밀한 크로스를 올릴 윙어와 이를 높은 확률로 득점으로 연결해줄 타겟 스트라이커 조합이 갖춰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공격 옵션이 된다. 때문에 창조적인 대형 스트라이커 부재에 시달리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으로선[14][15] 베컴의 프리킥과 더불어 크로스는 세계 무대에서 통할 몇 안되는 유효한 공격수단이다. 하지만 이로인해 모든 잉글랜드의 공격 패턴이 배컴으로부터 시작되는 부작용 때문에,[16] 배컴의 크로스를 두고 지금 당장 잉글랜드에 가장 필요하지만 장기적으로 체질개선을 하기 위해선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몇 년째 잉글랜드에서 그보다 창조적인 플레이를 하는 선수는 없다. 말썽 많았던 폴 개스코인이라는 잉글랜드 역사에 남을 테크니션이 아웃되고나서 잉글랜드 공격진, 혹은 전방 중원 미들진은 창조성이 실종한다.

조 콜개스코인의 뒤를 이을 천재라고 평가 받았지만 결국 유망주로 끝나버렸고 중원에 스티븐 제라드프랭크 램파드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조성이 있긴 있지만 서로 겹치는 스타일과 동선 때문에 활약이 미미했다. 그나마 있던 스콜스도 국대에서 조기 은퇴.

그런 상황에서 베컴만큼은 순간의 시간만 있으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크로스 혹은 땅볼 패스 혹은 중거리를 때려 버린다. 흔히 베컴이 크로스만 날린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땅볼 패스 역시 명품이다. 단지 크로스가 너무나 압도적인 훌륭함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지. 베컴의 크로스는 1998년 즈음부터 10여 년 간 잉글랜드의 사실상 가장 확실하고도 유일하며 보장된 창조성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월드컵시메오네의 다리를 걸어 퇴장당한 사건은 월드컵 역사에 손꼽히는 병크로 수시로 방송에 재탕되며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영국인이 많다. 그 때 영국 신문 헤드라인이 '10명의 용감한 사자와 한 명의 멍청이.' 그 사건 이후 베컴이 맨유에서 활약한 걸 생각하면 베컴 본인에겐 기폭제가 된건 사실이다. 이후 2002 한일 월드컵, 2006 독일 월드컵에 잇달아 발탁되었고 중요한 순간에 제 몫을 해내며 두 대회 연속 8강을 이끌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잉글랜드는 2002년 2006년 두대회모두 8강에서 탈락한다.

파일:TGhROp4.jpg


특히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2002 월드컵 최종예선 그리스전에서 경기 종료 직전 잉글랜드의 월드컵 진출을 확정짓는 장거리 동점 프리킥을 성공시킨 것은 백미였다. 이 골로 극적으로 잉글랜드를 월드컵에 진출시키면서 1998 월드컵에서의 오명을 모두 씻어내는 동시에 월드 스타로서의 명성을 드높이는 계기가 된다.

2002 한일 월드컵 월드컵을 두달도 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뛰다가 중족골 골절이라는 큰 부상을 입어 정작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할 위기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산소 캡슐까지 동원하는 등 초인적인 노력 끝에 결국 완치되어 월드컵에 출전할 수 있었다. 본선 첫 경기 스웨덴전에서 코너킥으로 선제골을 어시스트했고, 두 번째 경기인 아르헨티나전에서는 명배우가 얻어낸 결승점이 되는 패널티킥을 성공시키며 팀을 승리로 이끌고 4년 전 아르헨티나전의 퇴장으로 겪은 아픔을 말끔히 씻어 냈다. 이 때 반칙을 범해 페널티킥을 허용던 아르헨티나 수비수가 현재 토트넘 핫스퍼 FC의 감독인 마우리시오 포체티노.[17]

2006 독일 월드컵에서도 여전히 주장으로 조별 리그부터 전 경기를 모두 선발출장하며 팀을 8강으로 이끌었다. 특히 16강전 에콰도르전에서는 심하게 무더운 날씨에 경기중 구토까지 할 정도로 좋지 못했던 컨디션이라는 이중고 속에서도 결승점이 되는 프리킥 골을 성공시켜 역시 베컴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8강 포르투갈전에서 승부차기에서 선발 못되어 잉글랜드는 8강에서 정말 아깝게 탈락한다. 그놈의 잉글랜드 승부차기 징크스

그러나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못 하고 늘 8강이 한계였던 잉글랜드는 베컴을 중심인 전술의 한계탓이라는 오판을 하게 되고, 실제로 독일월드컵 종료 후 새 감독으로 취임한 스티브 맥클라렌은 대표팀 체질개선을 위해 베컴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겠다고 선언 후 정말 베컴 없이 대표팀을 꾸렸다. 그러나 그야말로 눈 썩는 경기력을 보여주고 대내외적으로 온갖 비난에 직면하다가 결국 할 수 없이 2007년 여름부터 다시 베컴을 대표팀에 불러들였다. 그러나 그 시점이 너무 늦은 탓에 베컴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의 유로 2008 본선 진출 실패를 막을 수는 없었다.

국제대회 우승에 대한 갈망 때문인지 이제 나이가 제법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표팀 승선을 원하고 있다. 당시 파비오 카펠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은 유럽무대에서 검증된 선수만 대표팀에 발탁한다는 입장이었고 이에 베컴은 MLS 오프시즌마다 AC 밀란으로 임대를 가면서 카펠로 감독의 눈도장을 찍기 위해 노력했다. 둘의 레알 마드리드 시절 껄끄러운 관계였지만 이후 카펠로가 베컴에게 그 당시의 일은 사과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카펠로는 월드컵 최종예선 10경기 중 9경기에 베컴을 출전시키며 베컴을 중용했다. 하지만 AC 밀란에서 경기를 뛰던 도중 키에보 베로나와의 경기에서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당해서 아쉽게도 2010 남아공 월드컵 국가대표에는 뽑히지 못했다.[18]

하지만 카펠로 감독이 어떤 형태로든 베컴을 본선에 데려가고자 했고 결국 선수가 아닌 수석코치 보좌역으로 대표팀에 승선. 잉글랜드 대표팀의 경기를 벤치에서 지켜보았다. 이때 골키퍼의 실책을 지켜보다 급정색하는 표정이 중계 카메라에 잡혀 화제가 되었다. 골키퍼 저걸 그냥 확! 그리고 현피 직전까지 갔던 스티븐 제라드존 테리를 잘 다독여서 화해시키는 등 알게 모르게 많은 역할을 했다.

남아공 월드컵 이후 카펠로가 유로 2012 플랜으로 새로운 대표팀 구성을 위해 더 이상 대표팀에 베컴을 발탁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대신 2010년 11월 프랑스와의 친선경기때 베컴의 대표팀 은퇴 경기를 열어주겠다고 제의했지만, 베컴은 대표팀에서 은퇴할 의사가 없으며, 10경기가 되든 1경기가 되든 반드시 대표팀에 필요한 선수로 돌아가고 싶다며 카펠로의 제안을 거절했다.

2012 런던 올림픽의 영국 단일팀 출전을 열망했고, 와일드카드 최종 후보 명단에까지 올랐으나 끝내 최종 엔트리에는 발탁되지 못했다. 다시 한번 좌긱스 우베컴을 보고 싶어했던 전 세계의 축구팬들은 멘붕.

대표팀 감독이 로이 호지슨으로 교체되었고, 마침 베컴이 다시 PSG에 입단하면서 유럽무대로 복귀하며 대표팀 복귀설이 나왔지만 호지슨 감독은 베컴을 뽑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이후 2013년 베컴이 현역 은퇴를 선언하면서 국가대표 경력도 종료되었다.

4 플레이 스타일

파일:Attachment/becksexpress sub pop.jpg
파일명이 이상하다[19]
택배 왔습니다. 여기 수취인 서명 좀 해주세요. 경쟁부문업체 1위 배컴택배
상대팀 키퍼:안 시켰는데..?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한 정확한 킥을 통한 패스 보급이 베컴의 가장 강렬한 특색이다. 베컴이 오른쪽 미드필더로 뛸 경우 크로스가, 중앙 미드필더로 뛸 경우 이리저리 뿌려주는 칼같은 로빙 패스가 일품. 주력과 민첩성, 수비 스킬이나 공격에서의 테크닉이 대단한 수준이 아니지만, 이미지나 외모, 장기인 킥력을 위주로 할 것 같은 스타일과 안 어울리게 굉장히 많이 뛰는 하드워커라는 점도 특징이다. 딴건 몰라도 그렇게 빠른 공수전환의 뻥축구가 대세였던 EPL에서 활동하는 윙플레이어가 활동량이 적은 게으른 선수였다면 천하의 퍼거슨 감독이 베컴을 에이스로 믿고 중용하기는 커녕 진작에 짤렸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 지역예선 최종전 대 그리스전에서는 팀 동료들이 시망스러운 경기력으로 일관할 때 무려 16.1km를 뛰면서 코너킥 어시스트에 이어 95분에 극적인 프리킥 골을 터뜨리며 2-2 무승부를 견인, 거의 혼자 힘으로 팀을 월드컵으로 보내다시피 했다. 부상 전엔 속도도 상당히 빨라 드리블에도 능했지만 부상이후 개인기는 여전했지만, 돌파능력은 상실했다. 돌파가 가능했던 시절 베컴은 명실상부한 맨유의 에이스였으며, 그의 킥력과 날카로운 프리킥 능력은 명백히 16강권 수준에 불과했으며 잘못하면 본선진출도 위태위태했던 잉글랜드 국대의 리쎌 웨폰으로 베컴의 국대 커리어내내 따라다녔다.

아래에 쓰여 있듯 스탠딩 윙어라고도 불렸지만 그건 그가 패스나 크로스를 할 때, 공을 잠시 키핑한 후 행하는 스타일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때문에 그가 많이 뛰지 않는다는 오해를 받았지만 상술되어 있듯이 그의 활동량은 당시 세계 축구계에서도 상위 2~3%내에 들수 있는 최상위권이다.
때문에 베컴이 뛰던 당시 맨유 역습을 보면 베컴이 킥뿐만 아니라 측면에서 패스 주자마자 공간을 찾아 뛰어들어가며 다시 받고 패스하는 역습시 윙어 플레이의 정석같은(평소 잘못 알려진 베컴의 플레이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프리킥의 달인이기도 하다. 많은 축구 애호가들이 베컴이 활약한 시대 프리킥의 최고는 누구냐며 설전을 벌이는데, 베컴이 정말 독보적 1위이냐 하는 것에는 이견이 많지만 베컴이 빠지면 말이 안 된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사실 21세기를 뛴 선수를 통틀어 베컴보다 프리킥을 많이 넣은 선수는 커리어 프리킥 75골의 주니뉴 하나 뿐이다.(베컴은 프리킥 65골) 과거 에릭손이 베컴보다 미하일로비치의 프리킥을 높이 쳐 주는 발언을 했다 해서 베컴보다 미하일로비치의 프리킥이 우월하다는 의견이 있는데 베컴 입장에서 보면 다소 억울할 수 있는 평가다. 미하일로비치가 세리에A 14시즌동안 프리킥 28개의 프리킥 득점, 피를로가 18시즌동안 28개의 프리킥 득점을 기록했는데(이 둘은 세리에 통산 프리킥골 1위), 베컴은 맨유에서 10시즌 동안(93-03) 프리킥 27골을 기록했고, 레알 마드리드에서 4시즌 동안(03-07) 프리킥 12골을 기록했다. 클럽에서의 수치에서 이미 둘을 상회하는데다 베컴의 경우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많은 프리킥 골을 기록한데다, 월드컵 본선에서의 2개의 프리킥 골(98콜롬비아전, 06에콰도르전) 등 큰 무대에서나 02 예선 그리스전 등 결정적인 순간 성공시킨 골이 많아 임팩트 면에서는 베컴의 프리킥을 따라올 선수가 없다.

허나 이건 직접 슛에 관련된 이야기고, 직접 슛이 아니라 어정쩡한 각도 혹은 먼 거리에서 선수의 머리에 얹어 주는 프리킥이나 코너킥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베컴의 손을 들어 준다. 돌파도 아주 못하지는 않으며 가공할 만한 활동량에서 비롯한 수비 가담력도 준수하다.

거의 cm 단위의 포격이 가능한 킥의 정확도도 정확도지만, 수비를 앞에 두고도 여유 있게 로빙 패스가 가능하다는 점도 베컴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일반적인 윙어들이 마크를 뿌리치고 공격수에게 크로스 한번을 올리기 위해서 죽어라고 기술을 쓰고 드리블하는 것을 생각하면, 마크를 앞에 두고도 정확하고 여유있게 올리는 베컴의 크로스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윙어들은 어느정도 상대 페널티박스 근처까지는 올라와서 크로스를 올리는것이 보통이지만, 베컴은 거의 중앙선 근처에서 뜬금없이 공격수를 바라보고 크로스를 올리기 때문에 마크하는 상대 입장에서도 대처가 힘들다. 물론 베컴이라고 항상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특정 상황에서 가능하다는 것만 해도 가공할 수준이다.

롱킥을 할 때 뛰어난 발목힘을 이용해 양팔을 아래 위로 휘저어 킥력을 올리면서도 밸런스를 잡는 특유의 폼은 그만의 전유물로, 킥 동작의 시작에서부터 볼이 선수의 머리에 닿을 때까지가 마치 하나의 공예품처럼 느껴져 시간이 멈추는 것 같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엄청난 하드워커로 전성기 맨유 시절에는 리그 경기당 평균 뛴 거리가 14km##라는 말도 안 되는 활동량을 기록했던 적도 있다. 다만 2002년 말 부상 여파로 인해 운동능력 저하가 왔는지, 이후에는 플레이 스타일이 약간 변화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라 리가에서는 많이 뛴다는 소리를 들으며 팀에서는 높은 활동량 기록을 보여줬던 베컴이었지만, 전성기 맨유 시절에는 정말로 오른쪽 사이드의 끝에서 끝까지 그리고 중앙까지도 너끈하게 커버하면서 뛰어다니는 미친 하드워커였다.[20]

태클로 입은 부상으로 인한 운동능력 저하 전에는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지만 어쨌든 돌파력도 더 나을 수밖에 없고, 눈 감고도 아는 걸로 유명한 개리 네빌과의 호흡을 바탕으로 측면 공격의 진퇴를 자유자재로 조절했다. 여기에 미친 활동량으로 중앙에서의 공격작업에 참가해 반 니스텔루이에게 절묘한 땅볼 킬패스를 날리거나 본인이 공간 침투로 골을 넣기도 하고 반대편의 긱스에게 돌리거나 중앙의 로이 킨이나 스콜스에게 부드럽게 연결해 주기도 했다. 고전적 윙플레이어들은 측면의 붕괴와 그에 이어지는 크로스에 집중하지만, 베컴은 전성기 박지성급 활동량으로 중앙까지 넘나들면서 마무리 스루패스나 슈팅까지 관여했다. 괜히 바르샤 회장 선거 공약으로 베컴을 사오겠다는 공약이 나온 게 아닐 정도로 베컴은 맨유의 에이스였다.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주로 스탠딩 윙어로 뛰던 맨유 시절에 비해 보다 중앙에서 플레이하는 경우가 많아져서, 그동안의 킥 스루 패스 스타일보다 경기장을 휘젓는 엄청난 활동량이 부각되어 그 해 프리메라 리가에서 제일 많이 뛰어다닌 선수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라 리가에서는 얼굴빨이라는 비난이 쇄도하는 등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이는 부상으로 인한 운동능력 저하와 더불어 제대로 된 수비형 미드필더가 없던 갈락티코의 사정 때문이었다. 또 라 리가에 진출한 잉글랜드 선수들이 흔히 겪는 어려움 중 하나인데 느려진 템포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말년에 방출이 확정된 상태에서 오른쪽 날개로 돌아가 리가를 제패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본포지션에 돌아간 게 첫째고, 둘째로는 빠르고 위협적인 시싱요가 베컴에게 부족한 부분을 잘 메꿔줬기 때문이고, 호나우두 대신 영입된 반 니스텔루이는 훨씬 더 위협적인 공중전 능력과 더불어 많은 활동량과 활동범위로 수비를 흔들어 베컴에게 보다 더 많은 편의를 제공한 게 세 번째다.

AC 밀란에서는 안첼로티 감독이 있을 때는 주 포지션인 스탠딩 윙어에 가까운 플레이(중앙 미드필더이긴 하지만)를 하였지만, 레오나르도 감독 아래에서는 전술적 이유로 윙포워드로 출장했다. 하지만 우측 풀백으로 출장하는 이냐치오 아바테의 수비력이 개판 오분전인 관계로 윙포워드가 미친듯한 수비가담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기도. 어쨌든 생긴거나 플레이 스타일때문에 착각하기 쉽지만 대단히 부지런하고 열심히 뛰는 선수인건 확실하다.

5 사건

2002년 월드컵 직전이었던 5월 21일 잉글랜드와 한국이 평가전을 가졌는데, 경기종료 후 한국선수들이 유니폼 교환을 위해 벤치에 앉아있는[21] 자신에게 다가오자 유니폼 교환을 거부하고 유니폼을 교환하려던 다른 선수에게도 '얼른 락커룸에 들어가!'라며 호통을 친 일화로 논란이 되었다.

당시 베컴은 한국에서 그야말로 콩이 까이듯이 까이고 까여 가루가 되었다. 차범근도 칼럼을 통해서 대대적으로 비판했을 정도. 또한 얼마후 월드컵에서 일본과는 유니폼 교환을 해버린 덕에 다시 줄창 까였다(…).

결국 유니폼 교환 거부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당시 한국과의 경기가 잘 안 풀렸던데다 월드컵 개막이 불과 열흘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 선수들이 다소 거친 플레이[22]를 펼쳤던 점 역시 대회 직전까지 회복을 맞추느라 신경이 날카로워진 베컴의 심기를 건드렸을 수도 있다. 베컴은 당시 시즌 중에 입은 발목부상을 치료중으로,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에릭손 감독이 엔트리에 포함을 시켰지만, 회복이 더디어지면서 상당히 심기가 불편했던 상태였던듯. 참고로 당시 경기 결과는 1:1 무승부.[23]

2010년에는 이탈리아 TV의 농간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 농간이란…말하기가 정말 민망하다(…). 한국에서도 인터넷 신문들이 대서특필해서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이탈리아 여자 리포터가 베컴에게 접근해 거시기를 꽉 쥐어버린 것. 당시 베컴의 표정은 그야말로 뭐 이딴 미친년이 다 있어. 이 리포터의 말로는 작다 카더라 하지만 누드 사진엔 큼직한 고구마가...


2012년 6월 30일 캘리포니아 스탠포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미국 프로축구 LA 갤럭시와 산 호세 얼스퀘이커와의 경기에서 누워있는 선수를 정확한 킥으로 맞춰버려 화제가 되었다.

베컴의 활약에도 경기는 3-4 LA가 뒤지는 상황에서 추가시간을 맞이했고, LA의 마지막 기회일수도 있는 프리킥 찬스를 얻었다. 이때 산 호세의 샘 크로닌이 LA 선수들과 문전에서 몸싸움을 벌이다가 부딪혀 쓰러졌는데, 그라운드에 그대로 누워 일어나지 않고 시간을 지연시키는 침대축구를 시전했다. 프리킥에 실패한 베컴은 그의 시간지연에 화가 났는지 사이드라인 부근에서 누워있는 크로닌을 향해 슛을 날렸고, 공은 크로닌의 몸에 정확히 맞았다[24].일어나라 망자여! 방금까지 아파 죽을것같이 누워있던 공에 맞은 크로닌은 벌떡 일어나 심판에게 거칠게 항의했고, 주심은 베컴에게 경고를 주었다. 하지만 양 팀 선수들까지 흥분해 서로를 밀치는 몸싸움 직전까지 갔다. 경기는 다시 속개됐으나, LA의 패배로 끝이 났다. 화난 베컴은 다시 상대 선수와 몸싸움을 벌이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고, 경기를 중계하는 방송국의 프로그램을 홍보하러 그라운드에 진입한 나온 마스코트를 밀치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2012 런던 올림픽 대표팀에서 탈락해서 이러는 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침대축구에 응징을 가했다는 점에서많은 축구팬들이 찬사(…)를 보내고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레알마드리드로 이적할 때의 여담이다.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인 알렉스 퍼거슨이 베컴을 자신의 사무실로 오게해서 베컴에게 축구화를 던져 레알마드리드로 이적을 했다는설과 호베르투 카를루스와 광고를 찍을 때 카리스마에 반해서 이적했다는 소문이 있다

6 기타

부인 빅토리아 베컴스파이스 걸스라는 유명 걸그룹의 멤버. 초기엔 베컴보다 더 유명했지만 지금은 인기가 역전되었다. 언론에 전해지는 이미지에서 베컴은 빅토리아에 잡혀 사는 공처가로 그려진다. 불행하게 되기 쉽다는 슈퍼스타의 결합이지만 자식을 넷이나 둘 정도로 금슬 좋고 행복하게 사는 듯하다. 다만 슈퍼스타들의 결합이라 그런지 불륜설은 끝도 없다.

둘의 첫 만남은 베컴이 이제 막 축구계의 별로서 떠오르던 시점이었다. 베컴은 그 전부터 스파이스 걸스 중에서도 빅토리아의 팬이었는데, 동료들도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경기를 끝낸 베컴은 동료의 호들갑스런 부름에 '뭐야?' 싶은 심정으로 따라나섰는데 놀랍게도 관중석에 빅토리아가 다른 스파이스 걸스의 멤버와 함께 있었다고. 그 경기는 자신도 놀랄 만한 쩔어주는 골을 성공시킨 데다 축구계의 블루칩으로 나름 명성을 날리던 시절이었지만 말도 잘 나오지 않는데 빅토리아는 축구에도 별 관심이 없어 보여서 뭐야 이 듣보잡은 같은 느낌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고. 그러나 어찌어찌 만남을 이어가다 보니 서로 근처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사실 베컴은 축구 잘해 얼굴 잘 생겼어 섬세하고 감성적인데다 빅토리아만 보는 순정파라. 만날 당시 애차도 빅토리아 취향으로 바꾸고, 곧 미국 진출을 하게 되는 빅토리아에게 애정 어린 전화며 선물 공세를 퍼부어 스튜어트 빌튼이라는 골키퍼 있는 골대에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며 골키퍼를 제끼는 골을 성공시킨다.

또한 이 당시 원판밖에 없던 베컴은 빅토리아와 교제하며 스파이스 걸스 내에서도 최고의 패션 감각을 자랑하는 빅토리아의 지도 아래 완벽하고 화려한 꽃으로 거듭나게 된다. 다만 이 부분이 퍼거슨과의 갈등을 불러일으켜 맨유에서 축출되는 계기가 된다. 베컴 본인은 당시 빅토리아와 너무 행복했지만 축구 역시 맨유의 주축 선수로서 우승 행진을 이끄는 등 프로페셔널했다고 생각했던 반면, 퍼거슨은 축구밖에 모르던 바보의 변모가 달갑지 않았던 것. 베컴은 겉모습만 변한 것뿐만 아니라 대외활동까지 활발하게 시작했는데 퍼거슨은 베컴의 변모도 싫었지만 설사 베컴 자신은 어떻게 잘 제어를 하더라도 주위의 다른 어린 것들이 나쁜 물이 들까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25]

2010년대의 한국인들에겐 잘 실감이 나진 않지만 90년대 스파이스 걸스와 빅토리아는 정말로 지구 최고의 걸그룹이었고 베컴과의 결합은 영국을 그야말로 들었다 놓는, 마치 연예인 누구누구 머리띠나 팔찌 등이 유행을 일으키는 것처럼 그 자체만으로도 사회현상이나 경제현상을 일으키는 초대형 가십이었다. 이에 퍼거슨은 시시때때로 베컴을 집적거렸는데 베컴은 젊었고 퍼거슨은 당시에도 이미 스코틀랜드 영감님이었다. 털털하게 웃으며 넘긴다면 별 거 아닌 일이 될 수 있었지만, 안 그래도 섬세한 기질이 있는 베컴은 늙은이의 이런 태도가 나를 부당하게 대하고 존중하지 않는다고 여기게 되었고 둘 사이는 악화일로를 달리게 되었다.

당시 베컴이 축구를 등한시했다면 모를까 이전의 축구밖에 모르는 축덕후 모드에서 벗어나긴 했어도 여전히 성실히 훈련하는 선수였다. 자서전에서 퍼거슨이 전화로 '누가 빅토리아랑 니가 어디 있는걸 봤다던데' 하면서 어디있는지 불라는 식으로 나오기도 했다고 밝혔다.

슈퍼스타 부부답게 인맥이 축구계뿐 아니라 연예계까지 폭넓게 퍼져 있다. 활동반경도 매우 넓다. 쉼없는 광고 활동은 물론, 유니세프 등 공익성 활동에도 꾸준히 시간과 자산을 투자하고 있다.

왼쪽 팔뚝에 아내 빅토리아의 이름을 힌디어로 새겼으나 글자가 잘못 들어가 '비흑토리아'가 되어버렸다 한다. 베컴의 대변인은 이에 대해 힌어와 힌어는 다르다는 개드립을 쳤다.

아들 부자다. 큰 아들 브루클린, 둘째 아들 로미오, 셋째 아들 크루즈 모두 훈훈한 외모를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도 딸을 가지고 싶어서 여러모로 노력한 결과 드!디!어! 딸을 갖게 되었다. 얼마나 좋았으면 태어나지도 않은 딸 방을 꾸미는데 무려 2억 3천만원을 들였다고 한다. 2011년 7월 드디어 딸 하퍼 베컴 출생. 팔불출이 될 것이 예상된다. 아빠가 레전드, 엄마는 패셔니스타, 오빠들은 원빈. 재산은 황금산. 유전자 라인을 생각하면 외모도 그다지 걱정없이 순풍을 타게 될 듯.인생 치트키 브루클린과 크루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이지만 로미오는 아스날 팬이라고 한다. 로미오는 모델 활동도 하고 있으며 2014년 아스날 유스팀에 입단해서 뛰고있다.브루클린은 퀸스 파크 레인져스 유스팀에 입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무근으로 알려졌으며, 베컴은 인터뷰를 통해 세아들 모두 아스날 유스팀에서 뛰고 있다고 밝혔다. 세 아들 중 축구선수로써의 재능은 로미오가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중.

아이들을 마냥 오냐오냐 키우는게 아닌지 첫째 아들 브루클린은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런던의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시급은 2.68 파운드로, 만 16세 미만이기 때문에 최저임금보다 적다. 커피숍 아르바이트 외에도 모델일을 하고 있다.
romeo-beckham-arsenal-fan.jpg
로미오와 함께 아스날 경기를 관전중인 베컴, 아들아 아빠는 맨유 레전드란다.

'베컴의 목소리를 안 들어봤으면 꼭 들어봐라! 한 5분 동안은 실실 쪼갤 수 있다'는 식으로 네티즌들에게 놀림받았던 적이 있다. 난 둘돠 [26]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발성법이 조금씩 바뀌기도 했고, 또 목소리 교정도 따로 받아서 그런지 현재의 목소리에서는 이전부터 지적(?)받아온 삐걱대는듯한 고음부가 예전보다 많이 줄어든 상태다. [27][28] 그나마 하나 있던 약점마저.. 그래도 최근 영상들을 살펴보면 일부 영상에서는 보통의 목소리 톤을 띄지만 일부 영상은 하이톤이 나오는 등 전체적으로 목소리 톤에 기복이 있는 편이다. 그냥 컨디션에 따라 목소리 톤에 기복이 생기는 타입이거나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본래 목소리가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목소리가 가늘다는 기믹은 빼도박도 못하는지 영화에서도 데드풀이 "헬륨가스랑 검열삭제(...)한 목소리"라고 깠다. (어떤 검열삭제가 진짜 검열삭제 항목으로 링크해놨다.)

일본에서의 인기가 장난이 아닌데,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 출전했던 잉글랜드 대표팀은 조별 예선을 일본에서 치뤘는데, 어느 구장을 가던간에 웸블리에 버금가는, 홈에 가까운 일방적인 응원을 받았다.[29] 이게 다 베컴이 대표팀에 있었기 때문. 심지어 베컴 닮은 꼴로 활동하는 사람이 일본에 갔다가 대형 음반점 앞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덕에 앙죽전인 아르헨티나전에서 잉글랜드가 공을 잡으면 관중들이 환호성을 지른 반면 아르헨티나가 공을 잡으면 관중들이 야유를 퍼부었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가 일본의 한 시골 초등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학생들 반응이 '근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식으로 영 좋지 않았는데,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블레어 총리가 "아저씨는 베컴과 같은 나라 사람이란다." 라고 말하자마자 학생들 반응이 갑자기 열광적으로 바뀌었다는 일화도 있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때 베컴은 아르헨티나 대 세르비아몬테네그로전을 관전했다. 이 경기가 아르헨티나의 학살극으로 끝나자 베컴은 소감을 묻는 질문에 "내가 마라도나였어도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서 손으로 골을 넣었다. 스포츠정신이고 뭐고 간에 우리와 아르헨티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승리가 절박한 상대였다. 지금 아르헨티나랑 맞붙으면 잉글랜드로서는 아르헨티나를 이길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대표 명대사로는 2009년 모토로라의 MOTO V10 한국용 광고에 나왔던 "난 둘돠(Nan Dool d'wa)."가 있다. 블랙 앤 레드를 고민하다가 둘을 선택한다...짜장 짬뽕에선 짬짜면 고를 기세 이랬던 얘가 훗날 옆 동네에서 축구공으로 징을 쳤다 무엇보다 이번엔 외국어 발음 굴욕이 없다

상체에 한문 문신을 하고 있다. 아니, 상체 전체에 문신이 엄청나게 많다. 왼쪽 상체 세로로 고사성어 '생사유명 부귀재천(生死有命 富貴在天)'이 초서체로 적혀 있는데, 뜻은 '생사는 수명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에 달렸으니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베컴은 첫째인 브루클린을 낳고 등에 천사 문신을 하고 아들의 이름을 새기는 것으로 문신을 시작했는데, 처음 문신을 했을때엔 너무 고통스러워서 다시는 안하리라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새겨진 것이 마음에 들어 점차 문신을 늘렸고, 그리고 자녀들이 늘어나면서 이름을 더 새기기 시작했고 이제는 상체 전체가 문신으로 뒤덮였다.

article-2595897-1CCAFD1000000578-829_634x810.jpg
H&M바디웨어 광고를 찍는 중인 베컴, 상체 전체가 문신으로 덮여있다.

축구 선수가 되지 않았다면 화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휴식시간엔 종종 취미로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슈퍼스타들이 그런 경우가 많지만 친절한 성품이라고 한다. 한국에도 이벤트로 la 갤럭시로 가서 베컴을 만난 팬들이 있었는데 서슴없이 포옹도 하며 서글서글하게 대해주는 그 친절함에 녹았다고.

dvroyalwed1.jpg
2011년엔 윌리엄 왕자의 결혼식에 초청되어 빅토리아 베컴과 함께 기품 있는 자태를 뽐냈다. 가슴에 달고 있는 것은 2003년에 받았던 4등급 훈장(OBE) 메달이다.

테니스에 관심이 많은지 매년 6월말~7월초에 열리는 그랜드슬램 대회중 하나인 윔블던 관중석(VIP만 앉을 수 있는 로얄박스석)에서 그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어째 굴욕광고를 많이 찍었다. 가장유명한건 뭐니뭐니 해도 아디다스 광고로 당시에는 만화나 짤방 등으로 많이 패러디가 되었었다. 한 소년에게 제일 좋아하는 축구선수를 물었더니 고민도 않고....


베컴 : 제일 좋아하는 선수가 누구아?

소년 : 제라드요
베컴 : 난 둘돠어.......음.......어...... 그래?
소년 : 음......
베컴 : 그렇구나.... 리버풀팬에게 왜 물어봐..? 맨유 팬에게 물어봐서 스콜스라고 하면 더 굴욕이잖아


그 외에도 베컴에게 유니폼을 요구하길래 베컴이 멋지게 벗어줬것만 그걸로 콜라에 맺힌 베컴의 침을 닦는 소년. 그리고 뒤돌아선 소년은 유벤투스의 팬임이 밝혀진다.그 뒤에 깨알 카를로스

아들 브루클린의 인스타그램 100만 팔로워 기념 영상에 기습 출연하여 자기는 팔로워가 5200만명있다며 굴욕을 주었다(...) 빅토리아에게 등짝 스매싱 예약 왜 우리 브루클린 기를 죽이고 그래요

헬스 키친 시즌10의 에피소드11화에 특별 출현해서 신랄한 갈굼의 현장주방이 가장 잘 보이는 VIP석에서 식사를 대접받았다.

7 경력

7.1 출전 기록

시즌클럽소속리그리그FA 컵리그 컵대륙대회
경기득점경기득점경기득점경기득점
1992/93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00000000
1993/94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00001000
1994/95프레스턴 노스 엔드잉글랜드 디비전 3520000--
1994/95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40203011
1995/96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337312020
1996/97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3682100102
1997/98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379420080
1998/99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3464200122
1999/00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316--00122
2000/01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3192000120
2001/02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28111000135
2002/03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3163151133
2003/04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라 리가32342--71
2004/05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라 리가30400--80
2005/06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라 리가31331--71
2006/07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라 리가23221--60
2007LA 갤럭시미국 메이저리그 사커5000----
2008LA 갤럭시미국 메이저리그 사커25500----
2008/09AC 밀란이탈리아 세리에 A18200--20
2009LA 갤럭시미국 메이저리그 사커11200----
2009/10AC 밀란이탈리아 세리에 A11000--20
2010LA 갤럭시미국 메이저리그 사커7200----
2011LA 갤럭시미국 메이저리그 사커26200----
2012LA 갤럭시미국 메이저리그 사커24700--10
2012/13파리 셍제르망프랑스 리그앙10020--20

8 개인 수상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상 (1) : 1996년 8월
  • PFA 연간 최우수 신진 선수상 (1) : 1996–97
  • 맷 버스비경 올해의 선수 (1) : 1996–97
  • PFA 연간 베스트 일레븐 (4) : 1996-96, 1997-98, 1998-99, 1999-00
  • UEFA 최고의 미드필더상 (1) : 1998–99
  • UEFA 연간 최우수 선수상(MVP) (1) : 1998–99
  • 프리미어 리그 10시즌 어워드(1992–93 ~ 2001–02)
  • 10주년 기념 베스트 일레븐 선정
  • 10주년 기념 베스트 골 : 1996년 8월 17일, 윔블던전에서의 골
  • 20세기의 위대한 축구 선수 100명 49위 : 1999년
  • NFA 올해의 선수상 : 2000년
  • BBC 선정 올해의 스포츠인상 : 2001년
  • UEFA 올해의 베스트팀 : 2001년, 2003년
  • FIFA 100 선정
  • ESPY 어워드 - 최고의 남자축구선수 선정 : 2004년
  • 레알 마드리드 올해의 선수상 (1) : 2005–06
  • ESPY 어워드 - 최고의 MLS 선수상 : 2008년
  • 잉글랜드 명예 축구 전당 : 2008년
  • FWA 공헌상 : 2008년
  • BBC 선정 스포츠 평생 공로상 : 2010년
  • MLS 올해의 재기상(Comeback Play of the Year) : 2011년
  • MLS 베스트11 선정 : 2011년
  • UEFA 특별상 : 2012년
  • ESPY 어워드 - 최고의 MLS선수상 : 2012년

9 홍보 대사

  • 2005년 ~ (현재) 유니세프 친선대사
  • 2005 ~ 2012년 2012 런던올림픽 홍보대사
  • 2008 ~ 2010년 "2018년 잉글랜드 월드컵" 홍보대사
  • 2010년 ~ (현재) 야후! 글로벌 축구 홍보대사
  • 2011년 ~ 2012년 삼성전자 런던 올림픽 글로벌 홍보대사
  • 2013년 ~ 중국 슈퍼리그 홍보대사

10 대회 실적

  • 레알 마드리드 (2003/04 - 2006/07)
    • La Liga (1) : 2006/07
    • Supercopa de España (1) : 2003
  • LA 갤럭시 (2007 - 2012)
    • MLS Cup (2): 2011, 2012
    • MLS Supporters' Shield (2): 2010, 2011
    • MLS Western Conference
      • Winners (Regular Season) (3): 2009, 2010, 2011
      • Winners (Playoffs) (3): 2009, 2011, 2012
  • 파리 셍제르망 (2012/13)
  1. 대영제국 훈장 4등급(OBE)을 받았음을 나타냄.
  2.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출전 역대 2위. 1위는 피터 쉴튼
  3. 할리우드 배우급 외모, 유명 언론들이 즐비한 잉글랜드 출신, 세계적인 팝스타와의 결혼, 맨유-레알 마드리드로 이어지는 클럽 커리어, 유니크한 플레이 스타일 등 스타가 되기 위한 조건들을 거의 다 갖췄다고 할 수 있다.
  4. 이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1990년대 중반의 올드 트래포드에선 웬 순정만화 남자주인공이 맨유 유니폼을 입고 축구를 하고 있었다.(...)
  5. 2010년 FIFA U-17 여자 월드컵 트리니다드 토바고 대회 결승전에서 한일전이 벌어져서 양국 축빠들의 관심이 집중되었을 때 FIFA의 높으신 분들과 함께 등장하여 경기 전에 선수들과 악수를 했다. 당연히 양국의 아이들(선수라 해도 만 16~17살인 고딩들이었다.)은 경악하였다. 하지만 귀국 후 한국 선수들이 인터뷰에 나왔을 때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별로였다느니 하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6. 긱스 왼쪽의 트로피를 들고 있는 사람이 이 선수들을 유스시절부터 키워낸 에릭 해리슨 코치다.
  7. 1998/1999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만난 바이에른 뮌헨과 맞대결에서 경기종료 직전 베컴에게 찾아온 2번의 코너킥은 정확히 셰링엄과 솔샤르에게 연결되어 골로 연결되었고 맨유에게 챔스 우승을 안겨주었고 이는 캄프 누의 기적이라며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8. 다만 미국 이적은 관점을 달리해서 볼 여지도 있다. 미국 축구를 발전시킨 것도 사실이고, 부인의 활동을 지원해 주며 가정생활을 훈훈하게 만들기도 했다.게다가 커리어 마지막까지 그 실력을 유지한 걸 봤을때 결코 축구에 헌신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9. 둘의 사이도 이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될 법되지 않은게 베컴은 맨유 아니면 다른 EPL팀으로는 갈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할 정도로 뼛속까지 맨유 팬이라고 인터뷰에서 꾸준히 밝힌 바 있으며 하지만 아들 로미오가 아스날 팬 퍼거슨 감독과의 관계 역시 몇 년 전 맨유 선수들과 감독님을 직접 만나러 런던으로 찾아가기도 했고 이벤트 매치 때 맨유 선수로서 참가하며 함께 얘기를 나누는 등, 이번에 퍼거슨 감독이 은퇴했을 때에도 본인 페이스북에 퍼거슨 감독에 대한 장문의 감사함의 글을 남기기도 했으며 퍼거슨 역시 베컴의 은퇴 이후 그에 대해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베컴의 은퇴 이유 역시 자기를 어린 시절부터 키워준 퍼거슨 감독의 은퇴에 정신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있을 정도. 사실 자택이 런던이라 훈련하러 굳이 촌동네인 맨체스터까지 갈 필요가 없기도 하다.
  10. 7번을 달지 못하자 미국시장 공략을 염두에 두고 조던의 번호 23번을 고르라고 빅토리아가 조언했다고 한다.
  11. 베컴은 미국에서의 축구 인기를 높이기 위해 LA 갤럭시에 갔다고 밝혔으며, 실제로 LA 갤럭시에서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관중이 상당한 수 늘어나는 등 미국 축구 리그 MLS를 어느정도 부흥시키는데에 기여했다. 또한 유니폼 팔이도 평균의 3배 이상으로 다른 선수들과 비교를 불가하며, 아디다스의 인터뷰에 의하면 미국 최고의 농구선수인 르브론 제임스 등보다도 판매율이 높다고 한다.
  12. 전 레알 팀메이트인 라울 곤살레스가 캡틴이다.
  13. 로미오는 열렬한 아스날의 서포터로서 맨유가 아닌 아스날의 유스팀에 입단했다.
  14. 웨인 루니가 있긴 하지만, 둘의 축구 스타일이 달라 베컴과 조합이 잘 맞지 많는다.
  15. 판 니스텔루이가 잉글랜드 국적이었다면 잉글랜드의 축구 역사가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16. 박지성이나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같은 일대일 마크가 뛰어나고 활동량이 많은 선수에게는 지워지는 경기가 몇번 있었다. 실제로도 베컴을 막는 전술 중에 하나이다.
  17. 잉글랜드전의 패전으로 인해 아르헨티나는 동점 골을 넣은 크레스포눈물겨웠던 바티의 투혼에도 불구하고 조별 예선에서 스웨덴과 비겨 결국 탈락했다. 이후 포체티노는 국가대표팀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은퇴하였다...그래서 아르헨티나 출신이 영국에서 지도자를 하고 있는 건가?
  18. 당시 베컴의 월드컵 대표팀 발탁 가능성은 반반이었지만, 카펠로는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베컴을 뽑는 쪽으로 거의 마음먹고 있었다고 한다.
  19. becksexpress(...)
  20. 중앙보다는 전력 질주나 방향전환 할 일이 많은 윙포워드의 체력소모가 같은 활동량에 비해 더 심하다.
  21. 베컴은 당시 시즌중에 입은 부상을 치료중으로, 경기에 출전하지는 않았다. 월드컵 출전이 불투명한 상태였지만 에릭손 감독은 전력의 핵심인 그를 엔트리에 포함했고, 베컴은 월드컵까지 회복하여 출전했다.
  22. 사실 이 때까지만 해도 히딩크 감독에 대한 이미지는 썩 좋지 못했다. 2001년에는 '오대영 감독'이라는 별명이 유행했을 정도였고 2002년 들어서도 우루과이에 패하고 북중미 골드컵에서는 쿠바와 0:0 무승부에 캐나다를 상대로 1:2 역전패를 당했으며 심지어 4월 27일 중국과의 평가전에서조차 0:0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본선에 대한 불안감이 컸던 상황. 이러한 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이후 평가전 때마다 선수들이 죽기 살기로 경기에 임하다보니 다소 거친 플레이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며칠 전이었던 5월 16일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는 무려 4:1의 스코어로 한국이 이겼고 잉글랜드전을 무승부로 끝내면서 히딩크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싹 걷혔다.
  23. 전반에 마이클 오언이 선제골을 넣었으나 후반 초반에 박지성이 헤딩 동점골을 기록.
  24. 조금만 옆으로 빗나갔으면 주심에게 맞아 옐로가 아닌 레드 카드가 나왔을 것이다… 라고 써있지만 동영상을 보면 주심도 튕겨서 맞았다.
  25. 당장 한국만 해도 연예계의 단맛을 즐기던 고종수가 결국 쓴맛을 본 바 있다. 뭐 고종수 외모가 원빈급이었으면 뭘 해도 됐겠지만...
  26. 오죽하면 축구의 신은 축구선수를 만들 때 꼭 하나씩 빼고 만든다는 우스갯소리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메시를 만들면서 키를 빼먹고, 호날두를 만들면서 패션감각을 빼먹고, 펠레를 만들면서 승부예측을 빼먹고...
  27. 베컴의 목소리와 화법의 변화에 대한 BBC 기사, 베컴의 목소리 변화에 대한 칼럼
  28. 이전 목소리와 비교한 동영상. 톤 자체가 많이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29. 당시 주한미군내 여행사에서는 한국 경기를 포함한 거의 모든 경기의 티켓을 예약할 수 있었지만, 일본과 잉글랜드 경기는 불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