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술라

1 개요

고대 로마의 다층 주택이자 다세대 주택. 아파트의 기원이라 볼 수 있다.
로마보다 앞서서 인더스 문명모헨조다로 유적에서 진흙 벽돌 계단이 발굴되었으나, 이것은 2층 연립주택인지, 혹은 단순히 옥상의 평평한 공간을 사용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며, 후대에 끼친 영향을 볼 때 본격적인 다층주택의 기원은 인술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2 배경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시(市)의 인구가 폭증하면서 주택 수요도 같이 늘어났는데, 시대적으로 토목기술에 한계가 있는 데다가 신전 부지들을 밀어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로마 성을 무한정 확장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부동산의 가격이 치솟았는데, 길은 좁게, 건물은 높게 만들어 단위 면적 당 거주 가능 인구를 증가시키고 지대 부담을 분할하고자 하면서 고층의 인술라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전에도 인술라가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저층의 인술라가 소수 있었을 뿐이며, 포에니 전쟁을 기점으로 고층의 인술라 건설이 활성화되었다.

3 어원

라틴어 인술라(insula)는 섬, 섬나라, 섬 주민, 외딴집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주택으로서의 인술라(복수형은 insulae)는 ㅁ자 모양으로 안뜰을 둘러싼 형태로 건설되거나, 골목길에 둘러싸인 인술라의 모습이 섬과 비슷해 보여서, 혹은 그 폐쇄적인 내부구조에서 영향을 받아 이러한 이름이 지어졌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다.

4 구조

[1]
[2]
로마의 외항인 오스티아에서는 옛날의 인술라의 모습이 잘 보존된 상태로 발굴되었는데, 그 구조는 한 층에 복도로 연결된 여러 개의 방이 있는 것으로, 외국의 영화들에 나오는 아파트의 구조와 유사하다.
고층으로 갈수록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고, 오르내리기 불편하며, 천장의 높이가 낮은 데다 화재 발생 시 대피하기 어려워 값이 저렴했다. 반면, 오르내리기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서도 지표면보다는 높아 사생활이 보호되는 2층의 경우 값이 비싸 행정관, 법률인, 의사 등 비싼 집값을 부담할 수 있는 전문직들이 거주했다.
1층이 통째로 주거공간으로 사용된 경우나, (1층에) 수도가 공급될 정도의 시설을 갖춘 경우 1층에 한해서는 귀족층이 거주하는 단독 주택인 도무스(domus)처럼 살기 좋다는 비유적 의미로 도무스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보통은 길가에 면한 벽을 터 놓고 상점(tabernae)으로 활용되었으며, 뒤뜰에 접한 쪽은 가내 수공업을 위한 작업실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더러는 2층까지 상가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5 자재

하부는 벽돌로 지어졌으나 상부로 갈수록 목재나 진흙 등 약한 재료를 사용하였다. 좁은 면적에 높은 층수를 올리는데 상부까지 무거운 석재를 올리면 하중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각 층의 바닥과 천장에는 아주 두꺼운 나무 들보(beam)를 끼워넣었는데, 이로 인하여 건물이 그 자체의 하중을 견디기 수월하지 않아 붕괴 사고가 빈발하였고, 화재 발생 시 층마다 화력 좋은 장작으로 변해 위험도를 높이는 요인이었다.
또, 기원전 3세기에 출현해서 기원전 2세기 이후 활발히 사용된 원시적인 콘크리트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캄포니아 지방에서 산출된 포졸라나(pozzolana)라 불리는 천연 시멘트와 같은 화산회토, 석회, 부순돌(자갈)이나 벽돌조각들을 혼합시켜 목재 틀이나 벽돌 칸막이 안에 부어서 만드는 이 로마식 콘크리트는 접합재와 마감재로 사용되었지, 현대처럼 주재료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6 단점

6.1 안전

건축 기술의 미숙과 날림 공사, 불법 증축으로 인하여 붕괴 위험이 굉장히 높았고, 들고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있는 난로나 촛불, 야간조명을 위한 횃불과 연기나는 램프 등을 가지고 건물 내부를 돌아다녔으니 언제든 화재가 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번 화재가 났다 하면 불이 난 층의 위쪽 층에 사는 사람들은 대피할 방법이 없었다. 유베날리스는 자신의 친구에게 하룻밤만이라도 좋으니 붕괴나 화재 걱정 없이 마음 편하게 자 봤으면 하는 바램이 있으며, 로마를 떠나야 할지 고민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6.2 위생

6.2.1 채광과 통풍

각 호의 깊이 방향으로 방들이 배치되어 통풍 여건과 채광 여건이 모두 좋지 않았다. 단독주택과는 달리 아트리움이 없어 환기에 불리한 조건이기 때문에 내부에서 조리한 음식의 냄새가 며칠씩 배어 있거나 화로를 때면서 발생한 유독가스가 차기도 했다. 특히 인술라에 거주하는 서민층은 오랫동안 잘 말린 고급의 땔감을 사용할 형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땔감을 태울 때 유해한 연기가 나오기 일쑤였다. 여름에는 극도로 더웠으며, 겨울에는 극도로 추웠다. 그리고 쥐와 벌레, 기생충이 들끓었으며, 벽의 갈리진 틈으로 습기가 차 곰팡이가 피기도 하였다.

6.2.2 난방과 취사

인술라에서는 운반이 가능한 화로 또는 벽돌 화덕을 요리 장소 겸 난방기구로 사용했다. 한국의 온돌과 유사한 히포카우제(hypocause)는 공중 목욕탕 등 대규모 공공시설에 온수를 공급하기 위해 사용되었지 개인 주택의 난방용이 아니었으며, 화재에 대한 우려와 더불어 일산화탄소 등 유독가스 문제로 인하여 방마다 제대로 된 화로를 갖추지는 못하고, 보통 1층에 위치한 공동 화덕을 이용하거나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어야 했다.

6.2.3 식수

로마에 상하수도 시설이 완비되었다는 것은 오해이며, 프론티누스도 공공용(ad usum populi)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제국 시절에도 계속해서 수도시설은 공중 목욕탕에 물을 공급하는 등의 목적을 가진 공공의 재산이었지 결코 개개인의 편의를 위한 시설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로마 시민은 우물물을 길어다 사용했는데, 지하수는 오염에 취약할 뿐더러 수인성 전염병의 좋은 매개체다.
극히 일부의 경우로 1층에 한정하여 수도가 공급되는 인술라가 있었지만, 이러한 인술라는 귀족의 장원인 도무스(domus)처럼 살기 좋다는 비유적 의미로 도무스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당연히 아무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6.2.4 분뇨

요강(lasana)이나 좌변통(sellae pertusae) 등 항아리에 볼일을 본 다음, 도랑 혹은 계단 밑이나 앞에 있는 공동 분뇨 수거통(dolium)에 버리거나, 공중 화장실을 이용하였다. 때로는 무두장이 등이 작업에 사용하고자 오줌을 수거해가기도 했다.
하지만 곱게 도랑에 따라내는 사람은 "교양 있는"사람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술라의 계단을 오르내리기 귀찮아했기 때문에(엘리베이터가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더욱이) 오수나 수챗물 등을 창문에서 바깥의 도랑을 향해 대충 뿌리는 일이 많았는데, 이 때 행인에게 오물이 튀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대 어떤 시인은 인술라 근처를 지나면 누군가 던진 물건에 맞아 다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시를 짓기도 했으며, 하도 이런 불상사가 많았는지 이를 규제하는 법률이 생길 정도였다. 단, 창문 밖으로 오물을 뿌리는 행위는 낮 시간 동안만 제한되었으며, 밤에는 얼마나 뿌려대건 상관이 없었다. #
또, 공동의 분뇨를 모으는 항아리는 당연히 냄새가 아주 잘 풍겼기 때문에, 카이사르 시대에 특히 열악한 동네나 좁은 길목들은 계단 앞에 놔둔 분뇨통 때문에 악취가 진동했다고 하며, 집주인의 성향에 따라 집주인이 자신의 인술라에 이를 비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러한 경우 이웃에 접한 인술라의 것을 사용하기도 했다. 공중 화장실은 지금의 유럽도 그렇듯이 이 때의 로마 역시 공중 화장실은 이용료를 지불해야 하는 유료 화장실이었기 때문에 이용률은 높지 않았다.

6.3 층간소음

하중 문제 때문에 저층이 아니면 진흙이나 목재를 대충 얽어 날림으로 공사하는 판에 방음을 신경쓸 수 있을 리가 없다. 비교적 부유했던 세네카는 공중 목욕탕 위에 자리잡은 공동주택에 거주했는데, 그 곳에서 세네카는 자신이 거지나 다름없이, 거리에 들려오는 이륜마차 소리, 악사와 칼 가는 사람들의 소음, 더 나아가 위층에 살았던 목수의 이야기 소리와 아래층에서 목욕하는 사람과 행상인이 서로 나누는 잡담, 고함소리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7 인술라가 갖는 "최초"

7.1 최초의 주상복합

장원인 도무스(domus)의 경우 길가에 접한 벽은 전부 폐쇄하여 사생활을 보호하는 구조이나, 인술라는 길가에 접한 경우 이를 장점으로 활용하였다. 바로 길가에 접한 벽을 터놓고 상점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한 건물에서 주거용도와 상업용도가 모두 나타난다는 점에서 최초의 주상복합으로 판단해도 좋을 것이다.

7.2 최초의 부동산 투기

삼두정치로 유명한 크라수스는 화재가 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급히 달려가 헐값에 불탄 건물이나 인근의 건물을 사들이고 재건축한 다음 세를 놓는데,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키케로가 남긴 그와 관련된 일화로 부실 공사로 인해 자신(크라수스) 소유의 인술라 한 동이 붕괴되자, 그 자리에 더 높은 인술라를 지어 더 큰 돈을 벌 수 있겠다고 좋아하기도 했다는 어휴 저 졸부녀석 쯧쯧 하는 기록이 있다. 또, 웅변가로 유명한 세네카는 대지주이기도 했는데, 시골의 농장들뿐만 아니라 인술라도 다수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도 인술라의 방 한둘이 아니라 건물 자체를 통째로 말이다. 지금으로 치면 아파트 단지를 통째로 가진 부동산 재벌인 셈이다. 조물주 위의 건물주
이런 큰손들은 폼페이의 도무스 등에 살면서 귀찮은 인술라의 관리 업무를 전문 관리인에게 떠넘기기도 했는데, 이들은 건물 보수, 세 관리 등의 업무를 대행하는 대신 건물주에게 2층의 임대료만 지불하는 등의 혜택을 입기도 했다. 한국 근세나 근대의 농촌 사회에서 지주를 대신했던 마름과도 같은 역할이라 할 수 있다. 평범한 서민들은 이들로부터 세를 들어 살게 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세를 든 다음 다른 사람에게 다시 세를 놓아 차익을 챙기는 것이 성행했다는 점이다. 3차, 4차 세입자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7.3 님비현상

인술라의 1층의 경우 상업용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어떤 상점이든 자유롭게 입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시끄럽고 그을음이 생기는 대장간이나 악취가 나는 가죽점 등은 주민들이 직접 또는 건물주를 통해 간접적으로 압력을 행사하여 퇴거시키기도 했으며, 이러한 혐오 시설이 있는 곳은 비슷하면서 이러한 혐오 시설이 없는 곳에 비해 집값이 더 낮았다.

8 규제

유베날리스, 키케로, 플루타르코스 등의 기록을 보면 인술라가 얼마나 화재와 붕괴의 온상인지는 당대의 로마인들도 인식하고 있었고, 프린켑스 아우구스투스는 사적 건물의 최대 고도를 70 로마 피트(20.7m)로 제한하고 하부는 벽돌로 지으라 하였으며, 네로는 로마 대화재 이후 가연성 재료의 사용을 금지함으로써 나무 들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 아치 기술의 활용을 촉진시켰고, 세대별 발코니 설치와 충분히 넓은 현관의 확보와 함께 주변 건물과 벽면을 공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3m를 이격하게 함으로써 소방 겸 대피통로를 확보하고 주변 건물로 불이 쉽게 옮겨 붙지 않도록 했다.[1] 이후 트라야누스가 다시 최대 고도를 60 로마 피트(17.75m)로 제한했으나 건축업자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높은 인술라를 짓기에 여념이 없었다. 눈앞의 금과 은이 법조문보다 더 크게 다가왔던 것이다.

당시 인술라 건설업자들에게는 입주자의 안전보다는 돈벌이가 우선이었기에 질 낮은 재료로 조악하게 시공하여 붕괴 위험이 상존하였고, 온도와 습도, 위생, 화재 시 대피의 어려움 등 여러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여러 규제를 통해 체계적인 건축법과 소방법에 대한 개념을 가져왔다. 특히 네로의 규제는 아치 건축 기술의 발달과 상하수도 설비 보급을 촉진하였고, 로마 멸망 이후 전성기의 로마 시와 같은 대도시가 사라지며 그 흔적도 함께 사라지는 듯하였으나, 그 개념은 근대 유럽(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의 다층 주택으로 이어졌으며, 현대의 아파트에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 다만 네로의 규제 내용은 문헌에 따라 그 내용이 상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