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문서 :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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管山城 戰鬪
관산성 전투 | ||
날짜 | ||
554년 7월[1] | ||
장소 | ||
관산성[2]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백제군, 가야군, 일본군 | 신라군 |
지휘관 | 성왕(聖王)† 부여창(扶餘昌) 축자국조(筑紫國造) 그외 미상 | 진흥왕(眞興王) 김무력(金武力) 우덕(于德) 탐지(耽知) 도도(都刀)[3] 그외 미상 |
병력 | 불명 | 불명 |
피해 규모 | 성왕 전사 좌평 4명 전사 병력 2만 9600명 전사[4] | 불명 |
결과 | ||
백제군 대패, 성왕 전사. | ||
기타 | ||
나제동맹의 사실상 해체 |
1 소개
백제와 신라 간의 전투 중 가장 유명하며 또 기록상으로 삼국시대 전투 중 가장 자세하게 기록된 전투다. 흔히 백제 성왕의 죽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성왕이 성에서 김무력 장군에게 무력으로 죽은 전투 이 전투가 있었던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후반 신라의 삼국통일까지 이어지는 후기 삼국시대의 판도에 큰 영향을 끼친 매우 중요한 전투다.
2 배경
고구려 장수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남진 정책에 상대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는 서로 부족한 전력을 보완하기 위해 나제동맹을 결성한다. 이후 고구려가 백제로 쳐들어오면 신라가 원군을 보내고, 신라에 쳐들어오면 백제가 원군을 보내는 식으로 공동대응해서 강대국 고구려를 한동안 막아내고 있었고, 548년의 독산성 전투 때까지도 이런 동맹은 유효했다. 양국간의 협력은 550년에 신라와 힘을 합쳐 드디어 고구려군을 몰아내고 북진에 성공해 한강 하류는 백제가, 한강 상류는 신라가 차지하는 데 성공하면서 어느정도 효과를 보게 되었다. 백제 성왕은 위례성을 비롯한 고토를 회복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강유역을 확실하게 점유하려고 했지만 신라의 진흥왕이 역으로 하류로 내려와 한강 유역을 단독으로 모두 차지하게 된다.[5]
이로 인해 백제의 한강유역 회복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고 신라와의 유대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한강 유역을 모두 빼앗긴 게 억울하지도 않은지 성왕은 3개월 후 자신의 딸을 신라 왕실에 시집보내며 유화의 제스쳐를 취한다.
31년(서기 553) 가을 7월, 신라가 동북쪽 변경을 거두어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겨울 10월, 임금의 딸이 신라로 시집 갔다.
《삼국사기》성왕 조
가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거두어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겨울 10월, 임금이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작은 부인으로 삼았다.
《삼국사기》진흥왕 조
이 기록은 이후의 흐름을 봤을 때 성왕이 신라를 치기 전에 신라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딸 하나를 희생하는 수를 쓴 것으로 보인다. 결국 결혼동맹 1년 후인 554년, 성왕은 갑작스럽게 일부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보복을 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시집간 딸의 운명은... 이 신라 보복군에는 대가야와 일본의 원군도 합세하였다. 백제의 이와같은 군사동원으로 양국간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3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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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이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전쟁 초기에 백제군은 신라의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며 우세를 보였으나, 김무력이 한강 유역(신주, 新州) 점령군을 이끌고 원군으로서 도착하자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고[6], 이에 성왕이 전세를 만회하고자 기병 50여기[7]를 이끌고 밤을 틈타 신라군을 야습하려던 중 구천(狗川)지역에서 거꾸로 신라 복병의 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성왕은 신라의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8] 도도(都刀)란 자에게 살해당했다.
물론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백제군이 승리하자 승세를 타고 신라군을 기습하려다 운 나쁘게도 김무력이 이끌고 온 신라 원군과 마주쳤다고 보기도 한다. 어쨌든 이때의 패배는 엄청난 것으로, 백제 전체가 휘청거렸다. 임진왜란 당시의 칠천량 해전과 비교될 정도.
《일본서기》의 기록은 《삼국사기》와 차이가 있다. 《일본서기》의 긴메이 덴노 15년에 따르면 태자 여창(부여창:후일의 위덕왕)이 신하들이 말리는데도 멋대로 신라로 처들어간다. 여창이 직접 참여한 1차 관산성 전투는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으며, 성왕은 태자의 건강을 염려하여[9] 측근들을 데리고 관산성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사전에 성왕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신라군은 온 나라의 군대를 모아서[10] 성왕 일행을 기습했고, 신라군의 매복에 걸린 성왕은 사로잡혀 고도(苦都)[11]에게 목이 잘린다. 그의 머리는 신라 북청(北廳) 계단 밑에 매장되었고, 몸만 백제로 돌아온다. 이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성왕의 무덤을 밟고 다니라는 신라쪽 의도로 추정된다. 한 나라의 왕인 성왕이, 그것도 3만여명을 거느린 상황에서 고작 50여기로 최전방에서 공격에 나섰다는 기록은 믿기 힘들기에 정황상 《일본서기》의 기록쪽이 더 신빙성이 있으리라 추정된다.[12] 《일본서기》에는 일설로 성왕이 의자에 앉아 자신의 칼을 끌러서 고도에게 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쓰여있다.
얼마 후 고도(苦都)가 명왕(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13][14]【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일본서기》
요약하자면, 《삼국사기》의 기록은 성왕이 관산성 전투를 지휘하다가 신라군을 습격하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일본서기》의 경우에는 관산성 전투는 태자가 이끌었고 성왕은 태자의 승리를 격려하고 전후수습을 하기 위해 소수의 호위병력만을 이끌고 관산성으로 향하다가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서 사로잡힌 것으로 서술하는 차이가 있다. 성왕이 습격하기에는 지나치게 소수의 병력을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서기》의 내용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십(十)을 천(千)의 오기로 보기도 했다.
또한 성왕을 죽인 도도는 《삼국사기》에는 비장이자 고간이라고 나오지만 《일본서기》에는 자신을 천한 종이라고 지칭하며 이름있는 왕을 죽여 이름을 높이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사마노(飼馬奴)고도라고 나오는데, 사마노를 말을 관리하는 노비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마노는 지명이나 성일 가능성이 높아 천민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비천한 종라고 표현한 것은 어디까지나 성왕의 신분과 비교해서 그렇게 언급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는, 비록 상급 지휘관은 아니지만 적어도 장교 계급이라는 것. 그렇게 본다면 《삼국사기》 기록과 동일해진다. 참고[15] 또한 《삼국사기》에 언급된 인물이 사실은 고간(高干)의 지위에 있는 도도(都刀)가 아니라 이름 자체가 고우도도(高于都刀)이며 이는 《일본서기》의 고도와 같은 이름이라고 보기도 한다. 실제 《삼국사기》 판본들을 봐도 간干이 아니라 우于에 가까운 모습이다. 또한 고간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일개 비장을 맡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삼국사기》에 전혀 없는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아들인 여창이 아버지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면서(원로한 신하들이 신라를 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쳐들어갔다가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 본인도 겨우 빠져나왔다.) 왕위계승을 거부하고 승려가 되겠다고 한다. 그러자 신하들이 예전에 나이든 신하들의 말을 들었다면 성왕이 전사하지 않았을 테니 이번에는 제발 신하들의 말을 들으라고 설득을 한다... 뭔가 찡하다. 결국 창은 위덕왕이 되고, 대신 백성 100명을 출가시킨다.
왕이 사망하자 백제는 크게 흔들리고 시작하고, 신라군의 총반격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는 4인의 좌평과 2만 9천 6백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전사(본기)하거나 4인의 장수와 1만명이 전사[16]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다만 큰 패배였던 건 맞지만 백제군 전사자의 숫자가 과장이라는 얘기는 여러 전쟁사 서적에서 지적된다. 위덕왕은 이 패배 이후에도 계속 병력을 동원한다.
4 이후
관산성 전투와 후속 전투를 통해 한반도 중부 지방은 신라가 확고하게 차지했고, 영토와 구심점을 잃어 휘청했던 백제와 고구려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으며[17], 신라는 승기를 잡아 가야까지 모두 합병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 차지한 황해 연안의 항구도시를 통해 백제나 고구려의 방해 없이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게 되어 이후 삼국통일전쟁까지 이런 구도가 이어진다. 어떻게 보면 삼국시대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
5 관산성의 위치
관산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삼성산에 있는 산성을 일반적으로 관산성으로 보고 있으나 근처 삼양리 토성등 일부 성들도 관산성으로 불렀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참고로 삼성산에 있는 산성터에 있는 표지판에는 관산성 터가 아니라 삼성산 성터라고만 적혀있다. 여튼 아직까지 정확하게 어디인지에 대해선 의견들이 나오고 있으니 이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면 추가바람.
6 기록
6.1 삼국사기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32년(서기 554) 가을 7월, 임금이 신라를 습격하고자 몸소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혼전 중에 임금이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성왕 본기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穠與加良 來攻管山城。軍主角干于德伊飡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15년(서기 554) 가을 7월, 명활성(明活城)을 보수하여 쌓았다. 백제 왕 명농(明穠)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에 쳐들어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어우러져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서 크게 이겼다. 좌평(佐平) 네 명과 병사 2만9천6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돌아간 말이 한 마리도 없었다.
《삼국사기》진흥왕 본기
6.2 일본서기
15년[18] 겨울 12월, 백제가 하부(下部)의 간솔 문사간노(杆率 汶斯干奴)를 보내 표를 올려 "백제왕 신(臣), 명(明)[19]과 안라(安羅)에 있는 왜신(倭臣)들, 임나(任那) 여러 나라의 한기(旱岐)[20]들은 아룁니다. 사라(斯羅)[21]가 무도(無道)하여 덴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박(狛)[22]과 마음을 함께 하여 바다 북쪽의 미이거(彌移居)[23]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기를 유지신(有至臣) 등을 보내 우러러 군사를 청해 사라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덴노께서 유지신을 보내시니,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12월 9일에 사라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동쪽의 우두머리인 물부(物部) 막기무련(莫奇武連)을 보내 자기 방(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산성(函山城)[24]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유지신이 데리고 온 백성 죽사(竹斯) 물부 막기왜소기(莫奇委沙奇)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덴노의 위령(威靈)의 도움을 받아 이달 9일 유시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으므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 라고 하였다. 따로 아뢰기를 "만약 신라뿐이라면 유지신이 데리고 온 군사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사라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하였으므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죽사도(竹斯島)[25]에 있는 군사들을 빨리 보내, (그들이) 와서 신의 나라를 돕고 또 임나를 돕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신이 따로 군사 만명을 보내 임나를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번 일이 매우 급하여 한 척의 배를 보내 아뢰며, 단지 좋은 비단 2필, 탑등(毾㲪)[26] 1영, 도끼 300부, 사로잡은 성(城)의 백성 남자 둘과 여자 다섯을 바칩니다. (보낸 물건이) 적어 송구합니다." 라 아뢰었다.여창(餘昌)이 신라를 정벌할 것을 계획하자 늙은 재상[27]이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하였다. 여창이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대국(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낼 것이 있겠소." [28]라 하고,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에 보루를 쌓았다. 그 아버지 명왕(明王)은 여창이 행군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한참동안 잠자고 먹지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신라는 명왕(明王)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때 신라에서 좌지촌(佐知村)[29]의 사마노(飼馬奴) 고도(苦都)【 다른 이름은 곡지(谷智)다】에게 "고도는 천한 노비고 명왕은 뛰어난 군주다. 이제 천한 노비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 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胡床)[30]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고노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 다른 책에는 "신라가 명왕의 두개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백제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의 뼈를 북청(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도당(都堂)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여창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축자국조(筑紫國造)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헤아려 쏘아 떨어트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여창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여창이 축자국조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고 높여 "안교군(鞍橋君)"이라는 이름을 주었다.【안교(鞍橋)는 우리 말로 구라(矩羅)[31]라 한다】. 이때 신라 장수들이 백제가 지쳤음을 모두 알고 모두 멸하려 했으나 (신라의) 한 장수가 "안된다. 일본 덴노가 임라의 일 때문에 여러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백제 관가를 멸망시키기를 꾀한다면 반드시 후환을 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16년(555) 봄 2월. 백제 왕자 여창이 왕자 혜(惠)【왕자 혜(惠)는 위덕왕(威德王)의 아우다】를 보내어 "성명왕이 적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15년에 신라에게 죽음을 당했으므로 지금 그것을 아뢰었다】. 덴노가 듣고서 가엾고 한스럽게 여겼다.
《일본서기》흠명왕 조 554년 기사.
- ↑ 《삼국사기》에는 성왕의 죽음이 554년 7월인데, 《일본서기》에는 554년 12월 9일에 함산성(관산성)에 대한 공격이 진행된 것으로 적혀있다. 날짜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분은 수정 바람.
- ↑ 현재의 충청북도 옥천군
- ↑ 일본 서기에는 고도(苦都)라고 기록되어 있다.
- ↑ 장수 4명과 병력 1만명으로 표기된 기록도 있다.(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 ↑ 이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 ↑ 한강 유역의 군대를 지금의 충청도 지역으로 데리고 내려오면 당연히 고구려가 빈집털이를 할 것이므로 성왕은 이를 간과한 것으로 보이나, 사실 고구려는 당시 나라 사정이 별로 좋지 않았기도 하고 북방 돌궐 전선에 집중하기 위해 신라와 밀약을 맺어둔 상태였으므로 김무력은 대군을 관산성에 투입할 수 있었다.
- ↑ 그러나 백제본기의 '보기 오십'이라는 말로는 그 50명중 몇 명이 기병이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 ↑ 외위(外位)의 제 3관등이다.
- ↑ 아마도 태자 및 군사들을 치하하고 전후 수습을 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 ↑ 《삼국사기》에 언급된, 금관가야 왕족 출신인 김무력이 원군을 이끌고 온 것을 말하는 듯하다.
- ↑ 이름이 비슷하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우도도와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 ↑ 임용한에 따르면 《일본서기》에 실린 성왕의 유언인 "짐은 매양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왔다. 더 구차히 살고 싶지 않다."라는 말도 실제 성왕의 유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 ↑ 주보돈에 따르면 이때 고도가 "맹세한 바를 어기면 왕이라고 해도 종놈한테 죽을 수 있는 것이 우리 신라의 국법" 운운한 부분에서 맹세한 바를 어긴다는 것에 대해, 신라에서는 법흥왕에 의한 율령 도입 이전부터 국가 혹은 개인적 차원에서의 뭔가 중대한 사안(강역 문제라던지)에 대해서 한 번 결정난 결과에 대해 "결정된 바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순순히 따르겠다"고 하늘에 맹세를 시키는 모종의 의식을 치렀는데, 그 근거로 봉평신라비나 냉수리신라비, 남산신성비(새로 쌓은 성이 3년 안에 무너질 시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내용) 임신서기석(3년 안에 유교경전을 통달하겠다는) 등을 근거로 그 '맹세'의 유효기간은 관습적으로 3년으로 통용되었을 거라고 해석했다(3년 안에 맹세를 어기면 죄를 받는다는 것). 관산성 공격 1년 전인 553년에 성왕은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냈는데, 백제야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앞서서 우호를 지속하려는 척 신라를 방심시키려는 책략이었겠지만 신라는 이걸 신라가 백제로부터 거의 빼앗다시피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에 대해 백제에서 더는 따지지 않을 것이고 우호도 지속하겠다는 표면상의 의미 그대로 해석했고, "어느 한 가지 맹세는 맹세한 시점으로부터 3년 동안 유효하다"는 신라의 관습상 성명왕이 계획대로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한 것을 "먼저 맹세한 바를 어긴 것은 너희 백제다!"고 선언하면서 천한 노비인 고도가 한 나라의 군주인 성명왕을 죽이는 합법적인 근거로 제시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렇게 보면 일본서기의 이 기록은 신라측 입장에서 내세운 법적 근거인 셈이다.(출처: 주보돈 《백제 성왕의 죽음과 신라의 '국법'》)
- ↑ 이를 두고 백제의 입장이 반영되지 않은 신라측 일방적인 법적 근거 운운하는 사람이 있는데 당시 별도의 포로 관련 협약을 맺은게 아닌 이상 포로는 당연히 사로잡은 국가의 국법에 의해 다루게 되어 있었다. 포로로 잡힌 성왕의 처우에 대해 백제 입장을 반영할 이유가 하등 존재하질 않는다. 한강 유역 차지에 관해 여러 설이 있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한강유역 차지한거가지고 저 발언을 뻔뻔하다고 평가할 이유역시 전혀 없다. 애초 저 발언 자체도 사형 집행인을 노비로 비하하면서 '왕인 내가 너한텐 죽을 수 없다'라 한것에 대해 '(넌 이미 죽은 목숨이니) 그냥 우리 대로 하는거에 따라라'하는 것에 가깝다.
유독 나무위키나 역덕 중에 신라-통일신라측에 악의적 감정을 지닌 사람이 많은 지 감정적인 서술이 많다 - ↑ 조선 전기에 국왕을 경호하는 부대인 겸사복이라는 부대 이름도 명목상으로는 국왕의 마굿간지기라는 의미였다는 것도 참고할 만 하다.
- ↑ 할아버지인 무력(武力)은 신주도(新州道) 행군총관이었는데, 일찍이 병사를 거느리고 나가 백제왕과 그 장수 4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목을 벤 일이 있었다. -《삼국사기》김유신 열전 권1
- ↑ 551년 이전까지의 경상북도 일대만 지배하던 신라는 백제를 도와 고구려에 대항하거나 하기는 했지만, 한반도 전체의 패권 경쟁은 주로 고구려와 백제의 대결 위주였으며 신라는 앞마당 가야도 다 정리하지 못한 제3세력에 불과했다.
- ↑ 554년
- ↑ 명은 성왕의 이름이다.
- ↑ 가야 소국의 왕을 뜻하는 단어.
- ↑ 경주시의 옛이름이며 신라를 부르는 다른 호칭이다.
- ↑ 고구려를 뜻한다.
- ↑ 관가(官家, 궁궐)를 뜻한다.
- ↑ 관미성의 오기. 일본서기에는 관산성이 함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 ↑ 츠쿠시노시마. 일본 규슈를 뜻한다.
- ↑ 직물의 종류중 하나.
- ↑ 원문에는 "耆老"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60세 이상의 신하를 뜻한다.
- ↑ 일본서기 라는 점을 감안해야한다(...)
- ↑ 현재의 충청남도 보은군
- ↑ 걸상처럼 되어 있는 간단한 접의자.
- ↑ 꾸로지(くろじ, 이득을 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