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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 가운데 안경 쓴 인물이 임신근.
이름 | 임신근(林信根) |
출생 | 1949년 11월 28일 |
사망 | 1991년 9월 17일 |
출신지 | 대구광역시 |
학력 | 경북고등학교 |
포지션 | 투수, 외야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입단 | 1982년 삼성 라이온즈 코치 겸 선수 |
소속팀 | 삼성 라이온즈(1982) |
지도자 경력 | 삼성 라이온즈 투수코치(1982) 해태 타이거즈 투수코치(1985~1987) 태평양 돌핀스 투수코치(1988~1988.4.) 태평양 돌핀스 1군 감독 대행(1988.4.~1988 시즌 종료) 쌍방울 레이더스 1군 수석코치(1990~1991.9.) |
1967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MVP | |||||
이기호 (동산고등학교) | → | 임신근(경북고등학교) | → | 강문길(경북고등학교) |
1 소개
전 야구선수. 실업야구 시절에 활동했으며, 이선희 이전의 대한민국 야구계의 좌완 에이스였다. 또한 투수, 타자 양쪽 모두 뛰어났던 그야말로 야구 천재.
2 선수 생활
서영무 감독과 함께 1970년대 초 경북고등학교 전성시대의 막을 연 선수라 할 수 있으며, 1967년 경북고 2학년 때 1회 대통령배 우승을 이끌었다. 경북고 야구부의 첫 전국대회 우승. 이후로 여러 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임신근이 던지면 이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공이 빠르진 않았지만 제구력과 변화구로서 타자와 상대하는 전형적인 기교파 투수였다.
1969년 실업 팀인 한일은행에 입단, 10승 7패로 그 해 신인상을 수상했고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국가대표팀에 뽑혔다. 1970년에는 승률 1위를 했다. 1971년에 해병대에 입대했고, 1972년에는 다승 1위(18승)와 승률 1위(0.818)를 했다. 특히 이 해에 해병대는 20승을 올렸는데, 이 중 18승을 임신근 혼자 올린 것.
1974년 해병대를 제대하고 한일은행에 복귀했는데, 구위가 떨어지자 1976년에 당시 한일은행의 감독이었던 김응용은 임신근을 타자로 전향시켰다. 성적은 부진했지만 당대 최고의 좌완 투수로 손꼽혔던 임신근은 그에 반대했으나, 결국 김응용에게 굴복해(…) 타자로 전향했다. 하지만 1976년 춘계리그에서 0.512의 타율을, 추계리그에서 0.440의 타율로 그 해 타격 1위를 차지했고 1977년에도 타격 1위를 차지하는 등, 김응용 감독의 전향 선택은 탁월했다. 실업야구 2년 연속 타격왕은 임신근이 유일무이. 당시에 타자로서 뛰어난 성적과 과묵하고 남자다운 카리스마로 인기도 많았다고.
3 은퇴 후
선수 은퇴 후 한일은행에서 코치로 활동하다가 1981년 김응용이 미국 연수를 떠나자 김응용의 후임으로 한일은행 감독을 맡았다. 그러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며 연고팀인 삼성 라이온즈의 창단 코치 겸 선수로 합류했다. 선수로서는 2경기에 대타로 들어서 3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원년에 준우승을 기록한 후 삼성 라이온즈 구단에서 그를 투수코치직에서 해임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사우스조지대에서 코치 연수를 받고 1985년 해태 타이거즈의 투수코치로 부임했다. 1987 시즌 후 해태와 계약이 만료되자 이듬해 태평양 돌핀스의 2군 코치로 부임했다가, 1988년 4월 강태정 감독이 팀의 부진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며 감독 대행이 되었다. 이후 태평양 투수진을 안정시키고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이듬해 태평양이 김성근을 신임 감독으로 영입하며 태평양에서 나왔다. 1990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초대 수석코치로 영입되었다. 그러던 1991년 9월 17일, 전주에서 OB 베어스와의 경기를 앞두고 선수들의 타격훈련을 지도하던 중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향년 42세.
4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
1982 | 삼성 라이온즈 | 2 | 5 | .000 | 0 | 0 | 0 | 0 | 0 | 0 | 0 | |||
통산 | 2 | 5 | .000 | 0 | 0 | 0 | 0 | 0 | 0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