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소리 파견근무 시절.
張基範(1927.5.5~1988.3.18)
1 개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언론인. 호는 인천(仁泉).
1927년 5월 5일 인천 태생.
2 현역 방송인 시절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12월 중앙방송국 아나운서로 방송계에 입문하였다. 그는 신입 아나운서의 몸으로 입사한 지 얼마 안되어 당대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인 "스무고개"의 MC로 발탁되며 일약 스타 아나운서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얼마 안가 6.25 전쟁이 발발하며 방송국은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철수했고 장기범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방송활동을 계속했다.
휴전 후 서울에 환도한 중앙방송국은 전쟁과 민생고에 상처입은 민심을 달래고자 기존에 장기범이 맡고 있던 스무고개 외에 임택근을 MC로 하는 노래자랑을 신설하면서 오락 프로그램을 확대 하였다. 이 두 프로는 단박에 장안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으로 떠올랐고, 정동의 좁은 공개홀이 감당 못하는 수많은 방청객 때문에 나중엔 동화백화점 6층 뮤직홀을 임대하여 공개방송을 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치솟았다. 당연히 MC를 맡고 있던 두 아나운서 또한 최고의 인기를 떠안아야 했는데 수려한 외모를 가진 임택근은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샤프하고 지적인 이미지의 장기범은 중장년층에게 많은 호감을 샀다고 한다. 1957년에는 중앙방송국 아나운서 실장으로 임명되어 아나운서들을 이끌었다.
자유당 정권 말기이던 1959년, 장기범은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 전담 아나운서로 미국으로 약 2년간 파견 근무를 나갔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수립된 민주당 내각제 정부가 박정희의 5.16으로 붕괴되는 과정에서 평소 꼿꼿한 성격의 장기범은 미국에서 이런저런 정보를 들으면서 군인은 국가 방위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지 정치에 발을 들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굳게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의 거사 소식을 들은 장기범은 그날 미국의 소리 뉴스에서 분명히 얘기하기를 "박정희 장군의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어떻게 보면 장기범의 방송 인생에서의 고행길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듯.
1961년 미국의 소리 파견을 마치고 중앙방송국 방송과장 으로 복귀한 장기범은 아나운서 들에게 방송을 배당하는 임무를 맡아 이름값 보다는 실력 위주로 방송을 배당하는 파격을 행사하였다. 예를 들면 신입 아나운서에게 중요한 책무인 정오뉴스를 배당하고 당시 천하를 호령한다던 모 아나운서를 국내에선 들리지도 않는 해외뉴스 담당으로 전출시킨 것이었다. 이에 비위가 상한 그 모 아나운서는 공보처장을 찾아가서는 "장기범 과장은 인사권을 함부로 남용하는 암적인 존재"라고 말도 안되는 모함을 뱉었고 그 말을 백퍼센트 믿은 공보처장은 장기범을 춘천방송국장으로 좌천시켰다. 장기범 방송 인생에서 첫번째 시련이었다.
이후 1960년대 중반 서울로 복귀하여 라디오, TV 제작과장을 거친 장기범은 다른 모종의 건수로 부산방송국장으로 좌천 당했다가 1970년 10월 중앙방송국 보도부장[1]으로 롤백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가 장기범의 깐깐함을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이 생겼는데 그것은 제7대 대통령 선거였다.
1971년 4월, 7대 대선을 앞두고 방송국 윗선에서 여당 후보인 박정희의 유세에 모인 군중수를 상향조정 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그걸 받아들였다면 장기범이 아니었다. 장기범 보도부장은 있는 그대로 사실만을 방송으로 보도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대선이 끝난 후 장기범은 대구방송국장으로의 영전(?)을 선물로 받아야 했다(...) 자신을 정말 아끼고 따르는 후배들의 눈물 가득한 전송을 받으며 장기범은 웃으면서 대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대구방송국장 시절, 장기범은 방송국 입구에서 라이터를 팔던 잡상인과 술친구가 되었는데, 처음에 그 라이터 장수는 장기범을 경계하였지만 술자리가 거듭되면서 라이터 장수는 장기범이 자신을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마음을 열고 몇년간 우정을 나눌 수 있었다고.
그 후 1973년 한국방송공사가 출범하면서 장기범은 라디오국장으로 복귀하여 방송연수원장, 방송위원, 심의위원을 거쳤지만 대부분 한직에 불과했다. 그리고 1982년 부산방송국장을 끝으로 34년간의 정든 방송인생을 마감하고 정년퇴임 하였다.
3 은퇴 이후
방송계를 떠난 장기범은 조용히 여생을 보내던 중, 1988년 3월 18일 아들의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을 보고 귀가하여 동네 슈퍼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던 중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61세를 일기로 급서하였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애석해 하던 후배들은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에 묻힌 그의 묘지 앞에 모두의 마음을 담은 묘비를 세웠다.
묘비에 적힌 그의 추모문은 아래와 같다.
시대의 아픔을 가슴으로 삭이신 은둔의 지사 난세를 학처럼 사신 위대한 상식인 방송의 한 시대를 풍미하시며 모든 방송인의 사표가 되신 준엄한 선비 ...그러나 달과 술을 사랑하셨던 낭만인 당신은 한국의 영원한 아나운서! |
장기범을 존경하던 방송계의 후배들은 1989년 이후 장기범의 생일인 매년 5월 5일 그의 묘지에서 추모 행사를 개최해 왔으나, 이제 후배들 대부분이 70을 넘겨 거동이 불편한 고령인 관계로 2013년 행사를 끝으로 공식적인 추모식은 종료하고 앞으로는 사전 공지 없이 원하는 이들만 조촐하게 모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4 에피소드
- 1950년 6.25 전쟁이 터질 당시 스물 세살의 패기 넘치던 청년 장기범은 6월 28일 새벽 방송국이 대전으로 철수하면서 정동 방송국을 빠져나오기 직전 방송실에 행진곡 레코드 판을 걸어놓고 맨 마지막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국군 전사들을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임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이는 후일 장기범이 술자리에서 몇번 털어놓은 것이 후배 아나운서들의 입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 1959년 미국의 소리 파견 근무를 나가게 된 장기범은 당시 사무관 직책으로 평 아나운서 보다는 조금 높은 봉급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자신의 사무관 월급을 어렵게 지내던 두 후배 아나운서 들이 나누어 받도록 몰래 조치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자신은 미국의 소리에서 근무하며 미국 국무성의 월급을 받게 되니, 월급을 이중으로 받을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 이 해묵은 뒷이야기도 당시 장기범의 은혜를 입은 모 후배 아나운서의 취중진담으로 세상빛을 볼 수 있었다.
- 장기범은 고려대학교 선배이자 위대한 시인이며 사상가인 조지훈 선생을 존경하여, 그의 저서인 "지조론"을 항상 끼고 살았고 평소 말버릇처럼 "한 말씀도 안하셔도 좋으니 그냥 약주라도 한잔 대접하며 뵙기만 했으면 좋겠다" 라고 되뇌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지훈 선생도 장기범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으니, 한번은 장기범의 후배 아나운서인 이규항이 스승인 조지훈 선생을 찾아 뵈었는데 조선생이 이규항에게 "공보부에서 인물 하나 꼽으라면 장기범 아나운서 하나!" 라고 털어놓았다 한다. 이 둘은 6.25 전쟁 때 피난지인 부산에서 두어 번 정도 스쳐간 사이라고 하는데, 역시 선비는 선비끼리 통하는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 장기범은 유도 초단에 수준급의 수영과 스케이트 실력을 자랑하는 스포츠맨 이었지만 한번도 남에게 완력을 자랑한 적이 없었고 미국의 소리 파견시절 영어로 된 뉴스원고를 스스로 번역하여 방송하고 타임 지에서 공모한 새로운 영어단어 모집에 "노케이(오케이의 반대)"라는 단어로 당선될 정도로 수준급의 영어 실력을 자랑했지만 그는 술에 떡이 되어서도 한번도 영어를 입밖에 낸 적이 없었다.
- 어느 해 아나운서 동료들과 연안부두로 바람을 쐬러 갔는데 횟집의 야외 탁자에 앉다가 의자가 부서지며 그 자리에 나동그라지자 옆에 있던 한 신혼부부인 듯한 청년이 장기범을 부축하며 "괜찮으십니까?"를 연발하자 장기범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이런 젊은이만 있으면 된다" 며 환하게 웃었고 그날 장기범은 그 신혼부부의 술값까지 내주었다고.
- 그리고 어느 날에는 Y대학교 앞의 술집에서 한잔 하고 있었는데, 옆 자리의 대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것에 귀를 기울여 보니 허튼 소리가 하나도 없자 장기범은 미소를 지으며 "저런 젊은이들만 있으면 나라의 미래 걱정은 없다" 면서 나중에 그 젊은이들 술값까지 대불했다는 얘기도 있다.
- 한편으로 장기범은 평소 하급자에게도 경어를 쓸 정도로 인자한 성격이었지만, 방송은 항상 정확한 사실만을 전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던 그인지라 후배들의 방송중 실수엔 깐깐하고 매서운 호랑이 선배이기도 했다.
- 어느 날 방송국에서 라디오 뉴스를 듣고 있는데 앵커를 맡은 A모 후배 아나운서가 전라북도 옥구군[2](沃溝郡)을 옥강군이라고 읽는 것이었다. 당시의 뉴스 원고는 한자어 투성이였고, A아나운서는 도랑 溝(구) 자를 익힐 講(강)으로 잘못 읽어버린 것이었다. 뉴스가 끝나자 마자 장기범은 A아나운서는 물론 그 동기들까지 전부 아나운서실로 호출했고 종이에 전라북도 옥구군을 한자로 써서 A에게 읽어 보라고 하자 그는 또다시 전라북도 옥강군 이라고 당당하게도 읽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장기범이 벽에 걸린 세계지도를 가리키며 "이 사람들 안되겠구만, 저기 지도에서 뉴질랜드를 찾아봐요!" 라고 버럭 호통을 쳤고, A를 비롯한 아나운서들은 퍼렇게 질려서 아프리카 부근을 더듬거리고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 1970년 5월 사망한 영친왕의 인산(因山, 왕의 장례)에 모든 방송국이 출동하여 그 실황을 중계했고, 물론 KBS도 예외는 없었다. 그런데 영친왕 인산 중계를 맡은 B모 아나운서가 영친왕의 운구를 뒤따르는 조문객들이 든 만장(挽章)[3]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지금 수많은 조문객들이 족자를 들고 운구를 뒤따르고 있습니다" 라고 멘트를 쳐버렸다.
- 이 방송을 본 장기범이 이를 가만히 둘 리가 없었고, B아나운서를 불러서 "중계 수고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아 족자가 뭐야? 만장이지 만장!" 이라고 한바탕 꾸지람을 늘어놓았다.
- 된통 혼쭐이 난 B는 뒤돌아서서 홧김에 걸직하게 내뱉기를, "아놔 X팔, 족잔지 만장인지 누가 알았어야 말이지!!!"
- 평소 말술을 자랑하던 장기범이었지만 1948년 입사 후 1982년 정년퇴임 때 까지 무결근 무지각이란 기록을 세운 바 있다.
- 춘천방송국장으로 좌천 되었을 때 그가 술만 마시고 산다는 험담이 서울에 퍼졌다고 부하직원이 보고하자 장기범은 담담하게 말했다고 한다.
- "서울에 이렇게 보고하시오. 장기범은 술만 마시는게 아니라 술도 마시고 낚시도 하고 방송도 한다고 말이오"
- 그는 더 이상의 성냄도, 원한도 없는 접시에 담긴 잔잔한 물같은 성품의 소유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