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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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1967년 5월 3일1971년 4월 27일1972년 12월 23일
제6대 대통령 선거제7대 대통령 선거제8대 대통령 선거

1 개요

파일:7대대선.jpg

1971년 4월 27일에 있었던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로, 이 선거에서 승리한 박정희대통령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한다. 대한민국 정치 사상 최고의 레전드 이 맞붙은 처음이자 마지막 선거. 그리고 1년 뒤(...)2년 뒤(...).

대한민국의 영호남갈등의 시초

2 배경

2.1 민주공화당, 3선 개헌

5.16 군사정변 이후에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대통령의 중임을 1차에 한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는 이미 연임중이던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필 이 때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국회 내 의석 수가 전체의 2/3을 훌쩍 넘는 바람에(...)[1] 여당이 마음만 먹으면 헌법 개정을 통한 재출마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민주공화당 안에서도 엄청난 진통이 있었다. 다름아닌 민주공화당의 2인자였던 김종필의 반발이었다. 5.16 군사정변의 브레인이자, 초대 중앙정보부 부장, 한일기본조약 협상을 주도했던 그는 당연히 박정희가 출마할 수 없던 민주공화당의 차기 대선주자로 떠올랐고, 박정희의 3선을 반대하였다. 마침 비슷한 시기 신민당에서 제출한 권오병 문교부장관 해임권고 결의안이 상정되었는데, 예춘호 등 김종필계 민주공화당 의원들이 세력과시를 위해 찬성표를 던지면서 결의안이 가결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렇게 되자 분노한 박정희와 공화당 내 개헌파 의원들이 김종필계 의원들을 공화당에서 제명처분시켰다. 김종필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부산에 내려갔다가, 박정희의 부름을 받고 올라가 무력하게 3선개헌 작업에 앞장선다. 이렇게 추진된 3선 개헌(6차 개헌)은 신민당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본회의 상정이 되지 않다가, 새벽 2시 반에 공화당 의원들끼리 국회 별관에 모여서 날치기 통과시키며 국회를 통과했고, 이후 국민투표를 거쳐 개정이 확정된다.

2.2 신민당의 40대 기수론

한편 이전까지 무력한 야당에 불과했던 신민당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1969년 11월, 당시 42세[2][3] 김영삼 의원이 남산 외교구락부 건물[4]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뒤이어 1970년 1월 45세3선의원 김대중 의원이, 2월에 48세3선의원인 이철승 전 의원이 각각 출마를 선언했다.나이순서를 보니 어째 "나보다 어린 놈이 40대라고 나오다니 나도 40대임 뿌잉뿌잉" 하면서 나온거 같기도 신민당 지도부에서는 "젖비린내 나는 정치 소년들이 나온다"며 반감을 표했지만 오히려 당내의 반응은 이들 40대 기수들에게 환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1970년 9월,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 선거에서 이철승이 김대중을 지지하면서 김대중 458 : 김영삼 410으로 김대중이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공식 지명된다. 그리고 김영삼은 결과에 승복하고 대선 동안 김대중의 선거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밤에는 분해서 울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양김의 애증관계는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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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에게 경선 패배를 인정하며 지원을 약속하는 김영삼. 16년 뒤에도 이랬으면

이 세 명의 40대 기수들은 이후 제4공화국, 제5공화국을 거쳐 야당과 민주화 운동의 중심인물로 성장하였으며, 특히 김영삼, 김대중의 양김은 끝내 대통령에 오르기도 한다.

3 과정

파일:Attachment/7th election.jpg

3.1 정책공약

1971년 5월에 선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후보는 1970년 10월부터 지방유세를 돌기 시작하는 등 일찍부터 대선 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노력한다. 특히 김대중 후보가 제시한 공약 중에는 당시로서는 정말 파격이라고 할 수 있는 얘기들이 많았는데, 예를 들면

  • 향토예비군 폐지 - 현재와는 달리 창설당시 향토예비군은 독재정권하 관제사업에 강제노역을 동원하기 위한 임의소집으로 물의를 많이 빚어서 향토예비군제도에 대한 반감이 굉장히 컸었다. 민주화 이후 독재정권의 군대가 아닌 국민의 민주군대가 된 이후로 이러한 측면이 많이 사라졌기에 존속의 명분이 회복된 측면이 있다.1997년엔 이게 사라졌나요[5]
  • 미/일/중/소 4개국에 의한 전쟁억제 보장 요구[6]
  • 노사공동위원회 설치[7]
  • 남북한 사이의 단계적 비정치적 접촉 시도

...등이 있었다.

반면 민주공화당은 대통령후보 지명을 1971년 3월에 하는 등 선거 열기가 처음부터 뜨거워지는 것을 가급적 막으려고 노력했다. 특히 박정희 후보는 안보 문제와 예비군 폐지 문제, 경제정책 문제 등으로 김대중 후보와 열띤 공방을 벌였다.

3.2 부정선거 문제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표 확보를 위해 정부가 뿌린 돈이 당시 국가예산의 1/7인 700억원 남짓이었다.[8] 지금도 큰 돈이지만 당시 서울의 아파트 30평 아파트 한 채가 4백만 원 가량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다. 더욱이 부재자투표의 표가 박정희 몰표로 나와 논란이 일기도 했다.[9] 더불어 김대중 자서전에서는 유리한 지역의 표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전부 무효표 처리된 사례를 언급하고 있다. 결국 3.15 부정선거만큼은 아니라도 매우 불공정한 부정선거였다는 것은 확실했고 이 때문에 대학생 데모 등 반대집회가 열리기도 했으나 위수령이 남발되면서 모두 진압되었다.

이후 김종필은 미국의회에서 부정선거가 아니었다면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을 것이며 그 엄청난 부정선거 공작에도 큰 표차가 없는 결과를 낸 김대중 후보를 상당히 두려워했다는 증언을 했다.

4 결과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기호[10]후보명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선유무
1박정희민주공화당6,342,82853.2%1당선
2김대중신민당5,395,90045.2%2낙선
3박기출국민당43,7530.4%4낙선
4성보경민중당---유세기간 중 자격 반납
5이종윤자민당17,8230.1%5낙선
6진복기정의당122,9141.0%3낙선
7김철통일사회당---유세기간 중 자격 반납

결국 투표결과 95만 표 차이로 박정희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다. 비록 표 차이 자체는 생각보다 작지 않았지만, 문제는 이것이 있는대로 지역감정을 자극하면서 부정선거까지 펼친 상황에서 나온 결과였다는 점이다. 이렇듯 신선한 정책을 통해 유권자들에게 가슴깊이 박혀진 김대중 후보는 이후 야권 거물정치인으로 발돋움하며 박정희의 강력한 정적이 된다. 그리고 이 선거에서는 이전에 비해 유달리 군소후보들의 득표율 총 합이 1/2 정도로 매우 낮다. 그만큼 박정희/김대중 양대 후보가 주목을 받았다는 뜻.

5 여담

5.1 지역감정 문제 대두

  • 이번 선거에서 김대중은 처음으로 소위 "호남 소외론"을 내세워 당시 상황적으로 발전이 더디던 호남 지역의 지역감정적 호응을 이끌어 내었다.
  • 하지만 김대중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박정희 측에서는 "신라 대통령론"과 선거 3일전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품을 불매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허위전단을 뿌려 영남(특히 농촌지역)의 강한 지지를 이끌어 내었고, 이는 호남의 김대중 지지율에 비해 영남의 박정희 지지율이 더 압도적으로 높은 선거결과로도 나타났다. 따라서 지역감정의 형성은 어느 한 쪽만의 책임이라 할 수 없다.
  • 하지만, 지역 감정이 심했던 이 선거에서도 김대중은 부산광역시에서 40% 후반으로 선전했고, 경남에서도 충무시,창원시,마산시 등 당시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지역에서 30%후반을 득표하는 등 선전했다. 또한 경상북도에서도 당시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대구시에서 30%초반 정도 득표했다.(예외는 안동시, 거창군인데 여기서도 30% 정도 득표했다.) 즉 지역감정도 농촌에서만 먹힌 셈.
  • 그래서 지역감정의 서막은 13대 대선때 본격적으로 열렸다는 주장이 많다. 물론 단일화만 했었다면 지역감정이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였겠지만.[11]

5.2 유신의 원인이 되다

  1. 하필이라기 보다는 박정희와 중앙정보부(김형욱)의 공작에 의한 결과라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국회의원 선거는 부정선거로 악명이 높았다.
  2. 하지만 이미 4선 의원에 원내총무까지 맡고 있었다!
  3. 1954년, 26세에 거제군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현재까지도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 기록으로, 이 와중에 1번 낙선한 경험까지 있었다!
  4. 2008년 철거되었다.
  5. 이후로 빨갱이라고 네거티브 당하며 레드 컴플렉스로 지지기반 확장성에 한계를 보였던 김대중으로선 1997년 대선에선 이런 공약을 내세울수는 없었을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3당 합당으로 영남지역이 신한국당 표밭으로 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당시 이회창이 대세로 큰 인기를 얻고 있었고, 당시 이인제가 박정희 닮은 외모로 박정희 신드롬을 일으켜서 보수층으로 여론이 심히 기울어져 있었다. 반면에 김대중은 정계은퇴 번복으로 인해 여론상으로 심히 까이고 있었다.
  6. 4대국 안전 보장론으로 김대중 후보에 의해 최초로 제시된 개념으로서 이후 줄곧 한국외교 포지션의 중심이 된 안이다, 현재의 새누리당도 이 기조을 유지하는데 이게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창안된 개념이라는 걸 모르는 경우가 많다.
  7. 이는 1998년 김대중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1998년 IMF 당시 잦았던 노사분규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한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실현된다.
  8. 김종필은 600억을, 71년 당시 중앙정보부 보안차장보 강창성씨는 700억을 증언했다. 또한 미 하원 소위 보고서는 미국계 정유사들(걸프, 칼텍스, 유니언 오일)이 제공한 돈이 정치 자금으로 쓰인 경황을 보고했다.
  9. 다만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줄 만큼 부재자가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곧 묻혀버렸다.
  10. 이전 선거와 달리, 이 때부터는 기호가 국회 의석 보유수 순서대로 부여되기 시작한다.
  11. 이는 총선에서 지역감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 뒷받침된다. 7대 대선 직후에 치러진 8대 총선의 경우 호남(여 21 : 야 13)이 오히려 영남(여 26 : 야 24)보다 여당세가 강하게 나타났다. 지금처럼 지역감정이 총선에까지 두드러진 것은 13대 총선부터이다.
  12. 물론 겉으로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