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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0년대를 풍미했던 대한민국의 전설적인 배구 선수이자 대한민국 배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
2 약력
1960년 9월 10일 충청남도 논산 출생. 전 고려증권 소속. 신장 195cm.
현재 경기대학교 체육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한민국 배구에서 최초로 스파이크 서브를 시도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그가 작두를 타는 시즌에는 100% 고려증권의 우승이라 할 만큼 고려증권의 핵심 멤버였다. 세계 최초의 스파이크 서브 시도라고 잘못 아는 분들이 있는데 세계 최초의 스파이크 서브는 1978년경 한 중국의 선수가 시도한 것이고 장윤창은 이보다 3-4년 이상 뒤에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장윤창은 세계 최초로 스파이크 서브를 전략적으로 활용한 선수라고 보는게 옳다.
지금은 스파이크 서브를 넣지 못하면 상대에게 위압감을 못주는 만만한 선수로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스파이크 서브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서브의 제한 규정도 지금보다 훨씬 빡셌다.[1] 그런 상황에서 장윤창의 스파이크 서브는 매우 빠른 속력으로 상대 코트로 날아가 작렬하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공격과 다름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요즘 제법 한다 하는 선수들의 총알 서브에는 못 미치지만(...)
배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세터였으나, 공격수로 전향한 뒤 왼손잡이(사실은 양손잡이에 가까울 만큼 오른손도 잘 썼다)라는 특성 때문에 라이트 포지션에서 뛰었다. 그가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뽑힌 게 인창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고 하니, 그의 천부적인 재질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제1회 대통령배 배구대회(1984년)에서 인기선수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대회가 거듭될수록 MVP와 베스트 6에 뽑히는 찬란한 기록을 세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배구 하면 장윤창, 장윤창 하면 배구를 떠올릴 만큼 장윤창은 배구의 대명사였을 정도라 한다. 이는, 대한민국 최고 선수였던 김호철은 유럽에 진출했고(세터라서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아시아의 거포 강만수는 장윤창보다 시대가 조금 앞서서 백구의 대제전 때까지 활약한 장윤창보다 현재 팬들에게 인지도가 낮기 때문이다.
지금의 현대자동차서비스 배구단(이하 현대)이 창단되게 만든 것 또한 장윤창의 간접적인 기여가 한몫했다.
일설에 의하면 고려증권이 창단된 게 1983년 3월이었고 당시 고려증권이 대학 졸업 선수들을 픽업하는 방식으로 장윤창, 정의탁, 류중탁 등을 픽업했다. 그렇게 고려증권 배구단이 생겨났는데, 다섯 달 늦게 현대가 창단될 때 장윤창을 픽하는 조건으로 창단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현대는 고려증권 단장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을 섭외하면서 자기 팀 단장으로 불러 들이고 이 과정에서 장윤창을 데려가려 했으나 장윤창은 이 때 이런 말을 남긴다. "남자는 의리를 지켜야 하는 법" 그리고 고려증권에서 나오지 않는다. 졸지에 선수 확보에 비상이 걸린 현대는 외국 무대에서 활약하던 이인, 강만수를 데려오는 정도로 체면치레를 했다.
이런 정도로 그의 재능은 어느 팀이라도 탐낼 만했고 사실 그가 고려증권에 가기 전에 중동에서 오퍼가 들어올 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었으나 정작 배구협회인지 뭔지는 본인에게는 알려주지 않은 채 병역 의무라는 것을 앞세워 일방적으로 막아 버렸다. 왜냐하면 그 당시 한국 배구가 1978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4위[2]를 했는데 당시 주축 멤버들이 줄줄이 해외에 진출하게 되자 위기 의식을 느낀 양반들이 막았을지 모를 일이다.
당시 같은 팀의 세터였고, 前 경기대 배구부 감독인 이경석이 1년 후배이기는 하나 사실은 동갑이고, 이경석이 고등학교에서 유급하는 바람에 1년 늦게 들어가면서 후배가 된 것일 뿐이라 이미 10여 년 전부터 서로 말 놓고 지냈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의 놀라운 체공력으로 어택 라인 밖에서 점프하며 몸을 뒤로 젖히고 나오는 백어택은 보는 사람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이는 그가 '돌고래'라는 애칭을 얻으며 후세에 회자되고 있다. 그의 뒤를 잇는 선수로 김세진과 박철우가 있지만 그의 커리어에는 못 미친다. 물론 김세진이 국내대회에서 MVP를 많이 받기야 했지만 그건 소속팀의 무지막지한 독주 때문에 인정하기 힘들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장윤창의 경우는 소속 팀인 고려증권의 안습한 선수층과 신인 선수 수급이라는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끈끈한 노력으로 팀웍을 이루며 지겨울 정도로 독주를 벌이지 않았기에 인정받는 것이다.
1994년에 은퇴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귀국했다. 한때 친정 팀인 고려증권의 코치로도 재직했고, 이후 논산에서 볼링장을 운영하기도 하는 등 개인 사업을 했지만 과감히 접은 후 모교인 경기대학교로 왔다. 그리고 유명 스포츠스타 답게 다른 종목의 은퇴선수들과 함께 봉사활동 단체를 조직해 활발한 활동을 하기도 했다. 현재는 대한민국 스포츠 국가대표 선수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리고 프로 배구 경기감독관으로도 일하고 있었으나, 2010년 현대캐피탈과 우리캐피탈과의 경기 도중 비디오 판독 오심으로 사퇴하였다. 말그대로 흑역사.
장윤창의 차남인 장민국은 농구선수이다. 아버지보다 2cm 큰 197cm의 포워드로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2012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전체 10순위)로 전주 KCC에 지명받았다.
장민국보다 3년 위인 맏아들 장대한 역시 농구를 했으나 성균관대학교 재학 중 군에 입대하면서 선수 생활을 접었다. 전역 후 프로골퍼를 지향하며 골프장에서 일과 골프연습을 병행하던 중 2013년 9월 3일 한밤중에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위에서 보면서 알 수 있듯이, 아들들의 이름이 비범하다. 그래서 장윤창의 아내는 레알 민국엄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사랑이 과한 건지, 2015년 들어서 뜬금없이 이런 기사가 떴다. 왕년의 배구 스타 장윤창, 아들 소속 구단 기물 파손 입건. 2014년부터 장민국의 출전 시간이 줄어들자, 소속 팀인 안양 KGC인삼공사에 찾아가서 트레이드를 요구했고, 이 와중에 실랑이를 벌이다가 화분을 집어던지는 등의 과격한 행동을 했다고.
하지만, 22일날 장윤창씨의 입장을 담은 기사가 나왔다. 장윤창 "인삼공사가 트레이드 말 바꾼 것에 격분". 요약하자면 KGC에서 장민국을 A 구단의 모 선수와 트레이드 카드로 사용할 의향이 있으니 A 구단의 감독과 친분이 있는 장윤창씨가 얘기를 맞춰 주셨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했고, 장윤창씨는 아들의 상무 입대를 위해서는 출전 경기시간이 필요하다는 절박함에 자신이 직접 A구단의 합의까지 이끌어 냈으나, 그 상황에서 KGC가 돌연 트레이드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기존의 빗나간 부정에 대한 비난에서 KGC의 주먹구구식 행정처리에 대한 비난으로 여론이 돌아서고 있다. 물론 장윤창이 잘한 행동은 아니다. 재물손괴를 저질러 입건됐으므로, 분명한 범죄 행위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KGC가 병크를 저질렀던 것이다. 어째 인삼은 농구도 그렇고 배구도 그렇고 하나같이 운영들이 개판들이냐...
- ↑ 지금은 서브를 넣을때 타격지점이 인코트 둘레 안이면 인코트 밖에서 서브를 올려도 상관없지만, 당시는 서브를 넣을 수 있는 위치는 인코트 오른쪽 구석의 3m 공간에 불과했으며, 서브가 백테에 맞으면 그냥 아웃이었다. 이 때문에 서브는 배구에서 굉장히 발전이 늦은 분야였고 장윤창 이후 스파이크 서브가 전략화 되면서 배구의 양상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이 스파이크 서브는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랠리포인트 제도, 배구공의 공기압 변화, 리베로 도입 등과 맞물려서 2000년대 이후 스피드 배구가 출현하게 된 주요인이다.
- ↑ 대한민국 남자배구 역사상 국제대회 최고 성적. 당시 주전은 세터 김호철, 레프트 강만수, 故 강두태, 라이트 정강섭, 센터 이인, 장윤창이었다. 원포지션인 라이트가 아닌 센터긴 했지만 18세에 세계 4강팀 주전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