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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중기의 문신
조선의 역대 영의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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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관은 전주 이씨, 자는 상보, 호는 백헌, 시호는 문충이다
정종의 후예이며 서인의 거두 김장생에게 배웠다. 1613년(광해군 5) 진사시, 1617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북인이 주도하는 인목대비 폐비론에 반대하다 취소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에 들어갔다.
예문관 검열·봉교 등으로 진출하여 핵심 관직을 두루 거쳤고, 1632년 가선대부에 올라 재신에 들었다. 병자호란 끝에 인조가 척화신들을 배격하는 상황에서 도승지를 맡았는데 이때 예문관제학을 겸하여 아무도 맡지 않으려는 자리였던 청나라의 승전을 기념하는 삼전도비문을 쓰게 된다. 이 때 이경석 외에 이경전, 장유, 조희일에게도 비문을 쓸 것을 명했는데, 이경전은 병 때문에 빠지고 조희일은 채택되지 않으려고 일부러 거칠게 지었다. 결국 장유와 이경석의 글만 남았는데 청측에서는 이경석의 글을 약간 수정하는 것을 전제로 채택했다. 이렇게 되자 인조는 이런 말로 이경석에게 간청했다고 한다.
"청이 이 글로 우리의 향배를 시험하고자 하니, 이는 국가 존망과 관계가 있다.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회계산에서 항복해 신하가 되었다가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킨 공적을 이뤘으니 뒷날 힘을 기르는 것이 오직 과인의 할 일이다. 오늘의 꾀는 오직 이 글에 달렸으니 그의 마음에 맞도록 해서 사기가 약화되지 않게 해 달라."
이경석 역시 할 수 없이 비문을 고쳐 쓰게 되었다. 하지만 이경석 역시 엄청난 심적 고통을 겪었는지 형 이경직에게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입니다"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고 "차라리 어계강에 몸을 던져 죽고만 싶다"는 시를 지어 한탄하기도 했다. 물론 저 말대로 인조가 구천처럼 치욕을 잊지 않고 정말 힘을 길렀는지에 대해서는 넘어가자.
1637년 예문관과 홍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 이조판서를 거쳐 1641년 이사가 되어 청나라로 가서 소현세자를 보필하였다. 이때 평안도에 명나라의 배가 왕래한 전말을 사실대로 밝히라는 청제의 명령을 어겼다 하여 청나라에 의해 등용이 금지되었다.
이후 1644년(인조 22)에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1650년(효종 1) 효종 재위후 권력을 잃은 김자점이 청나라에 조선의 반청정책을 꼰질러 청나라에서 파견된 조사관이 국왕과 백관을 협박하는 상황에서 영의정으로서 목숨을 걸고 책임을 전담하여 위기를 넘겼다. 국왕의 간청으로 처형은 면했으나 의주 백마산성에 감금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1653년 이후 중추부영사에 올랐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국왕의 특별한 존경과 신임의 표시인 궤장을 하사받았다.
2 평가
청나라의 침략으로 인한 위기에서 국가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송시열 등 명분론자들에 의해 삼전도 비문 작성과 같은 현실적인 자세가 비판받기도 했다. 이념과 정책은 숙종대의 소론으로 연결된다.
거기에 그는 관직생활에서 당색을 배제한 정책들을 펴고 당에 상관없는 공정한 인사관리로 많은 인재들을 발탁했는데 그가 발탁한 인재 가운데 10명의 정승과 4명의 대제학이 배출되었기도 했고 앞에서 설명했듯이 보통 나라에 공이 많은 원로대신들에게 수여하는 궤장을 현종에게 받기도 했다. 또 청의 간섭을 최대한 막아내려 했던 명신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었다. 이경석의 시호인 문충(文忠)부터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시호가 아니다. 文이 들어가는 시호는 선비들에게 매우 큰 영광이었는데, 개중에서도 문충은 최고로 높이 기리는 시호였다.
3 수이강 사건
대표적인 사건으로 "수이강壽而康" 사건이 있다. 이경석은 본래 송시열과 잘 지냈었고, 애시당초 송시열을 조정에 추천한 게 이경석이었다.
그런데 송시열은 삼전도비문을 적은 일을 고깝게 생각하여 이경석이 궤장을 받을 때 글을 구하니 "오래 살고 건강했다(壽而康)"라고 써주었다. 처음엔 그냥 좋은 표현인 줄 알았지만, 현종이 온천여행갈 때 조정 중신 중에서 아무도 환송을 안가자 낙향해 있던 이경석이 이들을 까는 상소를 올렸고. 송시열이 반박상소를 올리면서 '수이강'의 정체가 드러난다.[1]
사실 수이강은 송나라 때 금나라에 끌려가서 아첨한 후에 살아남은 손적이란 자의 고사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당시 손적은 금나라 황제에게 항복문을 지어바치면서 온갖 미사여구로 금을 찬양하고 송을 깎아 내렸는데 이를 들은 주위 사람들이 "너는 그렇게 아첨을 하니 참 오래살고 건강하겠구나" 라고 비아냥 거린 것이다.
즉 이와 같은 유사한 사례를 끌어들여, "(오랑캐에게 아첨해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자기 몸 혼자 편하게) 오래 살고 건강했다"라는 엄청난 인격 비난을 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송시열과 박세당 등의 대립을 불렀고, 훗날 사문난적 논란 등으로 노론과 소론간의 분열양상으로 흐르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사실 조정은 비문에 새겨넣을 글을 청으로부터 받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당신들이 쓰라"는 청의 요구 때문에 이경석 등 3명이 선택되었을뿐. 이경석 등은 마지못해 비문을 썼다. 이경석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었을 것이다. 친일파와는 다르다! 친일파와는!
이런 조롱을 받으면서도 이경석은 별다른 반응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2] 어쩌면 그 자신도 별로 떳떳한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이경석의 대처가 송시열을 비판하던 이들이 이경석을 동정하는 여론에 더욱 불을 지피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한국외대 교수 이은순은 "현실론으로 나라를 구한 이경석이나, 주자학적인 숭명의리론으로 국가를 재건하고 민생을 회복하자는 송시열이나 모두 평가돼야 한다"고 논문에서 주장하였다. 즉 이 싸움은 양란 이후 새로운 질서수립을 위한 이념투쟁이자 시국인식 차이에 따른 정론대립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대체 이 사건의 어디에 '논쟁'이나 '노선 차이'가 있다고 봐야 할까? 일단 송시열이 무슨 근거를 대며 논리적으로 비판한 것이 아니다. '수이강'이라는 말을 쓴 것은 단지 인격모독에 불과하다. 그 방법도 공식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치졸한 뒷담화에 가깝다. 이것을 과연 시국인식 차이로 보아야 할 문제인지는 의문. 정 이념이 맞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공식석상에서 비판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대표 척화파들인 김상헌, 조온이나, 삼학사등은 최명길 등을 뒤에서 까지 않고 조정에서 직접 탄핵하고 비판했다.
당시 상황에서 당장 이경석이 청의 비위에 맞는 글을 바치지 않았다면 제2의 병자호란을 맞게 되었을 것이다.[3] 게다가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자신이 죽을 각오를 하고 모든 책임을 떠맡아서 국왕과 조정중신을 보호한 적도 있다. 이런 이를 폄하하는 글을 썼으니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송시열도 명신이라고 하지만 국난과 많은 위기를 겪으면서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 진력한 이경석을 뒷담화로 깔 수 있을 정도의 업적은 없고,[4] 오히려 사람들이 송시열의 인격마저 의심하게 만든 사건이다. 참고기사
당시 실록의 기록을 보면 식자들 역시 그르다고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해당 기사 사관의 평은 '정승으로서 딱히 한 것도 없는 경석을 그르다고 여길 수는 있는데, 그럴 거면 궤장에 글을 써 달라는 요청 자체를 거절하는 게 맞지 돌려까기를 한 건 옳지 못하다'라는 요지로 되어 있다. 실록
4 미디어
드라마 추노의 악역인 이경식의 이름은 이 사람에게서 따온 듯하다(마침 또 좌의정으로 재직하던 시기도 같고 이름도 획수 하나만 다르다). 물론 야심에 가득찬 권신인 이경식과 시대의 흐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폄하된 명신인 이경석은 그 성격이 확실히 다르므로 주의할 것.
오히려 이경석의 경우에는 현실주의적 성격이 강했던 정치가로서 소현세자를 보필하며 청에 다녀올 정도였고 원손이었던 소현세자의 큰아들 석철을 가르치고 인조가 원손을 폐하려할 때도 반대하였으며 민회빈 강씨를 사사할 때도 최명길 등과 함께 최대한 시간을 끌기도 했고, 또 상소를 올려 강씨의 일가 친척을 보호하려 하였다.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김자점이 이경식의 모티브일까 생각이 들 정도로 김자점의 행위와 이경식의 행위는 비슷하다. 다만 무능하기 짝이 없고 병자년에 나라 말아먹는데 일조했던 김자점과는 달리 이경식은 국왕에 대한 충심도 있고 개인의 능력은 뛰어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