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견

동오의 추존 황제
효의왕 손종시조 무열황제 손견장사환왕 손책소헌문황제 손화
300px
묘호시조(始祖)
시호무열황제(武烈皇帝)
손(孫)
견(堅)
문대(文臺)
생몰기간155년? ~ 191년?
修陵懷舊蹟(수릉회구적) : 수릉에서 옛 자취 회고해보니,

匿璽啓雄心(닉새계웅심) : 옥새 숨겨 영웅되려는 마음 먹었구나.
遂達江東業(수달강동업) : 강동의 패업(霸業)을 달성했던 일,
臨風感不禁(임풍감불금) : 바람 맞으며 생각하니 감회를 금할 길 없네.

1 개요

후한 말의 장수. 손견은 손책손권 그리고 손부인의 아버지로 강동 손가의 시조다.

는 문대(文臺), 연의에서의 별명은 강동의 호랑이.

손종의 차남 혹은 손자이며 아래에 동생 손정이 있었다. 형 손강은 일찍이 죽었고, 형의 아들들인 손분손보는 손견이 거병하자 그를 따랐다.

보통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자의 후손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설이 있다. 진수가 삼국지에 '아마 손자의 후손일 것이다'라고 추측성 언급을 했는데, 웬만큼 선조가 불확실하지 않으면 이런 표현은 안 쓰기 때문. 조조조참의 후손이라는 기록도 비슷한 뉘앙스의 추측성 언급으로 되어 있다. 유비는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라고 명확하게 적은 것과 비교된다. 모순적이게도 한국에서는 한때 선조가 불확실한 손견은 손무의 자손이라고 기정사실처럼 여겨지는 반면 유비는 혈통 사칭범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손자의 후손은 자칭이고 후한 말의 신흥 호족 가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2 정사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인해 그가 독립적인 세력을 가지고 옥새를 얻어 야심을 품어 천하를 제패하려는 군벌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고 손자의 후예라는 식으로 띄워줘서 삼국지 게임 같은데서도 굉장히 문무에 뛰어난 스텟을 지닌 강동 손오의 초대군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 손견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행적은 독립군벌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황건적의 난에선 주준 휘하로 참여했고 서량에선 장온 휘하로 참전했다. 반동탁연합군에서도 원술 휘하에 있었으며 이는 손견이 남양을 원술에게 떠먹여주고 손견의 벼슬을 원술이 올려주는데서도 알 수 있다. 실질적으로 낙양을 탈환한 것은 분명 손견인데 어느새 그 공을 원술이 먹어치우는 것도 그렇고...말년까지도 충실한 원술의 셔틀. 실질적으로 따지면 진짜 군벌로서 강동에 오나라의 기반을 잡은 것은 손견이 아니라 그의 아들 손책이다.

정사의 그는 독립적인 군벌이 아니라 대체적으로 다른 사람 휘하에서 뛰어난 공적을 올린 장수에 가까웠으며 정치적인 능력이나 성품면에선 무예에 비하면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무용은 뛰어나기는 했다. 그가 후에 무열황제의 자리에 오른것은 어디까지나 아들 손권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에 추숭받은 것이지 그가 원해서는 아니었다. 배송지는 그런 측면에서 손견의 충의를 높게 평가했고 후손들의 평가는 그렇게 좋게만 써주지 않았다. 그러나 한실에 대한 충의에 대해서도 비판한 문인들이 많다. 왕예는 개인적인 복수심에, 장자는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죽였으며, 정식 관리 유표도 임의로 쳐들어갔고 무엇보다 천하의 역적 원술을 모셨기 때문이다.

2.1 탄생설화

유명한 삼국지 인물 가운데 '출생설화가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이다, 배송지가 주석으로 단 오서(吳書)엔 손견의 출생설화가 적혀 있다. 오서의 출생설화는 손견이 태어날때 상서로운 징조가 있었다고 적혀있고[1] 유명록에 적힌 설화는 손종 참고.

2.2 수적 퇴치

본래 양주 오군 부춘현 사람으로 어렸을 때부터 대담하고 화통한 기질로 인해 이름이 높았다.

17세 때 부친과 배를 타고 전당현에 이르렀는데, 강기슭에 수적떼들이 약탈품을 나누고 있었다. 이에 놀란 손견의 부친은 나아가지 못하고 도리어 배를 돌리려 했는데, 손견은 부친의 만류에도 기어이 칼을 잡고 언덕으로 올라가 장수가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 마냥 연기했다. 이를 본 수적들은 관군이 체포하러 오는 것으로 알고는 황급히 달아났는데, 손견은 이를 뒤쫓아가 기어이 수적 한 명의 머리를 베고 돌아와 부친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 일로 이름이 알려져 관리가 되었다.

2.3 허창의 난

이후 회계군에서 허창과 그 아들 허소가 반란을 일으키자 1천명의 군사를 모아[2] 양주의 관군과 합류해 공을 세웠다. 이때가 172년이었는데 손견이 156년생이이라면 17세, 155년생이라면 18세의 나이가 된다.(...) 그런데 혼란기에 열전이 상세한 상당수의 무인들은 청소년 시절부터 커리어를 쌓는다.(...)

당시 양주자사였던 장민이 손견의 공적을 장계에 적어 조정에 알리자 손견은 염독현의 승(丞=현령 보좌관)[3]으로 임명되었다. 몇해 뒤에 우이승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 다시 하비승으로 전임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평판이 좋았기에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2.4 황건적의 난

손견이 하비승으로 있을 때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주준을 우중랑장으로 삼아 반란 진압의 일익을 담당하게 했다. 주준은 손견을 군사마로 천거해 자신의 부관으로 삼았다. 주준은 양주 회계군 출신이며 이전부터 반란 진압으로 잔뼈가 굵은 양주의 실력파 관리로 손견의 선배격이 된다. 더구나 허창의 난 당시에는 회계군의 주부를 지내 손견의 활약상을 더욱 눈여겨 봤던 듯 하다.

이에 손견은 하비 일대에서 1천명의 군사를 모아 주준과 합류했는데, 주준과 손견이 함께 힘을 합쳐 분투하니, 가는 곳마다 파죽지세였다고 한다. 연이은 패배에 황건적은 완성으로 달아나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했는데, 이때 손견은 황건적의 거센 저항에도 스스로 앞장서서 성벽을 기어오르며 병사들을 독려해 승리에 크게 공헌했다. 주준이 손견의 공적을 조정에 알리자 조정에서는 손견을 별부사마로 임명했다.

2.5 변장·한수의 난

184년 겨울, 변장, 한수가 서량지역에서 난을 일으키고 185년에는 삼보까지 쳐들어왔다. 원래 황보숭이 그 진압을 맡았는데 환관들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 잘렸다. 대신 조정은 장온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반란 진압을 지휘하게 했고, 황보숭의 부관 중 하나였던 동탁은 파로장군으로 올렸다. 장온은 표를 올려 손견을 참군으로 삼아 종군하도록 했다.

이때 동탁은 장온의 소집령에 느릿하게 움직이며 한참만에야 도착했는데, 오히려 장온을 대하는 태도가 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이에 손견은 장온에게 동탁이 무능한 지휘로 군사들을 혼란스럽게 하여 반란을 전혀 진압하지 못했으며, 명령에도 제대로 따르지 않은 데다, 윗사람에게도 무례하기 짝이 없어 그 죄가 매우 크다며 동탁을 처형할 것을 주장했지만, 장온은 동탁과 강족과의 관계를 들어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동탁과의 사이가 벌어졌다. 이후 장온은 하진 사후 조정을 장악한 동탁에게 죽는다.

장온과 손견은 변장과 한수를 상대로 고전만 거듭하였다. 11월 오히려 동탁이 반군을 격퇴하였다. 장온은 탕구장군 주신에게 추격을 지시했다. 동탁은 장온에게 주신의 보급로를 지켜야 한다고 진언했고, 손견은 주신에게 한수 등의 보급로를 끊어야 한다고 진언했다. 그러나 장온과 주신은 그 진언들을 모두 무시했고, 결국 한수 등이 주신의 병참선을 끊는 바람에 주신과 손견이 크게 패퇴하였다. 전력을 온전히 보존한 것은 동탁뿐이었다.

2.6 구성의 난

구성이란 자가 1만여 명의 무리를 모아 장사군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장사태수에 임명되어 진압을 맡았는데 불과 보름만에 구성을 깨뜨렸고, 자신의 관할구역을 넘어 인근의 군인 영릉과 계양에서 구성에게 호응해 일어난 주조곽석 등의 무리까지 모조리 토벌해버렸다. 이는 엄연한 월권 행위였지만 조정은 손견의 공을 인정해 이를 사관에 기록하게 하고 오정후에 봉했다.

2.7 왕예를 죽이다

영제가 붕어하고 동탁이 권력을 잡아 전횡을 휘두르자 각지에서 군사가 일어나 동탁을 치려 했다. 손견 또한 동탁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북진했는데 형주를 지나는 동안 조인이 형주자사 왕예를 죽여달라는 격문을 뿌렸다. 손견은 왕예가 평소 자신을 무식한 무관이라고 무시해서 왕예를 미워했었으므로 군사를 이끌고 왕예를 추궁하러 갔다. 왕예는 그 면전에서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

왕예는 손견의 상관이었다. 주석에 따르면 왕예 또한 동탁을 치기 위해 거병했었는데 당시 왕예와 앙숙이었던 무릉태수 조인이 왕예에게 해를 입을 것을 왕예의 죄를 부풀린 글을 쓰고 손견에게 가서 광록대부 온의의 격문이라고 속였다. 이를 믿은 손견은 왕예를 습격했고 왕예가 성루에 올라 "도대체 내 죄가 무엇이냐." 고 묻자 오빠는 오빠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모르는 것이 죄이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궁벽해진 왕예는 결국엔 자살했는데, 이는 하극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손견이 왕예 살해의 명분이라 믿고 있던 중앙 고관의 격문 또한 조인이 날조한 가짜였다.

사실 이용 당했든 말든 이 사건 자체로는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문제는 왕예가 반동탁 연합에 참가하고 있던 사람이기 때문에 반동탁 연합의 협조를 받지 못하고 군세가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 더군다나 임지인 장사에서 낙양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인 관계로 보급이 원할하게 이루어지기 어려웠고, 거기다가 사실 상 임지를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자력으로 군세를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2.8 장자를 죽이다

결국 남양의 원술과 손을 잡고 이로 인해 중랑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계속 북상해 남양에 이르렀을때 남양태수 장자가 길도 닦아놓지 않고 군량도 내놓지 않는 등 협조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죽여버리고 원술에게 남양을 바치자 이에 원술은 손견을 파로장군, 예주자사에 임명했으며 손견이 얻지 못할 것이 없고 구하지 못할 것이 없어졌다고 한다.

2.9 양인 전투

삼국지연의에서는 당당히 하나의 세력으로써 반동탁 연합군에 참가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원술의 부장에 더 가까웠다. 손견은 신흥 가문 출신인데다 용맹무쌍했지만 거칠며 즉흥적이었고 스스로 학덕은 포기했다고 말할 정도로 무식했기 때문에 호족들에게는 야만인스러운 무부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높다. 원술은 후한 최고의 명문 원씨 가문의 적자였던 데다 원술 또한 개인적으로 군웅할거 이전부터 호걸로 이름이 높아 명성이 있었고, 여기에 더해 동탁으로 인하여, 낙양의 원씨 일족이 모조리 몰살당한 일로 엄청난 동정표를 받아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원술군의 뼈대 구축에 손견의 공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원술은 이미 사방장군 중 하나인 후장군이었다. 손견은 이제서야 중랑장을 거쳐 잡호장군에 이름을 올렸는데 그 승진을 하게 해준 게 바로 원술이다.

손견은 원술의 지원을 받으며 계속 북상하여 드디어 동탁군과 교전하게 된다. 손견은 초반에는 서영을 상대로 고전하여 불과 수십 기와 함께 도주하는 수모를 겪는데 손견은 항상 쓰던 붉은 두건을 조무에게 씌워서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다.

손견은 다시 패잔병들을 수습한 뒤 동탁이 보낸 호진여포를 양인에서 대파하고 도위 화웅을 효수했다. 이 전투가 바로 양인 전투이다.

주 : 『강표전(江表傳)』에 이르길 「혹자가 원술에게 이르길 "손견이 만약 낙읍(洛邑)을 얻게 되면, 다시는 제어할 수 없으니, 이것이 이리를 제거하려다 호랑이를 키운 격입니다"라 했다. 그래서 원술이 그를 의심했다.」고 한다.

양인성에서는 노양까지는 1백여 리나 떨어져 있었는데, 손견이 밤에 말을 달려 원술을 만나 땅에 그림을 그려가며 계획을 설명한 뒤

"출군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위로는 나라를 위해 적을 토벌하고 아래로는 장군 가문의 사사로운 원한을 위로하고자 함입니다. 손견과 동탁은 골육의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장군이 참소하는 말을 받아들여 도리어 서로 미워하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라 했다.

주 : 『강표전』에 실린 손견의 말에 의하면

"큰 공훈이 승리에 달려 있는데 군량이 이어지지 않으니, 이것은 오기(吳起)가 서하(西河)에서 탄식하며 운 까닭이요, 악의(樂毅)가 수성(垂成)에서 한을 남긴 까닭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깊이 생각하십시오."

이에 원술이 조심스러워하며 곧 군량을 조달해주었다. 손견이 둔영으로 돌아왔다. - 정사 오서 손파로토역전

손견이 너무 잘 나가서 낙양까지 수복하면 다시는 제어할 수 없으리라 여긴 원술은 손견을 견제하기로 결정하고 군량의 보급을 중단했다. 손견의 군이 주둔하고 있던 양인에서 원술이 주둔하던 노양까지는 대략 100리 거리였는데 손견은 밤새도록 말을 달려 원술의 앞에 출두해 군의 전황과 자신의 전략에 대해 땅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할 정도로 열변을 토하고 '위로는 국가의 역적을 제거하고 아래로는 공의 원수[4]를 갚기 위해 힘쓸 뿐'이라며 한치의 사심 따위는 없음을 강조했다고 한다. 손견의 열변에 부끄러워진 원술은 즉시 군량을 보내며 손견을 주둔지로 돌아가게 했다.

위의 기록을 봐도 손견은 원술의 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손견은 보급을 제대로 안 해줬던 장자는 바로 죽여버린 것에 반해 원술에게는 그저 열변을 토하는 것으로 그칠 뿐이었다. 결국 보급 권한을 쥐고 있는 것은 원술이었고, 손견은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10 낙양 입성

동탁은 북상해오는 손견의 용맹과 굳셈을 꺼려해 이각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그의 자식들을 태수와 자사로 천거해주겠다며 회유했지만, 손견은 동씨가문을 멸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온갖 모욕과 함께 거절한 뒤 계속 진군해 낙양에서 90리 떨어진 곳에서 동탁군과 대치한다. 동탁은 친히 나와 여러 능을 사이에 두고 손견과 싸웠는데, 패하여 달아났고 낙양 서쪽의 민지현에 주둔했다. 크게 이긴 손견은 여세를 이용해 계속 진군했고, 낙양을 지키던 여포를 패주시키고 낙양을 수복한다.

동탁은 손견을 자신만큼 뛰어난 장수라고 평하였다.

관동의 군대가 여러 차례 패하여 모두 나를 두려워하니, 능히 할 수 있는 게 없소. 오직 손견만이 젊고 외고집인데다, 자못 사람을 잘 등용하지만,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게 되어서는 나를 기피한다는 것을 알게 했소.

나는 옛날에 주진(主神)과 같이 서정(西征)을 나섰는데, 서정은 변장과 한수를 금성(金城)에서 포위했소. 내가 장온에게 말하여, 거느리는 병사들로 주진의 뒤에 주둔케 하려 했는데, 장온이 듣지 않았소. 내가 이때 그 형세를 상언하였는데, 주진이 필히 이기지 못할 것을 알았소. 대각(臺閣 =상서)에는 지금 (당시 일의) 본말(本末)이 있소.

일을 아직 보고하지 않았으면서 장온은 또한 나더러 선령(先零)의 모반한 강(羌)족들을 토벌하게 하여, 서방 지역을 일시에 소탕하려 하였소. 나는 모든 그 일이 옳지 않음을 알지만, 그만두게 할 수 없어, 마침내 일을 행하여 별부사마(別部司馬) 유정(劉靖)을 남겨두어 보기 4천명을 거느리고 안정(安定)에 주둔하여 성세(聲勢)로 삼았소. 모반한 강족들이 곧바로 돌아가면서 돌아가는 길을 끊고자 하기에, 내가 조금씩 공격하여 번번이 (길을) 소통시키니, 안정에 병사가 남아있음을 두려워했소.

오랑캐들은 안정에 수만 명이 있다고 말하지만, 유정에 대해서만은 몰랐소. 이 때 또한 소장을 올려 그 상황을 말하니, 손견은 주진을 행군을 따르면서 주진은 1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금성을 지으려 한다고 말하기에, 주진에게 2만 명으로 뒤에 주둔토록 하였소. 변장과 한수의 성중에는 묵을 곳이나 먹을 것이 없기에 응당 밖에서 운반하려 하지만, 주진의 대병(大兵)을 두려워하여 감히 가벼이 손견과 대전하지 못했고, 손견은 병사가 풍족하여 그 운반로를 끊고, 아이들을 써서 강족이 반드시 곡중(谷中)으로 돌아갈 것이라 하니, 양주(凉州)는 혹 안정될 수 있었소.

장온은 이미 능히 나를 기용하지 못했고, 주진 또한 손견을 등용하지 못하여, 직접 금성을 공격하고 그 바깥담을 무너뜨려서, 말을 달려 장온에게 얘기하게 하여 나의 승리가 아침저녁에 달려 있다고 하니, 장온이 이 때 또한 스스로 계획이 적중했다 여겼소. 아과(兒果)에게 건너가 규원(葵園)을 끊어버리니, 주진은 군수품을 버리고 달아나고 아과는 내 계책대로 되었소. 대각에서는 이것 때문에 나를 도향후(都鄕侯)에 봉했소. 손견이 좌군사마(佐軍司馬)가 된 것은 이를 보는 바가 남들도 같이 보았듯이, 나도 할 수 있었던 것일 뿐이오. - 정사 오서 손견전

한마디로 동탁이나 손견이 하자는 대로 했다면 변장과 한수를 토벌할 수 있었음에도 장온은 동탁의 진언을, 주신은 손견의 진언을 무시하는 바람에 실패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미 동탁이 장안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낙양을 초토화시켜놓았기 때문에 낙양성 안팎엔 연기나 불빛이 전혀 없었다. 이를 본 손견은 애통해하며 동탁이 파헤친 역대 제왕들의 종묘를 수습하고 제사를 지낸 후 곧 노양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손견이 옥새를 발견하고 원술에게 바친다.[5]

2.11 군웅할거 도래

당시 반동탁 연합군의 맹주였던 원소는 장안의 조정을 동탁의 괴뢰정권으로 규정했고, 동탁이 보낸 연합군의 해산을 종용하는 칙사를 살해하는 등 조정의 권위를 강하게 부정하고, 명망 높은 황족인 유우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원소의 주장은 상당히 극단적인 논리였지만, 당시 동탁 정권과 헌제의 정통성이 워낙에 약했던 데다, 원소의 기세가 엄청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계획은 유우 본인의 완강한 거절로 인해 무산되었는데, 이는 곧 기존의 권위를 부정했고 이를 따르는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데에도 실패한 것이다.

이로 인해 각지의 관리들은 제각기 다투며 토지를 겸병하고 사병을 늘리는 등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며 군벌화하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관리들이 군벌화 경향을 보이긴 했으나 일단 관리들이 중심으로 받들던 황제 자체를 부정함으로서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이렇게 반동탁 연합군은 흐지부지 되고 군벌들의 시대가 시작된다. 바야흐로 군웅할거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무렵 원소의 독주를 견제하고 있었던 원술은 헌제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한편 서쪽으로 진군하여 낙양을 회복하고 또한 동탁을 처벌하여 황실을 구해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원소는 유우의 추대에 실패하고, 원술은 정말로 낙양을 수복하는 가시적인 성과를 보인데 이른 것이니, 원술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을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2.12 주씨 형제가 예주를 치다

원소 또한 원술의 상승세를 견제하여 회계사람 주앙 혹은 주우를 예주자사로 삼으며, 예주를 공격해 탈취하도록 했고 주앙은 예주를 내습하여 양성 등의 주요 거점을 빼앗는다. 양성은 사예와 예주를 잇는 길목에 위치하는데 이 일대가 주앙에게 넘어가면 예주와 형주 북부에 근거지를 둔 원술은 낙양과의 연결이 끊기게 된다.

주앙은 오와 회 지역의 유력자였는데, 그의 형인 단양태수 주흔과 동생인 주우 또한 원소와 연계하며 원술과 대립했다. 이 주씨 형제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은 거의 없으나, 원술이 남양을 통치할 때 극도로 가혹하게 다스리며 마음대로 세금을 걷었다는 기록과, 주흔이 원술의 잔학함을 싫어해 그와 대립했다는 기록으로 유추했을때 원술의 군비 조달을 위한 지나친 수탈로 양주와 예주 일대의 경제가 붕괴된 것에 반발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해 중앙정부가 사실상 있으나 마나한 상태로 흘러가는 당시 분위기에 따라 대부분의 주와 군에서는 제각기 겸병하며 강해지는 데 힘쓰고 있었다. 손견은 주앙의 내습 소식을 듣고는 원소 등을 필두로 한 분리주의자들의 행태에 대해 "같이 의병을 일으켜 장차 사직을 구하고자 하였다. 이제 역적들이 격파되려 하는데 제각기 행동을 이 같이 하니 내가 누구를 믿고 힘을 합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고 눈물을 흘리며 길게 탄식했다고 한다.

이에 분발한 손견은 휘하의 군사를 이끌어 주씨 형제와 여러 차례에 걸쳐 싸운 끝에 이들을 몰아냈다.

2.13 죽음

손견은 이후 유표를 공략하라는 원술의 명령을 받았다. 손견은 유표를 공격했고 요격 나온 황조를 이기는 등 승승장구하며 유표의 거점 양양까지 포위했다.

그러나 현산으로 달아난 황조를 직접 쫓다가 그 화살과 돌을 맞고 머리가 깨져 죽었다. 영웅기에 따르면 산으로 유인한 여공이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죽었다고 한다. 사후에는 조카 손분이 손견의 잔당을 이끌고 다시 원술에게로 귀의했다.

사후에 오나라가 건국된 이후 손권은 자신의 아버지를 황제로 추숭하였다. 묘호는 시조(始祖), 시호는 무열황제(武烈皇帝)이다.

3 연의

유비, 주준이 황건적의 완성을 공격하는걸 협동하는 데서 첫 등장. 여기서 손견이 수적을 퇴치하고 허창의 난을 토벌했던 과거가 소개된다.

십상시는 손견을 장사 태수로 삼아 반란을 일으킨 구성을 토벌하도록 시킨다. 손견은 50일도 지나지 않아 구성을 토벌해 강하 땅을 평정했고 그 공으로 오정후가 되었다. 또한 남양태수 장자를 쳐부숴 원술이 남양을 얻게 돕는다.

반동탑 연합에 참가하여 화웅과 싸우나 원술이 질투때문에 군량을 보내지 않아 패배한다. 손견은 이를 원술에게 항의하고 원술은 신하 탓을 하며 넘어간다. 동탁군의 장수 이각이 손견과 혼약을 청하러 오나 손견은 이각을 쫓아낸다.

유비 삼형제가 호로관의 여포를 이기자 원소는 다시 손견에게 사수관을 공격하라고 한다. 화웅이 죽은 후에도 계속 사수관을 지키고 있었던 조잠은 동탁이 천도하며 사수관을 버리고 장안으로 철수하라고 명령을 내리자 크게 노하여 그 길로 손견의 진중으로 가 항복하고 손견을 사수관으로 안내했다.

조잠의 항복으로 제후 중 가장 먼저 낙양에 들어서게 되는데 손견은 폐허가 된 궁궐을 손보고 동탁이 파헤친 역대 제왕들의 능침,종묘를 수습하고 제사를 지냈다. 도중에 옥새를 손에 넣어 서둘러 장사성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원소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원소는 유표에게 손견이 돌아가는 길을 방해하라고 지시한다.

이후 원술의 밀서를 받고 손견은 개인적인 원한도 있고 해서 유표의 양양성을 공격한다. 손견군은 처음엔 승승장구하며 계속 이겼지만 혈기 넘치는 성미때문에 적의 유인책에 걸려 바위와 화살에 깔려 사망한다. 이때 손견의 시신은 유표군이 접수했고 때마침 황조는 황개에게 생포당했는데 유표가 손책과 협상을 해서 손견의 시신과 황조를 교환한다. 본래 정사에서는 황조가 생포되지 않았고, 손견의 시신을 찾아온 것은 환계이다.

삼국지평화를 비롯한 원대 삼국극에서는 화웅이나 여포가 나타났을 때, 배가 아프다면서 도망가는 비참한 역할로 등장하는 등 이미지가 형편없었던 것과 비교하면 이미지가 많이 좋아졌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손견의 이미지를 용장으로 설정하여 정사 삼국지와 크게 다르지 않는 수준으로 복귀시킨 셈이다.

그러나 삼국지연의에서 손견의 평가가 이득이라고 보기 어려운게 손견이 낙양에 제일 처음 입성한 이유는 정사에서는 화웅, 호진, 여포, 동탁을 격퇴하여 진격했기 때문인데 화웅, 여포를 이기는 공이 유비 삼형제에게 넘어가버려서 손견이 낙양에 제일 처음 입성한 이유가 사수관의 조잠이 항복해버려서로 바뀌었다. 또한 정사에서는 아내가 인질로 잡히는 바람에 옥새를 강탈당한 것을 연의에서는 옥새먹튀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삼국지평화에서의 시궁창스러운 모습만 어느정도 수정 보완되었을 뿐이지 정사에 비해서 이득인 것은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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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의 우물가에서 옥새를 찾아낸 손견

삼국지연의에서는 옥새를 손에 넣은 다음 원소유표가 그를 추궁하자 "내가 옥새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칼과 화살을 맞아 죽을 것이다." 라고 맹세한다. 일종의 복선인 셈.

4 평가

4.1 통솔

후한말의 용맹한 지휘관 중 하나.

17살 때 배짱만으로 수적들을 물러나게 하고 오히려 덤벼서 1명을 살해했으니 타고난 용맹함이 있었던 모양.

황건적의 난 때부터 후한 말의 여러 전쟁과 반란 집안에서 활약했으며 구성과 허창의 난 역시 토벌했다.

반동탁연합에서 거의 미쳐날뛰는 수준으로 활약했으며 과장 없이 다른 제후들 공을 다 합쳐도 손견의 공을 못 따라 간다. 여러 제후들은 동탁군에게 패배했으며 원소는 한복의 군량 보급 중단으로 무력화되었고 조조도 서영에게 패배했다. 손견 역시 초전에 서영에게 패배하긴 했어도 병력을 수습해 호진, 여포를 격파하고 동탁도 물리쳤으며 낙양을 일시 수복했다. 사실상 손견 혼자서 동탁과 싸웠다고 봐도 될 정도.

동탁은 당시 서량에서 백전이상을 치뤘다고 말해질 만큼 경험많은 강군이었고 실제로 대부분의 제후들이 동탁군에게 패배했다. 더구나 하진의 중앙군까지 흡수했으니 규모 면에서도 적지 않았을텐데 연달아 격파하며 동탁이 이각을 보내 화친을 청할 정도였다.

다만 서영에게 패하고 변장과 한수를 상대로도 고전을 면치 못했으며 황조도 초전에만 밀어붙였을 뿐 결국 복병에 당해 사망했다는 점을 보건대 삼국지 전체에서 최고를 다툰다기에는 무리가 있다.

4.2 무력

개인적인 무예에 관한 기록은 직접적인 것은 수적에게 덤벼들어 1명의 목을 벤 것 정도 이외에는 없다. 다만 용맹하다는 묘사는 여럿 있다.

동탁은 손견의 용맹하고 굳센 것을 꺼려하여, 이에 장군 이각(李傕) 등을 보내 가서 화친을 구하게 하면서 지금 손견의 자제들 중 자사나 군수로 임명할만한 자를 나열해 상소하며, 그 표를 허락하고 등용하겠다고 했다. - 정사 오서 손파로토역전

이 와 같은 묘사인데 김경한 등은 이를 두고 손견이 무예도 천하제일! 식으로 묘사했으나 이건 과장이 심한 확대 해석이다. 손견의 지휘 능력과 군사적 식견을 두려워했을 뿐 개인적인 무예(싸움실력)를 말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저 시점에서 손견은 동탁의 군대를 격파한 거의 유일한 군사집단이며 초전의 패배에도 오히려 반격해 동탁군의 장수를 죽인 상황이므로 그 군대의 기세를 두려워했다고 볼 수 있다.

여포가 동탁 휘하였고 동탁도 힘이 대단했는데도 손견의 용맹을 두려워했으니 무예가 최강!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애초에 동탁이 전선에서 손견과 직접 칼을 휘둘러 맞섰다는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동탁이 직접 손견과 칼싸움해서 이길 수 없다라는 식으로 말한 적도 없다.(동탁이 손견을 칭찬한건 과거 보았던 군사적 식견이다.) 그리고 여포를 이기고 동탁이 두려워했으니 무조건 삼국지 무예(지휘력도 아니고) 최강은 손견이라고 주장하기도 애매하다.[6] 병사를 지휘해 전투에서 이기는 지휘력은 확실히 당대 최상급이었지만 그게 손견이 직접 칼을 휘둘렀다는 증거는 아니다. 물론 용맹함을 두려워했다는 기록을 볼 때 앞장서서 싸웠을 가능성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이다.

전투에서 이겼으니 무예도 더 낫다는 식의 의견은 삼국지연의에서 장수들이 앞장서서 칼싸움하는 이미지 때문이다. 이 당시 전쟁은 관우안량 참살이나 방덕의 곽원 참살 등 기록에도 남을만한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어디까지나 병사들의 훈련도와 경험, 지휘관의 전술로 판가름났다. 손견이 몇몇 예외적인 경우였다는 증거는 없다.

다만 완성의 황건 토벌 당시 앞장서 성벽을 올랐다는 묘사가 있는 걸 보아 장군으로서 어느 정도 일신상의 무예를 익히기는 했던 모양이다. 초월적인 무예나 용력의 근거로는 빈약하나 선두에서 성벽을 오르는 것은 보통의 용기와 무예로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

5 기타

동탁은 두 원씨(원소, 원술)와 손견 그리고 유표만 죽이면 천하가 평정되어 두려울 게 없다고 했다.동탁의 관점에서 4대 주적인 소술표견.

  • 원소는 전 소제 정권의 중심인물이란 위치에 있었고, 이미 십상시 주살과 낙양 입성한 동탁과의 대립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데다, 동탁에 의한 원씨 일가의 몰살로 인하여 얻은 동정표를 더하여 분리주의를 선동해, 신질서인 장안 조정의 정통성과 중앙집권력을 박살낸 장본인이다.
  • 원술은 이런 원소의 분리주의를 대차게 까면서도 낙양으로의 진군과 장안 수복이란 명분을 제시하는 틈새공략으로 반사이익을 얻었고, 손견은 좀 더 현실적이고 과거의 정부의 정통성에 매인 원술의 대안을 압도적인 무용으로 실천해냈다.
  • 유표는 동탁에 의해 새로이 바뀐 조정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한편으론 원소를 맹주로 떠받드는 등 상황에 따라 수시로 태도를 번복하며, 적을 피하고 자신은 약소 세력을 병합해 가며, 형주를 장악하고 할거하는 지극히 표리부동한 태도를 보였다. 동탁 입장에선 말 그대로 4대 역적 목록에 올라갈 만한 셈이다.
  • 손견은 군웅할거 이전부터 활약하다가 군웅할거 극초반에 사망하지만 글자 그대로 '폭풍'같은 행보를 보였다. 보통 원술과 별달리 연관없는 독립적인 군벌로 묘사되거나 혹은 원술을 이용한 뒤 자립하여 패업을 꿈꿨던 것으로 묘사되는 창작물이 많지만 정사상의 행보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한 묘사는 그 아들 손책에게 어울린다.

손견의 충심을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축에서는 원소를 필두로 한 분리주의자들의 행태를 거의 혐오에 가까울 정도로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성격은 좀 거칠어도 한 황실에 대해서 일관된 우국충정을 보였기에 배송지가 당대의 여러 인물 중에서도 손견에게 충렬(忠烈)이라는 칭호를 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손견은 왕예를 개인적인 복수심에, 장자는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서 무참하게 죽였으며 또다른 후한의 정식 관리 유표까지 공격하였다. 이는 말 그대로 후한 체제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왕예, 장자, 유표는 아예 반동탁 연합군의 일원이기까지 하였다. 손견이 정말 한의 충신이었다면 설명이 불가능한 대목이다. 손견 역시 그저 후한 말의 혼란기를 살았던 한 명의 장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또 손견이 위로 모신 인물도 하필이면 천하의 역적 원술이라는 게 문제였다. 어떻게든 황실의 권위가 유지되던 영제 시대 때는 그렇게 날라다니더니 결국 군벌 시대에 들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원술 손아귀에서 놀아나다 죽은 게 아니냐는 시각도 존재한다.

원술이 초반에 헌제의 정통성을 옹위한 이유는, 그냥 원소가 잘 나가는 것을 보기 싫었기 때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역적인 동탁에 의해 강제로 추대된 어리고 정통성이 약한 황제로 인해 중앙정부가 극도로 약해진 틈을 타 자기가 스스로써 황제의 자리에 오를 욕심을 가졌는데, 유우 같이 무게감 있는 인물이 황제로 즉위하면 곧 중앙정부와 사회의 질서가 회복될까 우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원소가 주앙에게 명을 내려 손견을 치게 하면서 역적 동탁의 주살을 방해했다는 건 유우 추대 시도와 더불어 군웅할거의 원술과 공손찬 등 초반 적대세력들이 원소를 비난하는 주된 명분들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원술이 칭제하면서 흑역사화가 됐는지 이후에 조조가 원소를 비난할 때는, 유우 추대 쪽으로 기틀을 잡고, 원술과 엮어서 원씨 전체를 깐다.

6 가족 관계

  • 손종 - 아버지
  • 손강 - 형
  • 손정 - 남동생
  • 손?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동생. 서곤의 어머니.
  • 손책 - 장남
  • 손권 - 차남
  • 손익 - 삼남
  • 손광 - 사남
  • 손랑 - 오남
  • 손부인 - 딸
  • 손?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이 하나 더 있었다. 제갈근전에서 손권의 매형인 홍자(弘咨)가 제갈근을 천거했다.
  • 오국태 - 부인
  • 오경 - 처남. 오국태의 동생.

7 미디어 믹스

8 관련 항목

  1. 『오서(吳書)』에 이르길 「손견의 집안은 대대로 오군에서 벼슬살이 했는데, 그 집은 부춘에 있고, 조상들은 성 동쪽에 장사지냈다. 무덤위에 여러 번 괴이한 빛이 있었는데, 운기(雲氣)가 오색 빛을 띠고 위로는 하늘에까지 이어고 수(數) 리에 만연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길가다 이를 보았다. 마을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얘기하길 “이것은 비범치 않은 기운이니, 손씨가 흥하게 될 것이다!” 라 했다. 그 어미가 손견을 배었을 때, 꿈에서 창자가 나와서 오의 창문을 둘러싸는 것을 꾸었는데, 깨고 나서는 두려워서 이를 이웃 어멈에게 알렸다. 이웃 어멈이 말하길 “어찌 길조가 아니겠습니까?” 라 했다. 손견이 태어나니, 용모는 범상치 않았고 성품은 활달하며, 빼어난 절개(奇節)를 좋아했다」고 한다.- 정사 오서 손견전 주석.
  2. 손견의 가문이 경제력을 갖춘 신흥 가문이었다는 주장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데, 이 정도 규모의 군대를 편성하는 데는 상당한 자본금이 필요한 데다가 인맥 역시 중요하다. 비록 손견이 공직에 있었다곤 하나, 말단이었고 수완이 좋았다고 한들 고작 17세의 소년에 불과했으니,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1천의 병력을 모은 주체가 손견으로 된 것은 최소한 그의 가문이 군대 편성의 자금 문제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부를 축적해왔고 다른 호족들에게 영향력을 미칠만한 가문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겠냐는 것.
  3. 후한 시기 현령을 보좌하는 공식적인 직위는 승(丞)과 위(尉) 두 직책이 있었다. 이중 승은 문관직으로 문서와 행정담당을 하는 직책이었다. 위는 현의 치안을 담당하는 총책임자로 군권을 담당하는 직위였다. 무장으로 유명한 손견이지만 승의 직위에 오래 있었던걸 보면 행정수완이 뛰어났던듯 하다. 이는 그 주변에 유능한 문관들이 많았던 이유가 될 수 있을듯 하다.
  4.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동탁은 아직 낙양에 거주하고 있던 원씨들을 역적죄로 참수하였다.
  5. 산양공재기에 따르면 손견의 아내를 볼모로 잡고 협박해서 얻었다고 한다. 훗날 원술은 그 옥새를 이용하여 자신이 황제임을 온 천하에 알려 공공의 적이 되고 만다.
  6. 애초에 이 두 사람이 힘세고 무예가 뛰어나다는 묘사는 있어도 천하제일이라는 식으로 묘사된 정사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