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캐슬 리즈 시절의 주역
이름 | 존 에드워드 톰슨 밀번 (John Edward Thompson Milburn) |
생년월일 | 1924년 5월 11일 |
사망년월일 | 1988년 10월 9일 |
국적 | 잉글랜드 |
출신지 | 애싱턴 |
포지션 | 센터 포워드 |
신체조건 | 180cm / 82kg |
등번호 | 9 |
소속팀 |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43-1957) 린필드 (1957-1960) 이유슬리 (1960-1962) |
국가대표 | 13경기 / 10골 (1948-1955) |
감독 | 린필드 (1957-1960) 이유슬리 (1960-1962) 입스위치 타운 FC (1963-1964) |
1 생애
1.1 어린 시절
밀번은 1924년 뉴캐슬어폰타인 북부의 탄광촌인 애싱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모두 축구를 잘했다고 알려졌는데 그의 아버지와 삼촌은 모두 애싱턴에서 1920년대에 선수로 뛰기도 했다. 밀번은 어린 시절에 선더랜드 AFC의 팬이었고 몇몇 지역 육상대회에 나가 우승을 해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다 밀번은 14살에 학교를 중퇴하고 애싱턴의 탄광에서 중기계를 수리하는 설비 기술자로 일했다. 그렇게 전시에 병역을 면제받고 애싱턴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1.2 클럽
하지만 밀번의 선택은 의외로 선더랜드의 최대 라이벌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였다. 빌린 축구화를 들고 찾아간 입단 테스트 경기에서 후반에만 6골을 때려박으며 합격, 그의 커리어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때는 1943년. 한참 전쟁 중이던 터라 3년간 그렇게 많은 시합에는 참가하지 못했고 이 시기에는 주로 아웃사이드 라이트 또는 인사이드 포워드로 활약하였다.
1946년 드디어 시작된 리그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화려한 현질을 바탕으로 1부 리그 승격을 위한 스쿼드를 짰지만 5위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다 1947년 10월 팀의 주전 센터 포워드 찰리 와이만이 사우스햄튼 FC로 이적하였고 그 빈자리는 재키 밀번의 차지가 되었다. 밀번은 센터 포워드 데뷔 경기에서 해트 트릭을 기록했고, 그 시즌에 21골을 넣으며 뉴캐슬을 결국 1부 리그에 승격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밀번은 이후 소속팀 뉴캐슬이 1부 리그의 4~5위 언저리에서 놀아 리그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FA컵 타이틀을 3번 차지하는데 공헌하였다. 무릎 부상으로 인해 1952-53 시즌의 반을 날린 것을 제외하면 항상 꾸준했다. 1955년 FA컵 결승에서는 맨체스터 시티 FC를 상대로 45초 만에 골을 넣기도 했는데, 이는 1997년 소년명수에 의해 경신되었다. 밀번은 1956-57 시즌을 끝으로 뉴캐슬을 떠났고 린필드와 이유슬리 등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남은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1.3 국가대표
뉴캐슬에서는 영웅이었지만 국가대표팀과는 그렇게 큰 인연을 맺지 못했다. 1950년 월드컵에 출전했지만 그는 계속 벤치에 머물러 있었다. 마지막 스페인전에만 출전했지만 그의 활약은 미미했고,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이것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메이저 대회 출전이었다.
월드컵 이후 당시 감독이었던 월터 윈터보텀 경의 선택은 냇 로프트하우스였고, 밀번은 항상 2인자였다. 그러다 1955년, 코펜하겐으로의 원정경기에 4년 만에 발탁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포지션은 옛날에 뛰던 라이트 윙어였고 밀번은 이 경기에서 삽질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대표팀에서의 좌절은 밀번의 선수 생활에 대한 에너지를 빼앗아갔고 뉴캐슬에서 비교적 빨리 떠난 원인이 되었다.
1.4 은퇴 이후
선수에서 은퇴한 후 입스위치 타운 FC에서 감독을 맡았지만 강등을 막지 못했고 그렇게 잘렸다. 그 이후에는 뉴스 오브 더 월드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했다. 뉴캐슬어폰타인의 프리맨[1]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1988년에 폐암으로 인해 사망했다. 하여튼 담배 때문에
2 플레이 스타일&평가
어린 시절에 육상 선수로 활약했던 경력이 있을 정도로 꽤 스피드가 빨랐다. 또한 터닝 능력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공간을 만드는 능력이 뛰어났고 양발을 능숙하게 사용하였다. 또한 수비에도 일가견이 있어 꽤 괜찮은 태클 실력을 보유했다고 전해진다.
뉴캐슬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영웅. 홈구장 세인트 제임스 파크의 서쪽 스탠드의 이름이 밀번 스탠드이다. 3개의 동상이 있고 통산 200골을 넣어 앨런 시어러의 뒤를 이어 역대 뉴캐슬 구단 통산 득점 2위에 랭크되어 있다. 그리고 2009년 골닷컴 선정 역대 잉글랜드 선수 랭킹 43위에 선정되었다.
3 사생활
1947년 밀번은 레치워스 호텔에 투숙하다 아내가 되는 로라 블랙우드를 만났다. 로라의 말에 의하면 밀번의 방에서 아침을 서빙 하는데 밀번이 적극적으로 구애를 했다고. 3개월 후 로라가 애싱턴에 놀러갔을 때 프로포즈했고 1948년 2월 16일에 결혼했다. 그리고 이들 부부는 슬하에 세 아이를 두었다.
4 뒷 이야기
- 밀번의 가문은 축구로 꽤 유명하다. 사촌들 4명이 프로 선수로 뛰었는데 1908년생인 존 밀번은 레프트 백으로서 리즈 유나이티드 FC에서 11년간 386경기를 뛰었고, 1910년생 조지 밀번 역시 리즈 유나이티드와 체스터필드에서, 1919년생 제임스 밀번은 리즈 유나이티드와 브래드포드 시티에서, 1926년생 스탠리 밀번은 체스터필드, 레스터 시티 FC, 로치데일에서 활약하였다. 그리고 스탠리 밀번의 누나인 엘리자베스 밀번은 잉글랜드 역대 최고의 레전드인 찰튼 형제의 어머니이다.
- 사실 1947년에 포지션 변경 당시 밀번은 센터 포워드 자리를 맡기 싫어했다.
저는 운 좋게도 휴이 갤러처의 셔츠를 받았고 매주 토요일마다 항상 그가 메인 출입구 10야드 바깥쪽의 같은 위치에서 같은 시간에 저를 기다리고 있다고 상상했어요. 안녕 재키, 너 잘하네. 그런데 너를 위해 작은 팁을 준비했어 그렇게 그는 이전 게임의 내 플레이에서 무언가를 지적했어요. 내가 경기하는 날 내내 그가 준비하는 조언을 들었죠.
- 재키 밀번[2]
- 밀번은 매우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었다. 톰 피니는 이런 그를 두고 선천적으로 열등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 그는 또한 골초였다고 전해진다. 담배를 하도 피워서 스피드가 빨리 줄었고 그것이 뉴캐슬을 빨리 떠나게 한 원인 중 하나였다.
5 수상
5.1 클럽
- FA컵 우승 3회: 1951, 1952, 1955(이상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 FA 커뮤니티 실드 준우승 3회: 1951, 1952, 1955(이상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 북아일랜드 챔피언십 우승 1회: 1958-59(린필드)
- 북아일랜드 컵 우승 1회: 1959–60(린필드)
- 북아일랜드 컵 준우승 1회: 1957–58(린필드)
- 골드 컵 우승 2회: 1957–58, 1959–60(이상 린필드)
- 얼스터 컵 우승 1회: 1959-60(린필드)
5.2 개인
- 얼스터 올해의 선수 1회: 1957-58(린필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