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센고쿠 시대에 과대평가된 사천왕을 이르는 말. 전국 대학교의 과 대표 사천왕이 아니다!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다테 마사무네, 시마즈 요시히로,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다섯 명을 가리킨다. 사실 이때 언급되는 인물을 전부 합치면 4명이 아닌 5명이지만, 다섯 명인데 4천왕인 류조지 사천왕을 본따서 그냥 사천왕이라 부른다. 때에 따라서는 시마즈 요시히로나 쵸소카베 모토치카 대신 사나다 유키무라나 나오에 카네츠구 등이 포함되기도 한다. 사실 과대포장의 정도로만 따지면 사나다 유키무라가 다테 마사무네와 투탑으로 꼽히며 다른 멤버들을 압도한다는 평가를 받지만 다이묘가 아니라 무장이라서 포함되었다 안 되었다 하는 모양.
2 대상 장수
2.1 다케다 신겐
- 항상 우세한 상태에서 싸움을 걸고, 소수로 대군을 무찌른 전적이 없는데도 패배가 있다. 북시나노를 공격할 적의 무라카미 요시키요와의 싸움에서 다수인 주제에 쳐발렸다. 게임에서는 겐신과 더불어 최고급의 통솔력을 자랑하지만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사실 참모와 부하 맹장들의 활약이 대부분이지만, 왠지 모르게 이미지가 강하게 되었다.
- 매형(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겐 대든적이 없다.
- 상대방이 걸어온 동맹을 손바닥 뒤집듯이 간단히 끊은 전적이 있는데 멍청한건지 치사한건지.
- 처음부터 카이 22만석에 5천 병력이 있었고, 진출지인 시나노에도 호족 레벨 뿐이었다.
- 다케다 가문 멸망 책임의 상당한 부분이 신겐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후대인 카츠요리에게 전가되고 있다.
2.2 우에스기 겐신
- 10만 대군으로도 오다와라를 낙성시키지 못했다. 공성전은 서툴다는 지적.
- 패배한 적이 없다지만, 사실상 패배는 많다.(과정이 아닌 결과로서)
- 부처의 화신이라고 자칭한 주제에 특기는 메뚜기전법(적지에서 물자약탈)과 인신매매(포로)였다.
- 적대하는 상대 다이묘의 영토에 재해가 일어나 물자가 부족하게 되자, 물자를 공급해주면서 '적에게 소금을 보낸다'라는 속담의 유래가 되었는데, 속담의 뜻은 의협심이 깊다는 뜻이지만 사실은 무역을 통한 이익 불리기에 지나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된 약탈과 인신매매등도 포함, 재산 불리기 하나는 일가견이 있다. 실제로 겐신의 거성이었던 에치고의 카스가산성의 보유재산은 전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었다고 한다. 수없이 침공전을 벌일 수 있었던 이유도 그 재력 덕분이었으며 그러한 이유로 무용보다는 내정을 더 높게 평가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 관동 중소 다이묘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겐신이 직접 쳐들어오면 따르는 체하다가 거성으로 돌아가면 다시 손바닥뒤집고 호조가에게 붙기를 반복했다. 수없이 벌어진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민심장악에는 실패했다.
2.3 다테 마사무네
- 별로 실용성도 없는 기마철포대나 외눈이라는 이미지때문에 전투쪽 능력이 뛰어나다는 이미지지만, 실제론 모략가에 내정쪽에 뛰어난 인물. 확실한 업적을 남긴 내정쪽은 미미하고 엉뚱한쪽이 과대평가를 받고있다. 세키가하라 전투시 우에스기를 모가미와 함께 협공했으나 우에스기에게 발렸다.
2.4 시마즈 요시히로
- 인물항목에 기술한 뻘짓도 있고, 다이묘라 그런지 3명의 형제의 능력을 흡수해서 평가 받고있다. 시마즈 가중 제일의 맹장이란 평가는 사실 요시히로보단 이에히사에 어울린다.
2.5 쵸소카베 모토치카
- 입지가 좋았다면 천하인을 노릴수 있었을것이라고 하지만 장남 사망후의 심약한 모습이나 말년에 몸보신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 노부나가의 평가 그대로.
2.6 사나다 유키무라
- 센고쿠 시대 마지막을 장식하는 오사카에서의 최종전의 일발활약을 제외하면 업적이 없다. 그 활약조차도 모리, 아카시가문의 협공이 뒷받침되었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 사실 본명은 사나다 노부시게이며 천재군사의 이미지를 지닌 유키무라라는 인물상 자체가 노부시게를 바탕으로 한 후대의 창작이다.
3 비판점
처음 전국 과대사천왕이란 단어가 만들어진 곳은 2ch. 본래 의도는 각종 창장물을 통해 과소평가 되거나, 혹은 과대평가 된 무장들을 재평가하자는 것이었으나, 2ch의 친 노부나가 성향이 너무 강하다 보니, 노부나가에 반하는 인물들을 깎아내리고 노부나가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변질됐다.
더욱이 따지고 보면 오다 노부나가 역시 과대평가된 부분이 많은 터라 무조건 해당 장수들만 거품이 끼었다고 볼 수는 없으며, 특정 인물을 평가할 때도 각종 병법이나 역사적 사실과 과정은 전부 무시한 채 성급하게 결론 짓고, 단편적인 내용만 끌어들여 언급되는 인물을 깎아내리는 데 주력하는 등 선정 방식이나 내용에서도 엉성하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무척 많은 터라 이 부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4 2ch 전국시대 관련 게시판 공지 번역
원문 링크#
해당 단어가 만들어진 곳이자 과도한 친 노부나가 성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니 참고하자. 상술한 바와 같이 일반적인 병법 따윈 무시하기 일쑤이며,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을 이긴 경우에만 명장으로 취급해 주는 기묘한 성향이 있다. 애초에 전쟁의 기본은 싸움이 벌어지는 순간과 장소에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는 것이다. 정작 소수로 다수를 이긴 것처럼 보이는 전쟁에서도 실제로 보면 큰 틀의 전쟁 아래에 있는 각 전투 당시의 병력은 서로 대등하거나 오히려 소수인 쪽이 다수인 쪽에 비해 병력을 더 많이 동원한 경우가 많았다. 이 분야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전설 중 하나가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이며, 각개격파와 기동전이 전략전술에서 굉장히 중요한 이유이다. 애초에 공격자가 유리한 상황에서 승리를 확신할 수 있을 때 공격하거나 그런 상황을 조성할 수 있는 능력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다음으로 가장 강력하고 효율적인 방법이다. 전쟁의 80%인 준비부분을 무시하는 것부터 이들의 무식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서도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도 특징. 전체적으로 보면 알겠지만 전국시대를 지나치게 오다 노부나가 입장에서만 유리하게 해석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군사 뿐만 아니라 정치제도 시행이나 국가경영 등을 굉장히 쉬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티도 난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공지 자체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부분도 있긴 하다. 가령 모리 가문이 '고쿠진 연합맹주 체제의 전형적인 예'라고 설명한 것도 맞는 이야기이며 그 연장에서 모리 료센 체제가 실은 그만큼 가문의 지배력이 약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예라는 설명도 일리 있는 해석이다. 모리가 뿐만 아니라 대개 전국시대 다이묘들이 이런 지역 유력자들의 연합맹주라는 형태이기도 했다. 이 틀을 깨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가문이 다름 아닌 오다 가문인데, 오다 노부나가 통일 사업의 의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노부나가는 전통적으로 지방분권적인 성향이 매우 강했던 일본을 하나의 강력한 중앙정권 아래 묶으려고 시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마가와 요시모토나 다케다 카츠요리가 실은 녹록치 않은 인물이었다는 점이나, 사원 세력이 막강했다는 점, 다케다나 우에스기는 물론 시마즈나 모리 등이 게임이나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과대평가되었다는 것 자체도 틀린 얘기는 아니다. 특히 다케다 신겐은 에도시대부터 과대평가되었다는 견해가 있었으며, 시마즈가 임진왜란 때의 사천 전투를 얼마나 과장해 놓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사실 이것은 시마즈 뿐만 아니라 전국시대 관련 사료 자체의 문제점 때문이기도 한데, 대개 일본 전국시대의 기록들은 조선이나 중국처럼 관찬 사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행장'이나 에도시대에 작성된 '군기물'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다 노부나가도 그렇게 과대평가된 부분이 있어서 그렇지. 애당초 이 공지글은 나무위키처럼 불특정 다수가 편집한 글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보면 된다.
4.1 전국시대판의 기초지식
이 정도도 모르면 여기서 바보 취급을 받습니다.
4.2 전국시대 전반편
- 치안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교토도 자치조직 같은 것이 있었다)
- 하지만 역시 다이묘 가문과 다이묘 가문의 국경 근처는 당연히 위험.
- 영토 크기보다도 중요한 것은 석고(石高). 예를 들면 오와리 같은 데는 저렇게 좁은데 50만석을 넘는 대국.
- 1만석X250이 대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병사 수. 예를 들면 50만석이라면 12500, 백만 석이라면 25000 정도가 기준.
-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없는 시대였기에 숫자가 굉장히 엉망. 오케하자마에서 이마가와 4만이나, 미미카와에서 오토모 6만이라든가 하는 건 있을 수 없다.
- 잇키(봉기 세력)는 강하다. 정규군이라도 아시가루=농민이 당시의 상식. 잇키 토벌을 현재 가치관(그 주변 일반인과 직업군인 간의 싸움으로 생각함)으로 생각하는 것은 착각.
- 소가마에(惣構)[1]는 꽤 곳곳의 성에 존재했다.
4.3 오다 노부나가 편
- 노부나가는 인망이 있었다.
- 노부나가는 의외로 좋은 사람.
- 특히 가족에게 터무니없이 관대했다. 동생 노부카츠의 아들 츠다 노부즈미를 용서해 무장으로 등용하거나 딸을 모두 안전한 2세 무장에게 시집보내는 등 헤아릴 수 없다.
- 노부나가는 그 정도로 잔학하지는 않았다.
- 노부나가는 이미지만큼 성질이 급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에야스보다는 참을성이 좋다. 정말 무서운 건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하여 격노했을 때.
- 노부야스(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자식)은 노부나가가 죽인 게 아니다.
- 노부나가에게 있어서 나쁘고 이에야스에게 있어서 좋은 이야기는 대개 에도시대의 창작(아네가와 전투, 노부야스의 할복 사건 등)
- 노부나가와 미츠히데는 사이가 좋다.
- 좋을대로 방화를 일삼은 건 아니다.(미노 공격 때도 산에 불을 지르면 바로 성을 얻을 수 있었는데도 하지 않았다.)
- 좋아서 종교 세력을 몰살한 것도 아니다. 노부나가가 싸운 것은 세속 세력으로 별로 일향종 신앙이나 포교를 금지하지 않았다.
- 나가시노 전투에서 삼단철포 같은 건 없었다.
- 라쿠이치라쿠자(樂市樂座)[2]는 노부나가가 아니라 롯가쿠 외의 다른 다이묘들도 하고 있다.(이마가와 우지자네 등)
- 이노우[3] 전투, 모리베 전투, 텐노지 전투 등 적은 병사로 대군을 물리친 전투가 많다.
- 미카타가하라 전투 최대의 피해자.
- 포위망을 상대하면서도 신겐 정도는 쓰러뜨릴 수 있다.
- 혼노지의 변이 없었으면 확실히 몇 년 내로 천하통일.
4.4 도요토미 히데요시 편
- 영민(백성)에게 사랑받은 태합 어르신 따위는 뻥.
- 혼노지의 변 시점에서 히데요시는 가신필두인 시바타, 제2위의 아케치, 여러 가지로 좋은 대우를 받고 있던 니와의 아래인 4번째 정도.
- 실제로는 부잣집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 잔혹한 행위가 많다.
- 노부나가가 죽었을 때부터 노부나가의 악담을 없는 것도 만들어서 퍼뜨린 것을 보면 성격이 나쁘다.[4]
- 노부나가와 같이 원맨 타입[5]. 그만큼 타케나카 한베에나 구로다 간베에에게 의존하지 않았다.
- 원래 다케나카 한베에는 노부나가의 직속 가신. 히데요시에게는 오미에서 요리키 겸 감시역으로 붙여진 존재.
-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힘 없이 천하인 히데요시는 있을 수 없었다.
- 정책은 노부나가의 계승&누구나 할 수 있는 레벨이 대부분. 가타나가리(刀狩り) 후에도 농민이 칼을 가지고 있다거나, 태합검지도 가공의 석고가 제출되거나 했었다.
- 임진왜란 때 싸움은 시종 일본의 우세.
뭐?하지만 통치는 달랐다. - 도요토미가 멸망의 원인은 전부 이녀석. 특히 히데츠구 사건의 처분은 최악으로 모가미 요시아키를 시작으로 많은 무장에게 실망을 주었다.
- 씨가 없다.[6]
- 히데요리는 아마도 이녀석의 아들이 아니다.
- 나쁜 소문이 많지만 도쿠가와가에 의해 폄하된 부분도 많으므로 주의할 것.
4.5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
- '충성스러운 미카와 무사' 따위는 없다. 애당초 아버지의 사인부터가...[7][8][9]
- 자기 입장에 나쁜 것은 전부 노부나가에게 떠넘겼다.(자식 죽이기, 미카타가하라에서 3천밖에 병사를 보내주지 않았다 등)
- 아네가와 전투에서의 분투는 없었다기보다는 아네가와 전투 자체가 알려진 것처럼 대규모 전투가 아니었다.
- 미카타가하라 전투는 이에야스의 실수라기보다 거기서 도망친다면 고쿠진(國人: 지방 호족)들이 따르지 않게 될 것이라서 어쩔 수 없이 출진. 별로 신겐이 굉장한 것은 아니란 것이 타당.
손해라는걸 알면서도 움직일 수 밖에 없도록 외통수로 몰아넣은게 대단한게 아니라는 이들의 식견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 사실은 알려진 것처럼 가혹한 인질시대라는 것은 없었다. 요시모토에게 굉장한 기대를 받았고, 다이켄 셋사이가 교육을 맡았다.[10]
- 별로 덕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미카와 일향종 잇키, 노부야스 숙청, 중신 이시카와 카즈마사의 배반, 시나노의 잇키, 오쿠보 나가야스 사건 등.
- 일향종과의 약속을 깨고 절을 부수고, 신겐과의 약속을 깨고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놓아주고, 노부나가의 약속을 깨고 다케다 가신을 숨겨 주고, 모리와의 약속을 깨고 영지를 빼앗고, 히데요시와의 약속을 깨고 히데요리를(이하생략)[11]
- 히데요시의 무덤을 부쉈다.
- 잔학도는 히데요시>이에야스>노부나가
- 사실 쇄국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해외 무역에 적극적이었다.
- 에도시대의 평화는 외적이 없었기 때문.
- 입장이 나쁜 에피소드는 있었다고 해도 260년에 걸쳐 정성스럽게 지워지고 있다.
4.6 다케다 신겐 편
- 전국시대에서 최고로 과대평가되고 있는 과대4천왕[12](다케다, 우에스기, 시마즈, 다테, 쵸소카베. 5인이지만 신경쓰지 말자)의 필두격.
- 항상 우세한 상황에서 싸움을 걸기에 적은 병사로 대군을 깨뜨린 전투가 없다.
- 그런 주제에 몇 번이나 졌으니까 이녀석 역시 전쟁은 허접이겠지.
항상 우세한 상황을 만든게 허접이란 놀라운 전략! - 노부토라 이상의 과중한 세금을 물렸다.
- 영민들에게 미움받았다.
- 정권 탈취 이후 잠시 동안 이타가키 노부가타의 괴뢰였다. 또는 이타가키가 주군이라 할 정도로 심하게 전횡을 일삼았고 그가 전사할 때까지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 겨우 고쿠진(國人)의 연합 맹주 정도의 존재이기에 조직 만들기는 안 된다.
- 사람을 쓰는 것도 정말로 뛰어났는지는...
- 노부나가가 무서워하는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
- 격이 낮은 인물들밖에 이기지 못한다.
- 오야붕(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는 머리를 들지 못한다.
- 미카타가하라에서는 3배의 병력차가 있었기에 이겼다. 별로 신겐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 메뚜기 전법(상대 영지에서 물자 약탈)과 인신매매로 어떻게든 나라가 유지되었다.
우에스기는 똑같은 짓을 하고 무서운 다이묘라는 평을 받는다는 건 잠시 잊자이를테면 자전거조업.[13] - 가와나카지마는 안개 속에서 퇴각중에 우연히 맞닥뜨린 것일 뿐.
- 다케다가 멸망 원인은 전부 이녀석. 적인 노부나가도 "카츠요리는 바보 같은 아버지 때문에 정말 불쌍하게 되었다"고 말할 정도.
- 상대가 일부러 동맹을 신청해서 맺었는데도 불구하고 손바닥 뒤집듯이 동맹을 깨는 걸 모습은 너무 바보 같아서 옹호할 수가 없다.
- 자신이 사면초가일 때 노부나가에게 "제발 버리지 마. 네가 의지가 되니까"라고 애원했으면서, 노부나가가 사면초가에 빠지자 즉시 배반한 멋진 사고회로의 소유자.
- 처음부터 카이 22만석을 가지고 있어서 굉장히 유리하다.
- 처음부터 5천의 병력을 움직일 수 있기에 굉장히 유리하다.
- 시나노에서는 다이묘가 없었기에(호족뿐) 매우 유리하다.
- 기본적으로 역사 게임등이나 방송 등에서는 최강급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다테나 시마즈와 별반 다를게 없다.
- 마지막 서상작전도 실은 상락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걸로 밝혀지고 있다.
- 이에야스의 영지를 가로채고 있는 도중에도 노부나가에게 환심 편지를 보내거나 하고 있다. 물론 노부나가는 진짜 열받은 상태기 때문에 말 붙일 엄두도 못 냈다.
- 병약했다.
4.7 다케다 카츠요리 편
- "위대한 신겐, 바보 같은 카츠요리"는 엄청난 착각. 오히려 신겐이 바보.
- 나름대로 능력 있는 무장이었다.
- 신겐 탓에 후계자로서는 최악의 출발
- 마방책을 향해 돌격을 계속했다는 건 완전한 허구.
- 실책을 범한 것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 오다와의 화목을 모색했지만 사자는 노부나가에게 문전박대당했다. 물론 신겐 탓.
- 중앙집권화를 원망한 중신들이 다케다 멸망 후 책임을 카츠요리에게 떠넘겼다.
한 줄 요약: 이게 다 아버지 때문이다.
4.8 우에스기 겐신 편
- 사실은 여자가 아닐까 하는 말도 있다.
- 그 이상한 행동도 여자였다면 왠지 납득할 수 있는 것 뿐.
- 메뚜기 전법과 인신매매가 특기.
- 우에스기는 ㅇㅇ성을 약탈해 금 100과 병량 200을 얻었다...는 게임같은 짓을 실제로 한 무서운 다이묘.
- 10만 대군으로 호조를 공격했어도 니노마루(二の丸)도 없는 오다와라성을 떨어뜨리지 못했다.
- 영토확대의 욕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영토확대를 하지 못했던 것 뿐일지도 모른다.
- 최후에는 혼잡한 틈을 타서 호쿠리쿠 대부분을 손에 넣어 백만석의 대다이묘로.
- 오다가와의 국력차를 생각해 보면 어떻게 생각해 봐도 이길 수 없다.
- 테토리가와 전투는 노부나가를 물리친 것이 아니라 히데요시가 전선이탈해서 너덜너덜해진 카츠이에를 발라버린 것 뿐. 우에스기 측이 주장하는 정도로 큰 전투는 아니다.
- 그렇다기보다 정말로 있었나 하는 것도 미묘(있었다고도 해도 그것이 우에스기 겐신의 이름을 높여줄 정도로 컸던 전투는 아니다.)
4.9 이마가와가 편
-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매우 유능했다.
- 요시모토의 요시(義)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의 요시. 통자(通字)를 받고 있는 신겐과는 격이 다르다.(다케다 하루노부(武田晴信)의 하루(晴) 요시하루에서 따 왔다.)
- 사실 와카(和歌)는 서툴렀다.
- 이마가와 우지자네도 무능하지 않았다.
4.10 다테 마사무네 편
- 독안룡은 메이지 시대의 창작. 원래는 중국 무장[14]의 별명.
- 기마철포대는 정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있었다고 해도 그렇게 강했는지는….
- 일찍 가독을 상속하는 것은 당시에는 비교적 일반적이었다. 오다 노부타다는 19세,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20세 전후에 물려받고 있다.
4.11 호조가 편
- 호조 성을 사용한 것은 우지쓰나 때부터라고 한다.
- 흔히 호조 소운이라 불리는 초대는 떠돌이가 아니라 가족이 살해당한 쇼군이 보복으로서 이즈의 아시카가 차차마루를 죽여버리기 위해 파견한 막부 관료였다.
- 차차마루는 바로 살해된 것은 아니고 여러 다이묘와 함께 완고한 저항을 계속했다.
- 소운의 실적은 대부분 우지쓰나에서 빨아들여온 것.
- 우지야스가 한 가와고에 전투(1만 1천으로 6만의 군세를 깨뜨린 싸움)는 여러 설이 있지만 우에스기와 호조의 밸런스를 보는 한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전투로, 전국시대에 남을 멋진 전투.
- 우지야스, 쓰나시게, 우지시게, 우지마사 등은 농성만 했다.
위엔 뭔데 - 명군이 비교적 많은 집안.
4.12 모리가 편
- 고쿠진 연합맹주의 전형적인 예.
- 모리 료센(兩川)이라면 듣기는 좋지만 요컨대 모리 가문의 지배를 확립할 수 없었다는 증거. 오다 가와 기타바타케(北畠), 간베(神戸) 가와의 관계와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 이츠쿠시마의 전투는 날조가 심하다. 스에 군은 그 정도로 우세하지 않았고, 모토나리의 책략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무라카미 수군의 귀추가 전부였다.
- 모토나리가 평생 100회의 전투를 경험했다고? 어떻게 계산한 거야?
- 집안이 좋지 않아 모략이 많았기 때문에 인망은 미묘하다.
- 모토나리가 8개국의 영주라는 것은 영토가 조금밖에 없는 치쿠젠(筑前), 부젠(豊前)도 함께 카운트한 것.
- 좋게도 나쁘게도 모토나리의 유언에 휘둘렸다.
- 모리 테루모토는 총대장, 킷카와는 빈 도시락(空弁当),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배신. 천하도 노렸는데 영지는 대폭 감소. 모리 료센(笑).
4.13 시마즈가 편
- 외교 감각 제로
- 적의 수를 실제보다 많이 기록하는 데 있어 능가할 자가 없다.
- 오니(鬼)라 불리는 것에 비해 특기는 복병.
복병을 잘 다루니까 오니라 불린 게 아니라? - 두 부대로 협공하면 한 쪽이 궤멸. 이것이 어째서인지 츠리노부세(釣り野伏せ)[15]라 불리고 있다.
- 일부러 약한 부대를 적에게 부딪쳐 패주하는 리얼 츠리노부세.
- 세키가하라의 그것은 적중돌파가 아니라, 적중에 버림돌을 돌격시켜 시마즈 요시히로는 길을 벗어나 도망갔다.
- 2백년 이상 도쿠가와를 계속 원망했다.
4.14 불교 세력 편
- 스님은 무방비 상태가 아니다. 승병도 가득, 총도 가득.
- 기본적으로 권력자.
- 신자가 헌상해 주므로 매우 부유.
- 여인 출입 금지의 히에이잔에 어째서인지 여자가 있다.
- 종파가 다른 스님들 간에 전쟁할 때도 있다.
- 매우 넓은 부지를 가진 데다가 토루와 해자로 둘러싸인 것이 보통. 따라서 다이묘의 진지로 이용될 때가 많다.
4.15 혼노지의 변
- 흑막 따위는 없다.
- 미츠히데의 동기는 영지 빼앗긴 것, 어머니를 죽게 내버려 둔 것, "우리도 고생해서 카이를 (이하생략)", 물고기를 해자에 버렸다 등… 이런 것들은 모두 허구.
- 현재로서는 쵸소카베와의 외교 중단이 발단이라고도 한다.
- 히데요시가 "天が下なる"를 "천하를 지배하는(天が下知る)"로 개조했다.[16]
- 노부나가 뿐 아니라 오다 노부타다까지 죽어버린 것, 어린 산보시만에 어설프게 살아남은 게 오다 가로서는 뼈아팠다.
- 노부타다는 도망치려 생각했다면 확실히 도망갈 수 있었다. 도망치지 않은 것은 판단 미스.
- 혹시 노부타다가 살아남았다면 오다 가가 천하통일하여 히데요시의 천하는 없었을 거라 한다. 한 사람의 판단으로 역사가 바뀐 순간. 이에야스는 잘 생각해 주세요.
- 혼노지는 당시 절의 예외 없이 방비가 뛰어났고, 교토에도 소가마에가 있었다. 노부나가는 완전히 방심한 게 아니다.
- 여러 장수들이 다 나가 있어 노부나가가 소수의 병력으로 노부타다와 함께 있었고 미쓰히데가 근처에서 군을 이끌었다. 그 뿐만 아니라 노부타다가 교토에 가려고 한 것은 혼노지의 변 5일 전(5월 27일 서한), 미츠히데의 요리키 4명 전원이 모반에 동의했다는 것 등 매우 우연성이 강한 일이었다. "혼노지의 변이 없어도 노부나가는 언젠가 살해당했을 것이다" 같은 것은 착각.
- 혼노지의 변 전날에는 일식이 있었다. 이것도 미츠히데의 심리에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 여러가지 고려해도 미츠히데 측의 승산은 매우 희박하다. 이곳은 에도 시대부터 변치 않았다.
- ↑ 쿠루와(성곽 내부를 일정 구획으로 나눈 것)에서 '가장 바깥쪽 성곽'을 칭하는 말. 특히 호조 가문의 오다와라성이 잘 정비된 소가마에로 유명했다.
- ↑ 시장 좌석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릿세만 내면 자유롭게 영업을 하게 만든 일종의 자유시장 제도.
- ↑ 노부나가가 동생인 오다 노부카츠를 이긴 전투.
- ↑ 물론 이건 단지 성격이 나빠서 그런 건 아니다. 전임자의 평판이 국민들 사이에서 좋으면 후임자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이 되기 때문에 후임자 입장에선 어느 정도 전임자를 깎아내릴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전두환도 집권기 동안 사실상 전임자인 박정희에 대한 비판을 봐줬다.
- ↑ 말하자면 '참모'가 필요 없이 자신이 뛰어난 스타일의 리더.
- ↑ 원문은 種無し. 아이를 만드는 씨가 없다는 소리.
내가 고자라니! - ↑ 이에야스의 아버지 마츠다이라 히로타다는 가신에게 살해당했으며 뿐만 아니라 이에야스의 할아버지 키요야스도 가신에게 살해당했다.
- ↑ 에도시대 들어서 대표적으로 미카와모노가타리 같은 서적등에서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에 인질로 잡혀있었고 가신과 주군이 무슨 견우와 직녀마냥 떨어져 서로를 그리워하고 어쩌고 하는 신파극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돌았으나, 실상은 이에야스가 괴로운 인질생활은 커녕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히려 후견인인의 입장에서 이에야스를 돌바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질녀까지 시집보내고 젊었을 때의 스승이자 당시 이마가와 가문의 가로급이었던 타이겐 셋사이를 거의 가정교사급으로 붙여서 교육시켰고, 원복이후 자신의 본 영토로 돌아갔을 때에도 가신단과의 사이가 좋지않고 어린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않는 가신단에게 골치아파하며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대리인격으로 붙여둔 이마가와가문 직속신하에게 하소연하여서 일을 진행시켰다던가. 그리고 요시모토 사후 완전한 독립이후에 잇코잇키 발발로 미카와는 말그대로 반쪽이 나버렸고 혼다 마사노부같은 중신마저도 이에야스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을 정도. 이에야스가 가신단을 완전히 장악한 것을 이 잇코잇키 사건 이후로 보는 편이다.
- ↑ 물론 도쿠가와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는 것이 애초에 이마가와 가문은 이에야스의 보호를 빌미로 미카와를 모략으로 합병했기 때문이다. 개막장 센고쿠시대와 근대사를 일률적으로 비교하긴 뭐하지만 어른의 사정으로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고 황태자 이은에게 황족급 교육을 시킨 것과 유사하다.
- ↑ 고아가 부유한 집안에 입양되서 영재 교육을 받고 자란 격이며, 요시모토가 측근으로 기용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예상밖에 요시모토가 어이없이 죽자 이에야스는 자기 조상의 영지로 그대로 돌아가 뒤통수를 쳤다는 주장이다.
- ↑ 이에야스가
통수왕약속을 잘 깼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모양. 그런데 이런 행동은 전국시대에 딱히 이에야스만 했던 것도 아니다. - ↑ 과대사천왕 드립은 이 대목에서 나온 말인 듯.
- ↑ 사업할 때 빼도박도 못하는 상황에서 사업을 그만두면 망할 수밖에 없어서 적자를 내면서 호전되기를 기다리며 사업을 계속하는 것을 비유한 말로, 우리말로 돌려막기 정도로 볼 수 있다.
- ↑ 오대십국시대 이극용의 별명이다.
- ↑ 시마즈가의 전술을 일컫는 고유명사다. 한국어로 번역하기 조금 어려운데 굳이 번역하면 '유인매복전술' 정도?
- ↑ 아케치 미츠히데가 혼노지의 변 직전 읊었다는 "때는 지금 천하를 지배하는 5월이로다(時は今 天が下知る 五月哉)"라는 시는 사실 히데요시가 바꿔치기한 내용이라는 소리.
이건 뭐 야사 속 남이와 유자광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