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서울특별시 용산구 남이 사당에 있는 무신도(巫神圖)

南怡, 1441년~1468년 10월 27일

1 소개

여러모로 선조에게 숙청당한 김덕령, 송고종진회에게 끔살당한 남송악비와 비슷한 인물로 여겨졌으나... 실상은 정치에 서툴렀기에 쉽게 숙청당한 풋내기 다혈질 무장.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정치적으로 너무 미숙했고 경솔했던 탓에 한명회를 위시한 구공신들의 함정에 스스로 걸려든 꼴이 되었다고 평하고 있어 딱히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 거기다 하등 상관없는 강순을 물귀신 씌우는 병크를 터뜨렸으니 이 부분에서 남이를 까는 사람들도 제법 많다.

야사에는 남이를 질투한 유자광이 그의 시의 마지막 부분인 '남자 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男兒二十未平國)'에서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未平國)'이라는 부분을 '나라를 얻지 못하면(未得國)'으로 살짝 고쳐서 거짓으로 고변했다고 전해지지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는 한명회 등 원상대신들을 제거하려다가 반역죄로 처형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결과적으로 정치적 희생양이지만, 문제는 정치적으로 미숙한 탓에 신공신파들을 파멸로 이끈 인물이란 거다.

2 일생

2.1 최연소 병조판서

현재의 서울 종로구 연건동[1]에서 의산군 남빈의 아들로 태어난 남이는 태종의 진외증손자로 조선초기 국방 부문의 주목받는 유망주였다. 일반적으로는 외손자라 알려져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종의 4번째 딸의 손자[2][3]'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당시 권력자였던 권람의 딸과 결혼하였고, 세조 3년인 1457년에 무과에 장원급제하며 관직에 진출한다.[4]

북청전투에서 남이가 사력을 다해 싸우니 가는 곳 마다 적이 마구 쓰러졌다.(중략) 몸에 4,5개의 화살을 맞았으나 태연했다.[5]

ㅡ 《조선왕조실록》 세조 13년(1467년) 7월 14일

세조 시대에 동북면(함경도 일대)에서 터진 이시애의 난을 3개월만에 평정하는 등 크게 무용을 떨쳤고[6], 이시애의 난이 끝나자 말자 있었던 요동의 건주여진 토벌[7]에서 역시 강순과 함께 출전하여 공을 세우게 된다. 확실히 용력은 대단하긴 했던 모양으로 실록에도 "남이가 가는 곳마다 적이 쓰러졌다"는 기록이나 "몸에 화살을 대여섯 대 맞았음에도 태연히 웃으며 적과 싸웠다"는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결국 이런 저런 사정과 공적 등으로 세조의 재위 끝무렵이자 예종의 즉위년이었던 1468년, 27세란 이례적으로 젊은 나이에 병조판서에 임명되는 초고속 승진을 경험하며 조선의 미래를 이끌 젊은 정치가이자 무인으로 평가받았다.

2.2 유능한 무인에서 반역자로

그러나 예종은 즉위하자마자 선대왕인 세조의 측근중 한명이었던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한다. 이시애의 난의 주인공이었던 구성군, 강순등이 제거될때 지중추부사였던 한계희가 "형조판서 강희맹이 저에게 말하길 '남이의 사람 됨됨이가 군사를 이끌만하진 않다'고 하네요."라며 예종에게 알렸고 예종은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사실 남이는 정치적으로 적이 많았다. 자신과 같은 등용코스를 탄 종친 구성군 이준이 영의정에 올랐다는 사실에 열폭하는 등[8] 조정의 인사처리 과정이나 한명회, 신숙주 등 조정의 원로대신들에게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이들의 나이를 생각하자면 늙어죽을 때까지인 몇년 정도 기다리기만 해도 되었을 것을, 너무 과감하게 움직였던 것.[9] 특히 젊은 인사들은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예종의 시각에선 엄청나게 위협적인 세력이었다[10]. 거기다 유자광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한것도 남이였다고.[11]

거기다 나쁜일은 몰아서 온다고 병조참지였던 유자광이 예종 즉위전인 1468년 9월 2일에 출현한 혜성[12]을 보고 남이가 자신에게 한 말을 왕에게 전하며[13]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전했다.

오늘(10월 24일) 저녁에 남이가 저에게 찾아와 "오늘 혜성이 나타나서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너는 보았느냐"라고 하길래 보지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남이가 "이제 은하수 한가운데에 밝은 빛의 혜성이 있어서 주위의 별이 안보인다."라고 했고 제가 《강목(綱目)》이란 책을 펼쳐 혜성이 나타난 때를 찾아보니 그 책에 달린 주석에 "혜성이 희면 장군이 반역을 하고, 2년안에 큰 반란이 있다."라고 적혀있어 이를 남이에게 말하니 남이가 탄식하며 "그 일은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ㅡ 《조선왕조실록》예종 즉위년, 10월 24일 ##

그리고 여진출신의 무장이었던 겸사복 문호량의 증언이 결정타가 되었다. 그 후 예종은 그와 그를 따르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여 국문하기 시작한다. 남이는 국문 때 심한 고신을 당하는데 그때 얼마나 심했는지 다리가 부러질 정도였다고 한다.

정말로 이상한 것은 심문 때 나중에 자복하면서 전우이자 대선배 무장인 강순을 끌어들였다는 사실. 덕분에 강순 또한 애꿎게 사형당하고 말았으니, 이분이야 말로 늘그막에 진짜 안습.[14] 게다가 이분도 거열형 크리;;

여하간 강순은 남이의 국문 과정에서 자주 언급된다. 노비, 관련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이의 입에서 강순이 남이의 집에 드나들었다는 부분이 있는데, 강순은 곤장 몇대 맞자 말자 그대로 불어버려서(...) 이게 평소의 친목인지 아니면 물귀신인지 의심스럽게 한다.

야사에는 강순을 이 당시 영의정이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영의정을 끌어들였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강순은 이시애의 난 이후 우의정, 영의정을 거쳤으나 금방 물러났고 이 당시 영의정은 귀성군 이준[15]이었으며, 강순은 도로 오위도총관(수도방위사령관 격)에 물러앉아 있었다. 게다가 이준은 이 사건 이후 어마뜨거라 하고는 대뜸 물러나 버려서...

더욱이 강순은 이 당시 나이가 80을 바라보는 노인이었다.[16] 굳이 남이와 모의를 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17]. 정사에서도 강순이 매에 못 이겨 역모혐의를 시인하면서 남이를 향해 "내가 언제 너와 역적모의를 하였더냐?!"라고 쏘아붙이자 남이의 말이 압박이다.

"대감도 나와 함께 죽는 게 옳소. 대감께선 이미 정승이 되었고 나이도 늙었으니 후회는 없겠지만 내 나이 겨우 스물여덟이오. 진실로 애석할 따름이오!"

ㅡ 《조선왕조실록》 예종, 즉위년(1468년) 10월 27일

요약하면 "젊은 나는 혼자 죽기 억울하니 정승질까지 해본 노인장도 같이 저승 갑시다"바리에이션으로 "내가 잘못이 없는 줄 뻔히 아시는 분이 옆에서 보고도 왜 변론 한 마디 안 해주는 거요?"랄까가 되겠다. 과연 물귀신 이 말 자체도 어이없는 발언인데다 당시에는 연좌제가 있던 시절이라 반역죄로 처리되면 본인만 처벌받는게 아니라 그 가족도 죽거나 노비로 팔려가게 된다.[18]실제로 강순의 처첩과 자식들도 공신 집안의 노비로 분배되었으니 남이의 행동은 여러 사람들 인생을 망친 셈이다.

어쨌거나 젊은 청년이 거열형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그저 안습. 그의 아내가 세조 대의 공신 권람의 딸이었는데, 그와 결혼하게 된 사연을 전하는 야사에서 귀신쫓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니[19], 억울하게 죽었다는 당시 세간의 여론과 함께 신으로 모셔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20][21]

3 사후

남이의 모친은 역적의 여성가족이 겪는 노비 전락이나 자결, 혹은 교형이 아니라 남이와 같이 거열형으로 저자에서 사지가 찢긴다. 연좌제가 있던 시절이라도 직접적인 반역 모의자가 아닌 이에게 거열형 같은 극형을 내리지 않는 조선왕조의 형법상 너무나 잔혹한 처우인데. 표면상으로 내세운 죄목은 남이와의 근친상간 혐의.[22] 남이를 처형하려는 예종과 원로세력들의 적개심 때문에 붙은 혐의인지,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어떤 사건이 있는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 그런데 남이 모친에 대한 처벌은 남이나 강순과 같은 주역들과 같이 이뤄진 것이 아니라 공신 임명하기 등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불거져 나왔기에, 명분 더하기 작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350년이 흐른 뒤인 순조 때(1818년) 이르러 먼 후손 격인 남공철의 상소로 자신이 끌여들였던 강순과 함께 신원되었다. 그리고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9일 전인 융희 4년(1910년) 8월 20일에 충무(忠武)를 시호로 받았다.

4 트리비아

  • 짧은 집권으로 인해 공기화되기 일쑤인 예종의 집권기간 동안 일어난 큰 사건이라 "예종" 하면 "남이 죽인 놈" 이라는 인식이 있기도 하다. 실제로도 그렇긴 하지만.
  • 민간에서는 무용을 떨쳤던 장군이지만, 한 많은 장수라는 이미지+비극적으로 죽은 인물로 인식되어 무속인들이 신으로 모시기도 한다.
  • 비극적 삶을 살은 안타까운 무인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구전설화도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대표적인 설화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에는 호랑이를 잡아서 바위에 던져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 그의 이름을 따온 지명으로 남이섬이 있다.
  1. 현재도 남이장군 집터를 알리는 비석이 남아있다.
  2. 정확하게 언급하자면, 태종의 4녀 정선공주와 남휘가 결혼해서 태어난 것이 남이의 아버지인 남빈이다. 고로 남이는 태종의 진외증손자가 된다. 윤승운 화백의 만화 <겨레의 인걸 100인 1 - 한길을 걸은 명인들>에서도 이 점을 지적한 바 있다.
  3. 민간전승에 의하면 태종 이방원의 젊은시절과 상당히 닮았다고 한다.세조도 그랬던 거 같은데
  4. 남이의 무과 장원급제는 조선 역사 통틀어서 최연소 무과장원급제 기록이다.
  5. 참고로 이때 남이는 화살을 더 많이 맞았으나 화살로 인해 상처를 입은 것이 4~5발의 화살이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6. 물론 지휘관급이 그 혼자만은 아니었지만, 다른 장수들과 달리 대부분 선봉으로 직접 움직여서 공을 세운 케이스이다.
  7. 당시 명나라가 북원을 공략하느라 정신 없는 틈을 타서 건주여진의 추장 이만주가 요동을 공격했고, 이에 명나라의 요청으로 조선과 명군이 협공을 한 것을 말한다.
  8. 남이는 세조에게 대놓고 이준을 너무 싸고 돈다고 투덜거렸고, 이걸 들은 세조가 '이 자식이'하면서 남이를 파직시켜서 옥에 가뒀다가 하루만에 풀어주기도 했다.
  9. 물론 성종때 제거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기에 결과론적으로는 최악은 아니었을 수 있지만 당시에 예종이 죽을만한 별다른 징후가 없었다.
  10. 특히 남이는 예종에게 제대로 찍혀 있었다. 구성군 이준에 대해서도 수많은 이야기가 들어왔지만 예종은 최대한 넘어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남이는 예종이 즉위하자 말자 병조판서가 떨어지고, 역모 주장에 대해서 그야말로 과감하게 처리한다
  11. 남이와 유자광에 관한 이야기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6권 - 예종, 성종실록 참고.
  12. 이 혜성이 묘한게, 혜성 6일 이후인 9월 7일에 예종이 즉위했고, 9월 8일에 세조가 사망한다.
  13. 야사에서는 남이가 혜성을 보고 묵은 것이 가고 새 것이 온다고 한 혼잣말을 유자광이 일러바쳤다고 나오는데, 실록에는 남이가 유자광에게 직접 혜성 얘기를 하며 끌어들이려 했다고 한다.
  14. 강순은 강조의 후손으로 이미 신덕왕후(태조 이성계의 계비)가 죽은 뒤 1차 왕자의 난으로 어린시절 집안이 한번 날라가서 힘겹게 제주도함경도를 전전하며 자력으로 성공한 케이스였다.
  15. 조선 역사상 최연소 영의정이며 예종의 사촌에 해당한다. 세종대왕의 4남 임영대군의 아들이다.
  16. 1390년생인데 이때는 조선 건국 전이다!
  17. 남이가 물귀신을 하기 전에도 남이의 역모를 언급한 문효량도 강순을 언급한다. 하지만 이 때 강순은 '갑사로 시작하여 외람되게 성은을 입어 벼슬이 극품에 이르렀으며 또 공신이 되었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모반을 하겠습니까?'라고 주장했고, 예종도 이걸 받아들였었다. 솔직히 굉장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다
  18. 심지어 최악의 경우 외가쪽,친가쪽들 모두 씨를 말라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닌셈
  19. 남이가 하루는 길가에서 채반을 이고 지나가는 계집종을 봤는데 악귀가 채반을 올라타고 있었다. 악귀가 무슨 해꼬지를 할까 싶어 쫓아가니 계집종이 어느 저택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잠시 그 앞에서 기다리니 집에서 난리가 나는데, 계집종이 이고 온 채반에 든 감을 이 집 아가씨가 먹고서는 숨이 멈췄다는 것이다. 남이는 아가씨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내고 그녀와 결혼했다고 한다.
  20. 귀신을 쫓아낸 후 권람이 점쟁이를 불러다 혼인여부를 점치게 했는데, 남이의 사주가 흉하지만 딸의 수명이 짧아 남이의 불운을 보지는 않고 복만 누리다 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혼인시켰다는 뒷이야기도 전해진다. 참고로 야사에는 이 쫓겨난 귀신이 남이의 돌에 새겨진 시를 조작해서 처형되는데 이바지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21. 실제로 권람의 딸이자 남이의 정실은 권람이 세상을 떠난 그 해에 같이 세상을 떠났으며 이 때 남이의 처가 원래 권람의 딸이고, 공신에 권람의 친구인 한명회가 있다는 것을 재미있게 여긴 소설가들의 글에서는 권람의 딸이 한명회 집에서 노비 생활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하는 건 물론 역사적 오류.
  22. 남이의 모친이 처형된 죄목이 남이가 대역죄를 저지른 것, 선왕의 사망시 고기를 먹었던 죄, 그리고 근친상간이다. 그런데 이 때 처벌당한 '모친'은 친어머니일 가능성이 낮은 편이다. 남이 본인이 일단은 왕의 먼 친척이므로 아무리 명예를 실추시킨다고 해도 처벌 근거로 친어머니와의 근친상간 드립은 꺼내기 힘든 편. 때문에 만만한 서모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23. 윤승운 화백은 남이섬에 있는 것은 허묘(빈 무덤)이고 남이가 새남터에서 처형당한 뒤에 남양 홍씨(남이의 외가)들이 몰래 시신을 수습해서 뱃길로 화성 남전리에 모신 것으로 설명했다. 남이섬은 남이가 젊은 시절 무예를 익힌 인연이 있을 뿐이라고. 화성의 남이장군묘 부근에는 남양 홍씨 집성촌이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