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리


豊臣秀頼(풍신수뢰)
1593년 9월 8일 (음력 8월 3일) ~ 1615년 6월 4일 (음력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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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로 보면 히데요시보다는 외할아버지인 아자이 나가마사의 분위기와 더 비슷하다.

1 소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생모인 측실()이었던 요도도노(챠챠)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히로이마루. '주워온 아이'라는 뜻으로, 우리 식으로 하면 '업둥이'. 이름을 천하게 지으면 오래 산다고 하여 붙여졌다. 태어난 후 길거리에 버렸다가 다시 주워오는 행사를 치르기도 하였다. 요도도노 사이에 태어난 큰아들 도요토미 츠루마츠가 3살 때 병으로 죽고, 다시는 자식을 못가질 거라고 포기했던 히데요시가 56살의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 오래 살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후계자가 되었지만,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한 후, 어머니인 요도도노와 함께 21살의 젊은 나이로 자결했다.

2 생애

츠루마츠 사후 히데요시는 자포자기했는지 조카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히데요리가 태어나면서 히데츠구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반란을 핑계로 결국 숙청되었다. 단지 히데츠구 만이 아니고, 다른 양자도 다른 가문으로 보내졌다. 그 양자가 바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이다.

히데요시는 늦게 얻은 히데요리가 도요토미의 천하를 이어가기를 바랐는지 히데츠구의 딸과 약혼시키기도 했지만 결국 파혼시키고 1596년 성인식을 치른 뒤 히데요리의 보좌를 위해 오대로, 오봉행 등의 제도를 정비하고 히데요리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 센히메와 약혼시킨다.

그러나 이에야스가 야욕을 드러내고 마에다 토시이에가 사망하고 이시다 미츠나리가 실각하면서 도요토미 정권은 흔들리고, 결정적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미츠나리가 이끄는 서군이 패배하면서 결국 천하는 도쿠가와로 기운다. 덧붙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서 양군 모두 히데요리를 위한다는 명분을 기치로 삼았다.

세키가하라 이후 도요토미는 오사카 65만석의 다이묘로 전락한다. 가토 기요마사 등 히데요시의 유신들이 끝까지 히데요리를 보호하려 하였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1611년 교토니조 성에서 히데요리와 이에야스가 만나는데, 이때 장성한 히데요리를 보고 위험을 느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멸망을 결의했다고 한다. 교토의 백성들이 히데요리를 열렬히 환영했다. 이에야스도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해 보니까, 어머니 요도도노가 제대로 교육시켜서, 교양과 학식을 갖춰서 이에야스도 놀라고 칭찬하는 글을 남겼다.

현대에 발견된 히데요리 스무살 때의 초상화

1614년 호코지 종명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은 히데요시가 건립했던 호코지를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1614년 4월에 완성된 범종에 새겨진 문구 國家安康, 君臣豊樂(국가는 안전하고 건강하며 군신은 풍족하고 즐겁다)를 도쿠가와 측의 어용학자들인 하야시 라잔과 곤치인 스우덴은 첫째구에서 이에야스의 이름 家와 康을 나눈것은 이에야스를 쪼갠다는 뜻이고 둘째구를 거꾸로 읽으면 '즐겁게(樂) 도요토미(豊臣)가 임금(君)이 된다'라고 해석한 것이다. 도요토미가를 공격하기 위한 억지나 다름없는 해석이지만 이때에는 전국에서 이에 대해 항의를 하거나 중재를 하려는 다이묘가 한명도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처음부터 도요토미 가의 자손들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는 뜻.

결국 도쿠가와가 오사카 성을 공격하면서 오사카 겨울의 진이 시작된다. 원래 오사카 겨울의 진이 시작되기 전 히데요리는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모두 다 씹혔다. 이미 도쿠가와 치세가 안정기에 들어선데다 이에야스에 비해 히데요리는 군사적 재능이 없어 보인데다 어머니 요도도노에게 휘둘리는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일례로 호소카와 타다오키혼간지 켄뇨가 10년간 이시야마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저항했다는 이야기로 자신을 설득하는 히데요리측 사자에게 "니네 대장이 요도도노잖아."라며 씹었다.

하지만 오사카 성 자체의 방어력이 생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자랑할 정도로 엄청난데다가 사나다 유키무라 등 세키가하라 이후 낭인으로 전락한 이들[1]이 가세, 분투하여 전투는 오래 갔고, 도쿠가와 측에서 화의를 제의하면서 해자와 산노마루, 니노마루 등을 철거하는 것을 조건으로 일단 휴전이 되었다.

하지만 해자와 일부 건축물을 제거한 오사카 성은 방어력이 격감하여 그 당시의 사람들 말대로 평야 한복판에 엉성하게 만들어진 판잣집 신세가 되었다. 애초부터 이런 것을 노리고 화의를 한 도쿠가와측은 다시 전투준비를 진행했다. 이리하여 이듬해 6월에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이를 오사카 여름의 진이라 한다. 오사카 측에서는 분전했으나 6월 4일, 오사카 텐슈가쿠가 함락되면서 어머니 요도도노와 함께 자결. 카이샤쿠는 모리 카츠나가가 맡았다. 그외에 오오노 하루나가, 사나다 유키무라의 아들 다이스케, 카츠나가의 아들 카츠이에 등 수십 명이 함께 자결했다. 일설로는 여기서 죽지 않고 사츠마로 도주했다고도 한다. 가고시마에는 아직도 히데요리의 무덤이 있으며, 술을 마시며 행패를 부려서 마을 사람들이 괴로워했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그를 칭한 가짜라는 게 정설인데 술마시고 행패부리며 히데요리라고 한다면 도쿠가와 측에게 나 좀 죽여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뭐 당시에는 가고시마가 멀리 떨어진 시골동네라서 거기서 발광히던지 말던지 놔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3 후손

정실인 센히메와의 사이에 자식은 없었고, 측실 와기노카타(和期の方)[2]와의 사이에서 아들 쿠니마츠(8살)가 있었으나 오사카 전투 이후 교토에 숨어있는 곳이 발각되어 참수당했다. 일설에는 이때 처형된 것은 쵸소카베 모리치카의 아들이고 쿠니마츠는 사츠마로 도망갔다고 한다.

또 다른 측실 오이와노카타(小石の方, 나리타 씨)가 낳은 딸 나아히메는 센히메가 양녀로 삼아 조부 히데요시의 측실인 카이히메[3]가 키웠으며 결국 토우케이지에 출가한다. 에도 시대에는 엔키리데라(縁切寺)[4]라 하여 이혼을 원하는 아내가 절로 도망쳐 비구니가 되면 이혼이 성립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그녀의 출가로 이 제도가 정립되었다고 한다.

4 여담

어머니에게 휘둘린 유약한 도련님이라는 인상이 강한데, 아버지 히데요시가 150센치의 왜소한 몸집이었는데 반해 히데요리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거구였다고 한다. 신장 6척 5촌(약 188cm), 체중 43관(약 161kg).라는 기록이 있다.
이 정도면 지금 기준으로도 엄청난 거구고, 당시 일본의 기준[5]으로는 문자 그대로 거인이다. 다만 오다 가문이 키가 컸고, 어머니 요도도노(165cm)의 생모인 외할머니 오이치가 168cm, 외할아버지인 아자이 나가마사도 170cm 후반의 장신이기는 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1611년 니조성 회견 당시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만나고 그 외모에 압도되어 도요토미 토벌을 결의하였다고 보는 설이 있을 정도다. 물론 그냥 가설. 정설은 처음부터 도요토미가를 멸망시키려고 여러 다이묘를 숙청하고 압박하다가 때가 되자 손을 쓴 것이다. 즉 히데요리는 그냥 하타모토 등으로 몰락하지 않는 이상 죽지 않을 길이 아예 없었다.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마마자국이 심하게 남아있었다는 듯.

또한 히데요시는 무정자증이였고 실은 요도도노가 바람펴서 낳은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여자를 밝히기로 유명했고 또 정실인 네네 사이에서 자식이 없자 후계자를 낳기 위해 히데요시는 15명 이상의 측실을 두었는데 요도도노 외에 자식을 낳은 부인이 없었다. 히데요시가 오미국 나가하마 영주였을 때 10년만에 처음으로 맞이한 첫번째 첩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게 히데요시 사이에서 낳은 자식인지 데려온 자식인지는 불분명. 다른 측실들도 출산 경험이 있는 재혼녀가 5명이 있어서 그냥 기록만 봐서는 히데요시 씨없는 수박(무정자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에도 시대에는 히데요리는 씨다른 아들이라는 것이 통설이었다. 일단 친부 후보는 오오노 하루나가[6]이시다 미츠나리[7], 나고야 산자부로.

5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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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에서는 D급 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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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무쌍 시리즈에서는 게임에서는 클론 무장으로만 나오다가 애니메이션 TV판에서 최초로 등장했다. 성우는 오노 켄쇼. 상당한 꽃미남이자 사람을 이끄는 매력을 지닌 것으로 그려진다. 성격도 외유내강형이고 상황을 읽는 안목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에서 이시다 미츠나리를 물리친 일로 오사카 성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카이히메가 그를 방문하는 것으로 첫 등장한다. 히데요리는 이에야스도 도요토미의 가신이라면서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카이히메를 안심시킨다. 하지만 이에야스가 정이대장군에 오르자 "제법이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이후 교토 니조 성에서의 회담을 제의하러 온 사나다 노부유키를 주변 가신들이 흥분하는데도 그대로 돌려보낸다. 이 때까지만 해도 이에야스에게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듯. 그러나 사나다 유키무라마에다 케이지가 등장한 이후에는 사실상 도쿠가와 측과 전쟁하기로 결심을 굳힌 채 니조 성으로 찾아간다. 세키가하라 때는 이에야스에게 붙어 있던 가토 기요마사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돌아와 히데요리를 수행한다.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에도 성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고 히데요리는 이에야스가 오사카로 올 것을 역제안한다. 이때 히데타다가 사나다 유키무라의 행방을 묻지만 히데요리는 "사나다 유키무라를 자칭하는 낭인들이 수없이 많이 오사카 성내로 몰려들고 있다"고 일축한다. 이에야스는 그의 얼굴에서 히데요시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를 인정한 후 군대를 이끌고 오사카에 집결한다.

사나다 유키무라가 오사카 성을 위해 축조한 사나다마루 주둔군에 사나다 군의 붉은 갑옷과 육문전 깃발을 준 것은 히데요리의 생각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우에다 성에서 절대 열세의 상황에서도 도쿠가와 가문에 대항해 싸운 사나다 병사의 의기를 보여달라는 의미라고 독백한다. 오사카가 도도 다카토라의 포격을 받을 때도 천수를 끝까지 지키지만 이 때 침투해온 사나다 노부유키가 화의를 제의하자 성내의 어려운 상황을 보고 이를 수용한다. 하지만.... 결국은....

11화에서 도쿠가와는 제1성벽, 제2성벽을 무너트리고 해자까지 메워 오사카 성의 방어선을 유명무실하게 만든 후 재차 히데요리가 오사카 성을 떠날 것을 요구한다. 히데요리가 이를 거부하자 도쿠가와 군은 다시 군사를 이끌어 공격해 온다. 남은 장수들이 분전하지만 패색이 짙자 히데요리는 천수에 불을 붙여 자살한다.

4-2에선 투구를 써서 알아보기 힘들지만 애니메이션과 비슷한 조형으로 나왔다. 오사카 전투에서 결국 성이 넘어갈 상황이 되자 도요토미 가문을 살리기 위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죽음을 맞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유언으로 "도요토미 가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고 하는 등 애니와 마찬가지로 개념인으로 등장.

한편, 100만인의 전국무쌍에도 나온 바 있는데, 떡보에 바보로 그려져 있었다. 전국무쌍 애니와는 갭이 상당히 심하다.

효게모노에서는 거인 수준의 체구를 충실히 재현했다. 히데요시가 생전에 꾼 예지몽에서는 평범한 체구로 등장했는데, 후일 정식으로 등장하면서 그 위용을 자랑했다(...) 잔인하고 냉혹한 아버지, 격렬한 성품의 어머니와 전혀 닮지 않은 온후하고 도련님스러운 성격.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이 거구 때문에 회견하러 온 도쿠가와측 인사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1.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끝까지 지켜준 건 정작 그의 도요토미가 생전 우대하던 가신들이 아니라, 바로 밑바닥 인생들이었다. 심지어 도요토미가에 별다른 감정이 없는데도 그저 숙청에 휘말려 가문이 멸족된 뒤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원한으로 가담한 자들도 적지 않았을 정도. 이들 대부분은 항복을 거부하고 싸우다 죽었다.
  2. 이름은 이차(伊茶). 와타나베씨(渡氏).
  3. 전국무쌍의 그 카이히메 맞다.
  4. 해석하면 연을 끊는 절. 앞서 언급한 토우케이지도 엔키리데라로 유명하다.
  5. 식생활이나 영양상태가 괜찮았던 무장 클래스의 인물들도 유해나 갑옷을 분석해 보면 160cm를 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6. 하루나가의 모친이 요도도노의 유모였고, 하루나가 본인이 용모가 단정하기로 유명했다.
  7. NHK 다이카 '히데요시'에서는 대놓고 이쪽을 밀고 있다. 다만 실제 역사적인 근거는 희박한 것이, 히데요리의 출산 시점으로부터 요도도노가 히데요리를 잉태한 시점을 역산해볼때, 미츠나리는 그 시점에 조선에 파견나가 있었기에 시기가 맞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