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김유택(金裕宅) |
생년월일 | 1963년 10월 10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학교 | 명지고 - 중앙대 |
포지션 | 센터 |
신체 사이즈 | 197Cm[1], 86Kg |
실업입단 | 1987년 기아자동차 농구단 입단 |
소속팀 | 기아자동차/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1987~2000) |
국가대표팀 | 1983 홍콩 ABC[2] 1985 콸라룸푸르 ABC 1986 스페인 세계선수권 / 서울 아시안게임 1987 방콕 ABC 1988 서울 올림픽 1989 베이징 ABC 1990 아르헨티나 세계선수권 / 베이징 아시안게임 1991 고베 ABC 1993 자카르타 ABC 1994 캐나다 세계선수권 /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
수상내역 | 농구대잔치 MVP 1회 (96) 농구대잔치 베스트 5 6회 (88~93) KBL 우수 후보선수상 1회 (97)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은메달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동메달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은메달 FIBA 아시아선수권 준우승 4회 (85,87,89,91) / 3위 2회(83,93) |
감독 | 중앙대학교(2011~2014) |
종교 | 불교 |
울산 모비스 피버스 영구결번 |
No. 14 김유택 |
1995~1996 농구대잔치 MVP | |||||
허재(기아자동차) | → | 김유택(기아자동차) | → | 서장훈(연세대학교) |
1997 한국프로농구 최우수 후보선수상 | |||||
프로출범 | → | 김유택(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 → | 김용식(광주 나산 플라망스) |
1 개요
단일시즌 선수 효율성 지수 국내선수 중 역대 2위(31.73, 1997시즌)
한국의 농구 선수이자 지도자, 해설위원. 198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센터로 영리한 플레이와 기술로 기아자동차의 전성 시대를 이끈 주역이었다.
2 선수 생활
어렸을때부터 홀어머니 아래에서 성장해 농구라는 것은 잘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중학교 3학년 때 비로소 농구에 입문하게 되었다. 키는 컸지만 마른 체격에 농구도 갓 입문한 선수를 받아주는 학교는 선수가 부족한 신생팀. 창단한 지 3년 밖에 되지 않은 명지고에서 김유택을 받아주면서 농구 선수로서의 경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집안이 어려웠기 때문에 농구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기량이 빠르게 늘어 고교 졸업 무렵에는 고교에서 제일 가는 센터 자원으로 성장했다. 명지고 1학년 때부터 그를 눈독들어던 중앙대학교의 정봉섭 감독이 잽싸게 스카우트하면서 중앙대로 진학했고, 먼저 진학한 한기범과 함께 중앙대 전성 시대의 문을 열었다. 이 둘 가지고도 5관왕을 차지하면서 중앙대는 최고로 군림하기 시작했고, 후배인 허재, 강동희가 들어오면서 아예 농구대잔치에서 실업팀에 도전장을 내밀게 되었다.
졸업 후, 새로 생긴 기아자동차에 들어가서 중앙대 시절 함께 한 동료들과 호흡을 맞추며 기아자동차의 농구대잔치 5연패 및 7번의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한기범과 함께 골밑을 지키면서 국내 사상 최초의 더블 포스트, 고공 농구를 선보였고, 허재, 강동희와 함께 일명 허-동-택 트리오로 불리는 가공할 만한 조합을 이뤄 한 시대를 풍미했다. 물론 너무 강하다보니까 나태한 모습도 종종 보이기도 했지만, 고비 때는 또 팀의 가장 맏형이기도 했기 때문에 팀을 다잡는 역할도 했다. 딱 한 번 아래에 상술할 1989년에 있던 불미스러운 일 빼놓고 말이다. 대표적으로 1995-96 농구대잔치를 앞두고 기아도 한 물 갔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후배들과 함께 술로(...) 의기투합하면서 손가락에 바늘을 찔러 혈서도 쓰는 등 분위기를 다 잡은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 때문에 1995-96 농구대잔치에서 기아가 우승하자, 그 해 농구대잔치 MVP에 올랐다.
농구대잔치에서 통산 4,000득점과 2,500리바운드를 돌파하며 아마 무대에서는 정말 그의 선수 생활 막바지에 등장한 서장훈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적수가 없을 정도의 기량을 뽐냈다. 하지만 프로농구로 전환한 후에는 아무래도 나이도 30대 중반으로 접어들었고, 더 좋은 기량의 외국인 선수들이 영입되면서 그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식스맨으로 바뀌었다. 이미 농구대잔치 막바지의 기아 전성기의 주역은 허-동-택이 아니라 김유택 대신에 김영만이 들어와 허-동-만으로 변신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래도 기량은 어디 안 가서 짧게 나와도 자기 역할은 충실히 다 했다. 프로농구 원년 용병에 밀려 잠시 주춤하였으나 힘으로 하는 용병과 다르게 국내선수의 노련미와 기술을 따라올 수 없었다. 용병에게 의지하다가 막판 우승은 허동택 트리오의 노련미로 우승을 일궈낼 정도로 ... 원년 식스맨 상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노련미를 바탕으로 젊은 선수와도 충분히 잘 해낼 정도로 역대의 농구선수 중 하나였으니... 1997-98 챔피언결정전에는 외국인 선수 저스틴 피닉스의 부상 및 태업으로 인해 다른 외국인 선수인 클리프 리드와 함께 골밑을 지키며 대전 현대의 공세를 막아냈다. 이게 노장의 최후의 불꽃이었다.
그렇게 3년을 시간을 보내면서 플레잉코치로도 임명되어 활약하다가 2000년에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은퇴와 동시에 등번호 14번은 농구선수 최초의 영구결번되었고, 은퇴 경기도 가졌으니까 성대하게 은퇴한 셈인데, 그가 은퇴한 후 기아 농구단이 모비스로 이관되는 과정에서 그의 영구결번은 잊혀져 갔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영구결번 처리가 되어 있으나, 딱히 기념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김유택은 한 시대를 풍미한 센터였고, 한 시대를 완벽하게 지배한 선수였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일명 김유택은 센터의 교과서 라고도 한다
3 선수 스타일
실사판 성현준
늦게 시작한 농구였지만, 센스가 뛰어나서 금방 따라잡았다. 기본기에도 뛰어났고 특히 스텝은 오늘날의 선수들에 비해서 뒤질 것 없는, 아니 더 낫다는 평가를 받는다. 스텝과 피벗 동작을 활용해서 장신 선수들을 벗겨내고, 스피드를 이용해 한 발 더 빠르게 좋은 위치를 잡아 공격을 전개했다. 발이 장신 선수 치고는 빠른 편[3]이라서 속공에도 자주 가담하는 선수였고, 슛 레인지도 당시 센터치고는 넓어서 자유투 라인 인근에서의 미들 슛도 쏠쏠했고, 간간이 버저비터 3점 슛을 던져 성공시키기도 했다. 공격적인 기술이나 스킬은 정말 당대 최고였고, 스트레치 센터의 프로토타입으로 볼 수도 있겠다.
마른 체구라서 웨이트에서는 밀렸기 때문에 국제 대회에서 애를 먹은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를 탄력으로 극복했다. 그리고 늦게 시작한 농구에 더해 어려웠던 집안 사정 때문에 근성이 강하고, 성공해야 한다는 승부욕이 뛰어났던 선수다. 몸싸움에 강하다고 하기에는 체구가 말랐지만, 이 웨이트의 약점을 기술력으로 승부했다. 터닝슛이라든가, 스텝을 이용해서 상대를 제치고 넣는 레이업슛 같은 부분이 대표적이다. 어쩌면 농구의 기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 기본을 정확하게 제대로 구사하는 선수가 의외로 흔한 것이 아니다.
모든 당시 농구 관계자들이 평가하는 것처럼 힘보다는 영리함과 기술력으로 승부했던 선수였다. 여기에 근성과 승부욕이 겹치면서 당대 최고의 센터가 될 수 있었다. 늦게 시작한 농구 때문에 대학 시절 부정확했던 슛을 노력으로 극복했고, 작은 체구에도 다부진 승부욕으로 국제 무대에서 상대와 대등하게 맞서려고 애를 썼던 선수이기도 하다. 과거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센터의 역할이 스크린 걸기, 리바운드 잡기와 같은 부수적이고 궂은 일에 중점을 두었다면, 김유택의 등장 이후에는 센터와 골밑 플레이가 가장 쉬운 득점 루트이며, 공격의 기본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줬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4 국제 대회에서의 김유택
신동파 이후 대한민국 농구는 세계무대는 커녕 아시아에서도 단신팀이었고 이충희로 대표되는 슈터가 지휘하는 양궁농구 팀이었다. 때문에 대한민국 국가대표 주전 센터들은 국내에서의 이름값과 달리 국가대표 경기에서는 실력의 한계로 식물 센터로 전락하는 일이 잦았다. 김유택은 한기범과 함께, 신동파 이후 처음으로 국제대회에서 테크닉과 수비로 존재감을 드러냈던 대한민국의 주전 센터였다.
중국과의 경기에선 자신보다 큰 중국의 인사이더들을 특유의 피봇 플레이와 포스트업을 앞세운 공격력으로 제압해 버릴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돌아가며 튀어나오는 중국의 인사이더들을 상대할 선수가 부상을 달고 사는 한기범 아니면 김유택밖에 없었고, 결국 김유택이 파울 트러블이나 체력 저하에 빠지면 그 자리를 대체할 선수가 없었고 결국 한국 팀이 패배하게 되는 상황이 부지기수였다는 점.
1988년 올림픽에서도 세계의 장신 선수들을 상대로 투지 넘치는 플레이를 보였고, 마지막으로 전성기의 위력을 보였다고 할 수 있는 1990년 세계 선수권에선 스페인을 상대로 29점을 득점하는 힘을 보여줬다. 미국 상대로는 6점밖에 못 넣었지만.
5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에는 잘 풀렸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한기범이야 유전병[4]으로 인한 건강 문제 때문에 그랬다고 쳐도, 김유택이 후배인 허재나 강동희에 비해 감독으로서 자리를 잡는 것이 늦어진 것은 아쉬운 일. 아무래도 기아자동차와 모비스의 사실상의 단절[5]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모교인 명지고에서 코치로 지내고 이후 2005-06 시즌부터 2007-08 시즌까지 Xports에서 해설을 하다가 김남기 감독과 함께 국가대표팀 코치로 활약하면서 지도자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김남기 감독이 대구 오리온스의 감독으로 부임할 때, 코치로 같이 부임했다. 여기에서 한동안 정체되던 이동준의 성장을 이끌어 내면서 빅맨을 키우는데 괜찮은 지도력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받았다. 그러나 막장 오리온스 프런트가 2년 만에 김남기 감독 이하 코치진과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추일승을 새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결국 프로 무대에서는 물러나왔다. 항간에는 드래프트로 뽑힌 아들 최진수[6]와의 관계 때문이라는 설도 있었지만, 국가대표에서도 이미 한 번 호흡을 맞춘 적이 있기 때문에 그냥 오리온스의 막나가는 운영이라고 봐도 좋다.
2011년 중앙대학교의 감독으로 부임해서 대학농구 감독으로 처음 데뷔했다. 전임 김상준 감독이 입혀 놓은 바탕 위에 자신의 지도 철학을 입히면서 좋은성과를 이뤘다. 하지만 2012년에 장재석 등 09학번 5인방이 졸업한데다가 학교의 선수 스카웃이 대학지원이 예전만 못해 큰 전력 보강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2013년이 고비가 되었지만 김유택 감독만의 특유한 조직력으로 리빌딩되어 가능성 많은 대학농구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2014년 리그를 마친 뒤 양형석 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퇴임했다.
2015-16 시즌에는 SPOTV 해설위원으로 있었다. 10월 24일 KCC의 경기를 중계했는데, 경기 전 감독 인터뷰에서 추승균과 뻘쭘 썩소를 서로 연방 날리는 모습(...). 균형잡힌 해설, 차분한 해설을 추구하는 듯하다.
6 흑역사
기아자동차가 잘 나가던 시절에 워낙 견제가 심해서 충돌도 잦았다. 허재도 그렇고, 한기범도 그런 역사가 있었기에 김유택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본인의 회고대로 스크린 가면 주먹이 배로 들어오고, 중요 부위를 맞아 대굴대굴 구른 적도 많았다. 선배라서 참다참다 폭발해서 시비가 붙은 적도 많았다. 농구대잔치 결승전에서 임정명과 시비가 붙어 서로 한 대씩 때린 적도 있었고, 박수교와도 반말을 했다가 시비가 붙어서 눈을 공격당해 실명을 당할 뻔도 했었다. #자랑이랍시고 본인 입으로 말하는 박모씨[7] 참고로 둘 다 모두 김유택보다 선배다.
1990년, 간통혐의로 치소 된 적이 있었다.#
7 그 외
이혼을 한 번 했는데, 이혼하기 전에 아들 최진수(이혼 전 김진수)를 얻었었다. 최진수가 친아버지와 성씨가 다른 이유는 어머니가 재혼한 후 새아버지의 성씨를 따랐기 때문. 재혼 후 얻은 아들인 김진영 군[8] 역시 대를 이어 농구를 하고 있다. 2016년 기준 경복고 3학년이며 단대부중을 졸업했고 포지션은 가드. 역시 아버지를 닮아서인가 호리호리한 체격이 특징.- ↑ 실제 키는 맨발로 2m(!)이나, 둔탁해보이는 것 같다고(...) 197로 기재했다고 한다.
- ↑ 중앙대 1학년때 1년선배 한기범과 함께 처음 선발되었다.
- ↑ 전성기 때 100m를 12초 후반에 뛰었다고 한다.
- ↑ 마르판 증후군
- ↑ KBL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계승을 말하고 있지만, 모비스도 한때 기아자동차의 역사를 쓰지 않는 등, 사실상 단절된 것과 다름없다.
- ↑ 성씨가 다른 이유는 아래 그 외 항목 참조.
- ↑ 정작 박수교가 선수 은퇴후 현대 코치를 거쳐 기아 감독으로 부임하는 바람에 강제 화해;
- ↑ 법적으로는 관계 없지만 최진수의 이복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