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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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정재근(鄭再根)
생년월일1969년 7월 23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경상남도 고성군
출신학교마산고 - 연세대
포지션스몰 포워드
신체 사이즈191cm, 85kg
프로입단1992년 SBS 농구단 입단
소속팀안양 SBS 스타즈(1992~2000)
대전 현대 걸리버스/전주 KCC 이지스(2000~2005)
국가대표 경력1990 부에노스아이레스 세계선수권 - 15위/총 16팀 [1]
베이징 아시안게임 - 은메달
1991 고베 아시아선수권 - 2위
1993 자카르타 아시아선수권 - 3위
1994 토론토 세계선수권 - 13위/총 16팀 [2]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 은메달
1995 서울 아시아선수권 - 2위
1996 애틀랜타 올림픽 12위/총 12팀
1997 리야드 아시아선수권 - 우승[3]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 은메달
감독연세대학교(2011~2014)
2001~2002 한국프로농구 최우수 후보선수상
강 혁(수원 삼성 썬더스)정재근(전주 KCC 이지스)박규현(창원 LG 세이커스)

1 소개

단일시즌 PER 국내선수 중 역대 1위(33.04, 1997시즌)

대한민국의 전 농구 선수이자 현 지도자. 현역 시절 최고의 포워드로 명성을 날렸던 선수다. 현역 시절 별명은 저승사자. 전 연세대학교 농구부 감독이다.

2 선수 경력

농촌인 경상남도 고성군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보낸 후, 마산고등학교에 진학해서야 비로소 농구를 시작했다. 상당히 늦게 출발했지만 성장 속도가 빨라 각 대학의 주목을 받았고 결국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막 감독직을 맡았던 최희암 당시 연세대학교 감독이 엄청 공을 들여 스카우트한 선수라고 한다. 연세대학교에서 대학 최고의 포워드로 활약하며 동기 이상범, 후배 오성식, 문경은, 김재훈, 이상민 등과 함께 연세대학교 전성기의 막을 열었다. 졸업 당시 현대전자행이 거의 확정적이었으나 새로 창단한 SBS의 지원 차원에서 SBS의 창단 멤버로 실업 무대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실업 무대에서도 뛰어난 포워드로 인정받았다. 당시 어설프게나마 덩크슛을 시도한 포워드기도 했고, 서장훈을 앞에 두고 이를 실현하기도 했다. 상무 복무 시절인 1993-1994 농구대잔치에서는 상무를 결승까지 올려 놓았지만, 당시 엄청난 인기와 실력을 자랑하며 돌풍을 일으킨 모교 연세대학교에게 1승 3패로 지면서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제대 후 SBS로 돌아와 정상급 포워드로 군림했다.

프로 출범 후에도 활약은 이어졌는데, 프로 원년인 1997 시즌에 평균 21.1점을 넣으면서 그 해 베스트 5에 선정되었다. 이후에는 외국인 선수들의 활용이 본격적으로 늘면서 약간 활약이 줄었지만, 1997-98 시즌과 1998-99 시즌 모두 각각 평균 15점 이상을 넣으며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하지만, 1999-2000 시즌에 부상과 슬럼프에 빠지며 평균 두 자리 수 득점에 실패했고, 결국 재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팀의 사정과 재기를 위해 다른 팀에서 기회를 얻고 싶던 정재근의 사정이 맞물려 김재훈과 1:1 트레이드 형식으로 대전 현대로 이적하게 되었다.돌고 돌아 현대로

마침 이 당시 현대는 신선우 감독의 지휘 아래 포워드들이 주축이 되어 모두 달리고 1:1을 구사하는 이른바 토털 바스켓볼을 구사하던 시점이었고, 괜찮은 포워드인 정재근의 합류로 포워드 층은 더 두터워졌다. 팀의 믿음 아래 정재근은 2000-01 시즌 두 자리 수 득점을 올리며 부활했고, 2001-02 시즌에는 식스맨으로 좋은 활약을 보이며 식스맨상을 수상했다. 그 뒤로도 꾸준히 식스맨으로 활약하며, 괜찮은 활약을 보리며 플레잉코치를 역임하기도 했다.

3 지도자 경력

2005년을 끝으로 은퇴해서 전주 KCC 이지스의 코치와 모교인 연세대학교의 코치를 거쳐 2011년 말 연세대학교 농구부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은퇴 후 2007년까지 KCC에서 코치 생활을 했고 이후 모교인 연세대학교로 옮겨 코치로 일하다가 2011년 11월 15일 모교인 연세대학교의 감독으로 선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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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감독으로 재임 중인 2014년, 제1회 아시아 퍼시픽 대학농구에서 고려대학교와의 결승전을 치루던 도중, 앞서고 있다가 4쿼터에 동점을 허용하자 작전 타임 와중에 연세대학교 선수들에게 쌍욕을 퍼붓는 장면이 KBS의 중계를 타고 고스란히 생방송되었다. 나중에는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연장전에서 심판 판정에 항의하며 가격하려하다가 밀치고 박치기하는 병크를 터뜨렸다.[4] 결국 테크니컬 파울로 퇴장을 선언받았으나 코트에서 한동안 나가지 않고 또다시 쌍욕을 퍼부었다.(...) 그 바람에 고려대학교가 테크니컬 파울로 인해 자유투 4득점을 했으며, 결국 대회는 라이벌 고려대학교가 87-80으로 우승하면서 종료. 참고기사 다른 참고기사(동영상포함)
그 뒤 모교의 감독직에서 자진 사퇴하였으며, 연세대학교에서는 자체적으로 직무 정지 처분을 내렸다. #
이후 농구협회에서 열린 상벌위원회에서 5년 자격정지 처분의 징계를 받아 은희석에게 감독직을 넘기게 됐다.## 그리고 고연전 방송제의 필수요소가 되었다

실력은 정말 빼어났고, 사생활도 깔끔했지만, 코트 외적인 폭력 사건에 휘말린 게 많았다는 흠이 아쉬운 선수다.

4 기타

흑역사가 상당히 많은 선수다. 저승사자라는 별명답게 코트에서도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여준 선수지만, 다혈질적인 성격 탓인지 사고도 은근히 많이 쳤다. 대학 시절에는 중앙대학교와의 시합 도중에 상대 선수를 가격했다가 중징계를 먹은 적이 있고,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선수와는 국군체육부대에서는 말년 병장과 신병으로, 프로농구 S본부에서는 코치와 선수로 한솥밥을 먹었다.1996 애틀랜타 올림픽 도중 음주 파동으로 3개월 자격 정지, 1997-98 시즌 SBS와 나래의 경기 도중에 제이슨 윌리포드와 시비가 붙으면서 프로농구 사상 최초의 난투극의 빌미를 제공했던 것,[5] 마지막으로 2002-03 시즌 도중에 서울 삼성 썬더스 소속인 박성훈의 턱을 가격해 중상을 입힌 사건으로 2경기 출장정지 징계를 먹은 사건까지.

아들은 경복고등학교에서 농구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 포지션은 슈팅가드.
  1. 연세대 3학년 때 첫 선발.
  2. 고려대 1학년 때 처음 선발되었다.
  3. 현주엽, 서장훈의 부상으로 인해 전희철과 단 둘이서 포스트를 지켜내며 18년만의 우승을 이끈다.
  4. 연대의 모 선수가 파울이 아니라면 놓칠 수 없는 이지샷을 놓치는 바람에 파울로 오해했던 측면도 있다. 이 선수는 몇 달 뒤 결승전에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논개or감독킬러
  5. 이 때는 사실 윌리포드가 먼저 밀쳤지만, 정재근의 수비도 거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