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퍼슨 데이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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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erson Finis Davis (1808년 6월 3일 - 1889년 11월 6일)

1 개요

남북전쟁 동안 남부연맹(CSA; Confederated States of America)[1]대통령(1861년- 1865년)[2]을 지내 결국 남부연맹의 유일한 대통령이 된 인물.

1.1 생애, 군생활

데이비스는 10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영국 웨일스 주서 할아버지와 같이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데이비스의 할아버지는 미국 독립전쟁 때 참전한 경험이 있으며 또한 그 할아버지의 3형제도 같이 참전하였다. 이로 인해 여러모로 군대 가족 양상을 띄고 있었는데, 앤드루 잭슨 지휘 아래 뉴올리언스 전투를 치른 적도 있다.

데이비스의 어린 시절, 데이비스의 가족은 2번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처음은 루이지애나 주의 메리 패리시(Mary Parish)란 곳에, 1년 뒤 미시시피 주의 우드빌(Woodville)이란 마을 근처에 윌킨슨(Wilkinson)으로 이사를 갔다. 1813년, 데이비스는 그의 남매와 통나무 오두막집으로 된 학교를 다녔으며 2년 뒤 데이비스는 켄터키 주 워싱턴 마을의 한 가톨릭 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그 후 미시시피주의 워싱턴 시의 제퍼슨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고 그 후 켄터키 주의 트랜실베니아 대학교에 편입하게 된다. 그 후 데이비스는 미국 사관학교에 들어가게 되고 미국 사관학교서 4년간 과정을 마친 뒤 소위로 임관한다.

데이비스는 위스콘신 주의 크로퍼드(Crawford) 항구에서 제 1 중대로 배치되었고 항구의 감독관 노릇이나 하게 된다. 같은 해 또 타 항구에 배치가 되었지만 여러모로 안습하여 폐렴에 걸려 원래 있던 크로퍼드 항구로 다시 가게 된다. 같은 해 여전히 자기네 땅을 달라고 외치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물리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여하간 이렇게 일리노이까지 전국 각지를 떠돌며 일하게 된 고달픈 인생이었다.

1.2 결혼, 플랜테이션 생활, 초기 정치적 입장

데이비스는 세라 녹스 테일러(Sarah Knox Taylor)란 여자랑 사랑에 빠지게 됐지만, 굉장한 딸내미바보였던 예비장인 겸 상관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3]가 "이 결혼은 못 하네!"라고 하자 데이비스는 모든 일을 때려치고 결국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하지면 이 결혼도 3개월 후 그녀의 죽음으로 흑역사가 돼버린다. 뭐 재커리 테일러도 급사하지만

데이비스는 아내와 사별 후 1836년 다시 미시시피에 있는 브리어필드 플레테이션 지구로 가게 되고 다음 8년 동안 쓸쓸히 정부와 역사에 대해 공부하면서 곧 그의 형제인 조지프와 같은 정치적 양상을 띄게 된다.

곧, 1844년 하원으로 진출하게 되고 뉴저지의 정치인인 리처드 호웰의 손녀와 결혼(재혼)하게 된다. 이제 좀 뭔가 나아지나 했지만, 그의 자식 6자매들 중 오직 한 명만 살아남게 된다.[4]

1.3 2번째 군대 생활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이 일어나자 데이비스는 역으로 이젠 정치권에서 물러나 지원병으로 지원하게 된다. 6월 21일 뉴올리언스에서 텍사스 해로 항해한 뒤 그가 담당한 중대의 전투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여러 훈련을 맡게 된다. 그 후 전투에 참여해, 1846년 9월 몬터레이(Monterrey)를 성공적으로 점령한다.

1847년 2월 22일 데이비스는 부에나 비스타(Buena Vista)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나 발에 반샷(...)을 맞아 이제 꿈도 뭐도 없는 상황이 될 뻔하지만 동료에게 구출되는데, 여기서 그의 상관이자 옛 장인인 재커리 테일러는 '나보다는 죽은 내 딸이 사람보는 눈이 있었다'고 하며 이 전투에서 보여준 데이비스의 용기를 칭찬한다.

1847년 5월 17일, 제임스 K. 포크 대통령은 데이비스에게 연방 준장의 계급을 수여하게 되지만, 그는 거절하면서 "미국 헌법은 주들에게 각 장관을 명할만한 힘을 줘야 한다. 연방을 위한 게 아니다."라고 외치고는 남부지지 측으로 점점 기울게 된다.

1.4 다시 정치로 가다

그의 전쟁에서의 능력이 높게 평가받아 데이비스는 미시시피 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된다. 하지만 이후 경력은 역시 안습하여 그냥 한 상원의원의 땜빵으로 겨우 반 년 동안 해먹었다. 과학 지식의 보급 향상을 위하여 1846년 워싱턴 D.C.에 창립된 스미소니언 학술 협회 평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이 협회는 이후 유명한 스미소니언 박물관으로 발전한다.

데이비스는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5]에서 멕시코 북동부를 흡수하는 안건에 수정안을 내기도 하였다. 데이비스는 민사업무의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고 기간이 만료된 다음에 다시 뽑히기도 하였는데, 이것도 미시시피주가 돌아가는 꼴에 반대하여 1년도 안하고 사임하였다.

그제껏 정치 면에서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한 데이비스는 이 무렵 드디어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주의 권리를 주장하는 집회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185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피어스를 위해 선거활동을 벌였다. 결국 그가 응원한 프랭클린 피어스가 선거에 승하자 피어스 대통령은 그를 서기관으로 임명하였다. 서기관 기간이 피어스의 기간과 같이 끝나며 다시 상원의원으로 진출하였다.

하지만 계속 안습한 상황에 시달리게 되는데 상원의원 복무 당시 실명한 그의 왼쪽눈으로 인해 상원의원의 자리가 위태롭게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명목상의 상원의원직을 수행하여 보스턴 근처에서 남부연방분리 반대입장을 펼치고 있었으며 북부에서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었지만, 각 주가 너무 강력하고 분리 못할게 없다 식으로 나가자 결국 지지하게 되었다.

데이비스는 남부의 힘은 매우 강하며 ,그들이 연방에서 나올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연설하였는데, 북부가 남부가 그냥 분리되도록 놔두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남부는 전쟁이 터지면 군비가 부족하고, 해군의 자위도 못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결국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상황이 악화되면서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가 11월 20일 연방에 탈퇴를 선언, 그 후 1월 9일 미시시피 주도 연방을 탈퇴한다. 데이비스는 이 사실을 듣자 결국 상원의원직을 사퇴, 미시시피로 돌아갔다.

1.5 남부동맹의 대통령으로

그 후 그는 남부의 임시 대통령에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데이비스는 북부의 연방 정부에 남부 지역에 존재하는 연방 재산과 기존 국가 채무에서 남부의 빚을 지불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오히려 북부로부터 탈퇴를 취소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병합하겠다는 경고만 받는다. 이후 남군이 섬터 요새를 공격함으로서 남북전쟁이 발발한다. 전쟁 발발 직후 버지니아 등의 또다른 남부주들이 남부연합에 가담하게 되자 1861년 11월 그는 정식으로 남부의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직무 도중 데이비스는 압도적인 인구와 공업화로 먼치킨이 돼버린 북부를 이길 만한 전략을 짜느라 상당히 고생했다. 하지만 그의 똥고집[6]과 자신의 잘못을 인정 안하는 성격 때문에 의회나 주지사들과 심하게 대립했고 아랫 사람들도 고생을 더럽게 많이 했다. 데이비스는 남부연합의 자원, 약점 등을 평가한 후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방어전 위주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7] 때로는 과감하게 공격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결과는 망했어요. 거기다 인사 문제도 그의 골치를 썩혔는데, 앞서 말했듯이 각 주의 권리가 강한 상태였기에 자주 각료가 교체되었다. 각 주가 단합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제각각으로 놀다 보니 승리는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편협함도 너무 심해서 병사들과 정치가들을 상대로는 연설을 했지만 일반 국민들은 무시했는데 그 결과 국민들의 에너지를 결집시키고 남부 민족주의를 고취시켜서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다. 이러다보니 남부의 서민들은 대통령이 돈있고 힘있는 자들에게만 특혜를 준다고 여겨 그를 혐오하게 되었다. 데이비스는 대통령 연설 때 감동적인 언변으로 사람들을 선동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운명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달라고만 요구했다. 2달에 걸친 전국순회여행을 제외하면 그는 수도인 리치먼드에 틀어박혀서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남부인들은 그에 대한 긍정적인 정보를 알지 못했다. 결국 1863년 4월에 식량부족으로 리치먼드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빈민들이 식량을 찾아서 상점들을 약탈했으므로 데이비스는 무력으로 이들을 진압하고 질서를 회복해야 했다.

그러다 마침내 게티스버그 전투와 빅스버그 전투에서 개발리면서 남부의 패배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1865년 4월 3일 율리시스 그랜트가 이끄는 연방군이 남부연합의 수도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최후의 공격을 가해 도시를 함락시켰다. 이때 데이비스는 도망쳤으나 이내 연방군에게 붙잡히고 만다. 포로가 된 상태에서 로버트 리의 항복 편지를 받아든 그는 1865년 5월 5일에 항복하였으며 남부동맹이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음을 선언했다.

이후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같은 해 5월 19일 수감되었지만, 그래도 3년만에 석방되었고[8] 제법 능력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되어 이후 공무원으로서 관청에서 일하게 되었다. 남부에선 영웅 대접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 인지도는 있는 사람. 그의 장례식은 남부에서 전직 대통령답게 꽤나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1.6 평가

나름대로 능력도 있었지만 처해진 환경이 불운의 연속인 인물이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성사된 일이 별로 없었다. 남부 분리라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고, 그나마 남부의 명목상 통수권자로서 남부의 승리를 위해 노력했지만, 당시 남부가 처해진 현실은 그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데이비스의 독선적이고 편협한 성격과 병크는 가뜩이나 좋지 않은 남부의 사정을 더 악화시켜 남부의 패배를 앞당기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 혹은 남부 맹방. 남북전쟁서 남부 동맹의 11개 주.
  2. 참고로 임기는 6년이었다고 한다.
  3. 미국 12대 대통령(1784~1850, 대통령 임기는 1849~1850)이자 장군. 군대에서 40년을 복무한 역전용사였고, 미국-멕시코 전쟁 때는 몬터레이와 팔로 알토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휘그당에서 선출됐다.
  4. 거의 젊은 나이거나 유아일 때 사망했다. 사실 이 시대에는 이런 요절이 흔했다.
  5. 멕시코와의 종전조약. 이 조약의 결과 멕시코는 현재의 캘리포니아유타, 네바다 주 전체, 뉴멕시코, 애리조나, 콜로라도 주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영토를 넘겨주었다. 또한 독립 및 할양을 인정하지 않았던 텍사스 주를 인정하고, 국경을 리오 그란데 강으로 정했다. 그 결과 멕시코는 전쟁 전 영토의 55%를 상실했으며, 그 대신 미국은 멕시코에게 1,500만 달러를 지불하고 멕시코가 미국에게 지고 있던 부채 325만 달러를 탕감했다. 그래봐야 껌값
  6. 대표적인 피해자로 조지프 존스턴 장군이 있다. 존스턴이 남부연합에 투신한 장군들 중에서 가장 계급이 높았는데도 불구하고, 데이비스가 자신보다 어리거나 경력이 짧은 장군들이 말 잘듣는다고 그들에게 높은 계급장을 달아주는 바람에 존스턴과 전쟁 내내 서로 욕하고 싸우게 된다(리 장군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 개인적인 악감정은 존스턴이 애틀랜타로 서서히 후퇴하면서도 셔먼의 군대를 우월한 교환비로 계속 이겨나던걸 못 참고 후드를 임명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리고 후드는 존스턴이 이끌던 테네시 군을 제대로 말아먹고 애틀랜타를 사수하기는 커녕 불태우고 후퇴하는 추태를 보인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데이비스는 후드를 재신임하고, 다시 후드가 프랭클린-내슈빌 전투에서 테네시 군을 재기불능으로 완전히 말아먹은 뒤에도 끝까지 존스턴을 재임명하지 않는 뒷끝을 보인다. 결국 존스턴을 종전 거의 직전에 재임명(...).
  7. 당시 남부는 공업을 비롯한 전쟁에 필수적인 물자 수송이 북부에 한참 처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8. 다시 말하지만 반역죄였는데도 빵에서 3년만 산 것이다. 이는 북부가 전후 처리에 매우 관대했다는 증거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