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ert Edward Lee[1]
1807년 01월 19일 ~ 1870년 10월 12일
1863년 남북전쟁 중의 사진 |
1 소개
남북전쟁 때 불리한 상황의 남군을 이끌고 북군을 3년간 괴롭힌 남부 육군의 명장. 남북전쟁 당시 북버지니아군 사령관, 종전 직전에는 남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남북전쟁에서 남군은 순전히 그의 능력과 인품만으로 버텼다고 봐도 될 정도로 뛰어난 명장이었고 공격적이고 과격한 성향의 인물이 많았던 남군측에서 보기 드문 온건하고 유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실제 능력 측면에선 탁월한 인품에 비해 전략적 판단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지나치게 전술적 국면에 치중한다는 분석이 이후에 대두되었다. 또한 명확한 작전목적(적 야전군 격파, 도시 공략, 보급물자 강탈 등)을 잘 알려주지 않는 경향이 있어 이게 부하 장군들 사이에 혼란을 일으켰고, 더불어 현대전에 대한 이해가 다소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하는 분석도 있다. 다만 전략적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것도 리가 남군 전체를 지휘할 수 있는 포스트에 있어본 적이 없는 이상 확실하게 입증된 것은 아니다.
2 생애
2.1 군복을 입다
32살의 공병 중위시절 초상화 |
버지니아 주 렉싱턴 출생. 아버지는 독립전쟁에서 활약한 육군 기병대장이었고, 그 자신도 1829년 웨스트포인트를 차석으로 졸업하며 당시 웨스트포인트 우수 졸업생들의 전통을 따라 육군 공병소위로 임관하여 일선 근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2]
1850년대. 텍사스에서 근무하던 중령 시절 |
그 뒤 1846년부터 멕시코와의 전쟁에 종군하며 참모로서도 많은 공을 세웠고, 이후 웨스트포인트 교장직을 맡기도 했다. 미군(정확히는 연방 육군)에서의 최종 계급은 대령이나, 보직은 중령 시기에 맡았던 제2기병연대 부연대장직이 마지막. 이는 남북전쟁 직전의 혼란과, 아내가 갑자기 많은 부동산을 유산으로 물려받게 되면서 이를 관리하기 위해 1858년부터 1860년까지 안식년을 얻어서 고향에서 농장을 경영했기 때문이다.[3]
1859년에는 그 유명한 '존 브라운의 난'을 진압한 적도 있다. 과격 반노예주의자였던 존 브라운이 노예들을 해방시킬 목적으로[4] 연방 육군의 무기 창고를 습격해 점령한 사건으로, 이때 로버트 리는 연방 해병대와 민병대를 이끌고 브라운 일행을 공격, 소탕하고 존 브라운을 체포한 것이다.[5]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대령으로 진급한 리는 연방정부의 명령에 따라 개인 자격으로 워싱턴으로 복귀, 무보직 상태로 대기했다. 본래 리는 백인의 도덕심을 해친다는 이유로 노예제도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데다 고향 버지니아의 연방 탈퇴도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어 연방정부의 편이라는 인식이 많았다. 이 덕분에 총사령관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 소장의 추천으로 미합중국 육군(북군)의 사령관 후보자로 올라있는 상태였다. 이 시점에서 리는 남부의 독립에 대해 확고한 반대 의사를 밝히고 있었으나, 1861년 4월 섬터 요새에서 연방군과 남군의 최초 무력충돌이 벌어지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연방정부가 반란진압을 위한 의용군을 편성하자 연방정부에 등을 돌렸다. 이 시점에서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그를 지목하여 임시소장계급과 함께 반란진압 총사령관 직책을 제안했으나, 고향에 총을 들이댈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고향인 버지니아로 돌아갔다. 버지니아가 중립으로 남거나 연방에 가담하면 연방군에 복귀할 의사가 있었던 것 같으나, 정작 버지니아는 그가 사령관직을 거부한 바로 그날 주지사가 연방에서 탈퇴를 선언하고 남부연합에 가담했다.
2.2 남북전쟁의 총사령관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리는 처음엔 버지니아주 시민군 사령관으로 취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의 특명으로 준장이 되어 국방부 내근직 근무를 시작했다. 이후 1862년 반도 전역에서 북버지니아군 사령관이자 웨스트포인트 동기인 조지프 존스턴 장군이 페어오크스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그 뒤를 잇게 된다. 북버지니아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리는 짧은 준비를 거쳐 전면 반격으로 이행, 남부 수도 리치먼드 지척까지 접근해 있던 맥클레런 휘하의 북군 10만여 명을 그 절반 남짓한 병력만으로 7일에 걸친 지속적인 공세 끝에 몰아내어 명성을 얻었다. 7일 전투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남군은 북군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으나 북군의 전투의지를 결정적으로 분쇄, 이후 리치먼드는 2년 동안 더 이상 북군으로부터 일절 위협을 받지 않게 되었다.[6]
남군은 북군에 비해 항상 보급과 병력이 열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가 지휘하는 북버지니아군은 의표를 찌르는 기습과 교묘하고 과감한 병력운용 및 기동으로 북군을 끊임없이 괴롭히면서 불리한 전황에서도 3년이나 싸웠다. 그 와중에 두 차례에 걸쳐 북부 침입을 감행했지만 각각 앤티텀 전투와 게티스버그 전투의 패배로 인해 좌절되었다.[7] 사실상 북버지니아군 전력의 50%를 잃은 게티스버그 전투 직후 리는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남부연합 대통령 데이비스를 찾아가 사임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그 없이는 전선을 유지할 능력자도 없었던 탓에 결국 직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서 다음해인 1864년, 서부에서 리 이상으로 적극적인 전투를 구사해 명성을 떨친 율리시스 S. 그랜트가 북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압도적인 물량에 기반한 강력한 공세를 펼치자 리의 능력으로도 한계가 찾아오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리는 북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그랜트를 상대로 전술적으로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혔다. 그랜트 역시 서부전선에서의 활약을 비롯해 빼어난 전술적인 능력으로 유명한 장군이지만, 리와 사상자 수로 비교하면 차이가 엄청나다.[8] 피터스버그에 틀어박히기 직전 1864년 5월 초에서 6월 초 사이에 리는 그랜트가 이끄는 북군과 큰 전투를 3번 치렀는데, 대략 6만의 병력으로 10만을 살짝 웃도는 북군에 맞서길 3번 반복했다.[9] 이 3번의 전투를 통틀어 남군은 약 2만 6천의 사상자를, 북군은 4만 8천 가량의 사상자를 냈다. 절반 조금 넘는 병력으로 싸웠으면서 사상자는 오히려 북군이 남군의 2배 가량이었다는 말이다.
다만 그랜트는 그런 상황에서도 북부의 우월한 물량을 기반으로 뚝심있게 버티면서 물고 늘어졌다. 전투의 손실면에선 더 컸는데도 불구하고 퇴각하지 않으면서 남군을 우회하여 계속 남진해서 몰아붙인 것. 결국 리가 그랜트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면서도 그랜트가 지휘하는 포토맥군의 리치먼드를 향한 기동을 차단하는 것이 한계였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장기였던 기동전을 포기하고 리치먼드 북방의 소도시 피터스버그에 틀어박혀 반 년에 걸친 농성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피터스버그에 틀어박히게 된 이유는 이곳이 리가 지휘하던 남군과 남부연합의 수도인 리치몬드의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던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리는 공병장교 출신이었기 때문에 농성전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사실 피터스버그의 농성전은 일반 농성전과는 달리 그랜트가 피터스버그 주변에 길게 참호를 둘러판 뒤에 전개된 일종의 참호를 끼고 싸우는 장기전이었는데, 약 9개월 동안 피터스버그를 공격하는 북군은 또 거의 두배 가까운 병력 우세로 절반 가량의 남군을 상대하다가 4만 2천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다. 남군은 그 기간동안 약 2만 8천의 사상자를 냈다.
이런 막대한 피해 덕분에 하마터면 링컨이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할 뻔할 정도로 리는 북군에게 엄청난 출혈을 강요했다.
2.3 북군에게 무릎을 꿇다
다만 이러는 동안 리의 병력도 그랜트의 엄청난 뚝심과 끈질기게 보급로를 노리는 전술 덕분에 차근차근 소모되고 지쳐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리가 그랜트를 상대하는 사이에 윌리엄 테쿰세 셔먼이 서부전선을 단순히 제압해버린 것 뿐만 아니라 초토화 전술에 따른 약탈과 파괴로 아예 박살을 내버렸다. 이로 인해서 전쟁 내내 탈영병이 없기로 유명했던 리의 군대에서 서부전선 출신의 병사들이 탈영하기 시작했고, 반년이 넘게 피터스버그 주변에서 장기전을 벌인 탓에 식량과 무기를 비롯한 각종 보급면에서 상황이 안좋은데다가 부상병뿐만 아니라 질병 문제까지 겹치는 등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기 시작했다.
반면 북군은 사상자 면에선 오히려 한참 더 병력손실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엄청난 물량빨쇼미더머니로 병력이 줄기는 커녕 늘어나고 있었다. 리가 지휘하는 병력은 9개월 동안 북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지만 농성 후기에 북군이 오히려 불어나서 12만 5천이 넘어가는 북군을 상대해야했고, 여기에 셰리던 장군이 이끄는 5만 가량의 북군 추가병력이 머지않아 합류할 것이라는 정보까지 입수했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셔먼까지 서부전선을 박살낸 뒤 남진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리는 북군의 공격계획을 방해하기 위해서 1865년 3월 말, 전선을 지키던 병력을 나누어 근방에 있던 스텟먼 요새(Fort Stedman)를 공격하고 피해를 입힌 다음 철수할 계획을 짰는데, 요새는 쉽게 함락시켰지만 굶주려있던 남군병력들이 함락된 북군 요새에 있던 식량 주워먹느라(...) 요새에서 시간을 지체해버렸고, 그 사이에 4천명의 북군이 우회해서 요새를 도로 함락시킨 뒤 철수 중이던 남군을 패퇴시켜버렸다. 거기다 정작 북군의 공세는 이 공격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요새 공격을 위해서 나눈 병력이 패하고 돌아오는 바람에 피터스버그의 방어가 취약해졌다.
결국 여기에 이르러서 리의 군대는 더 이상 피터스버그를 고수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리는 9개월 이상의 장기전으로 거의 만신창이가 된 북버지니아군을 이끌고 피터스버그를 탈출했다. 그 직후인 4월 3일 남부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가 함락되었고, 리는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옛 북버지니아군 사령관 존스턴이 이끄는 남군의 나머지 잔존전력과 합류하기 위해 후퇴길에 올랐지만 포토맥군에게 퇴로가 차단되고 말았다. 이에 5년 동안 자신과 함께 싸우고 살아남은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결국 그랜트에게 항복하였다.[10]
리가 항복할 당시 장병들에게 남긴 고별사(일반명령 9호)는 다음과 같다.
'여러분은 능가할 자가 없는 용기와 인내로 지난 4년간 복무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불굴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북버지니아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자원 앞에서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굴복에 동의한 이유가 그처럼 많은 전투를 겪으며 마지막까지 견실하게 지탱해 준 용사들을 믿지 못해서가 아님은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전투를 계속함으로써 발생할 손실을 보상할 용기가 없습니다. 더 이상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느껴 나는 무익한 희생을 피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용감했으며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종전협정에 의거하여 장병은 포로교환이 이루어질 때까지 집으로 돌아가 머무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임무를 성실하게 완수했다는 만족감을 항상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축복과 가호가 여러분과 함께할 것을 열심히 기도합니다. 조국에 대한 여러분의 충성과 공헌을 존경하는 마음과 여러분의 친절과 배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사랑에 넘치는 고별 인사를 보냅니다.'
항복하기 위해 그랜트 장군을 찾아갔을 당시 둘은 서로에 대한 악감정도 없었고 오히려 호감을 느껴 제법 사이좋게 대화를 이어나갔다고 한다(사실 남북전쟁 내내 양군 장교들 간에 그닥 악감정은 없는 편이었다. 정치인 출신 장교는 조금 달랐지만 구 정규군 출신 장교는 전쟁 이전부터 다들 알고 지낸 사이이기도 해서였다. 또 그랜트는 리의 육사 14년 후배이기도 했다). 그랜트는 동포끼리의 싸움에서 수치를 주는 것은 옳지 않다며 아무 조건 없이, 다만 남부가 연합의 품으로 돌아와 하나의 미합중국이 완성되는 것만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남부 군인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하며 말을 타고 갈 것을 허용하고 식량을 나누어주겠다고도 하는 등 상당히 너그럽고 관대했다.
2.4 전쟁후
전쟁이 종결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렉싱턴에 있는 워싱턴 대학 학장으로 일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패장이었음에도 그의 전시 명성뿐 아니라 교육자로서의 성실함과 훌륭한 인품은 종전 직후부터 북부에도 널리 알려져, 그가 대학 학장이 되자 북부로부터 유학생들이 몰려오기까지 했다. 이 중 상당수는 지난 전쟁에서 그의 적으로 싸운 젊은이들이고, 나머지 남부 출신 학생들의 절반 이상도 리의 옛 부하 병사들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적과 아군이 한 데 모여서 웬 늙은이 하나한테 동시에 하앍하앍한 셈이다.[11] 그 전까지 평범한 작은 대학에 불과했던 워싱턴 대학은 덕분에 빠르게 성장, 지금은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리버럴 아츠 칼리지로 성장했고 이름도 워싱턴 앤 리 대학으로 바꾸었다. 또한 이 대학의 최대 특징은 교칙이 전혀 없다는 것인데, 유일한 교칙은 리가 만든 모든 학생은 신사여야 한다뿐이며[12] 이 교칙 때문에 꽤 오랫동안 여학생을 받지 않았다.[13] 물론 지금은 남녀공학이다.
2.4.1 국적
전쟁이 끝난 뒤 1865년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반군(북부에서는 남군을 이렇게 불렀다)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사면하였으나, 핵심이 되는 14계층은 제외하였다. 제외된 사람들은 대통령에게 사면을 요구하는 특별 신청을 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에 따라 리는 그해 대통령에게 사면 복권 신청을 하였으나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허가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잊혀졌다가 100년이 더 지난 1975년이 되어서야 사면이 이루어져, 리는 결국 공식적으로는 국적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살다가 별세한 모양이 되었다.
3 트리비아
- 1865년 종전 직후 다시 연방정부에 충성을 서약했으나, 남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공무원들이 그 서류를 임의로 다른 서류철에 처박는 바람에 죽을 때까지 전 반란군으로서 시민권이 회복되지 않았다. 심지어 교수형을 당할 뻔하기도 했다.[14] 그런데도 남북전쟁 개전을 적극 주장했던 언론인 호레이쇼 그릴리에 의해 186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될 뻔하기도 했을 정도로 남북 모두를 통틀어서 진정한 시민이자 진짜 미국인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시민권이 회복된 것은 그의 충성서약서가 발견된 이후로도 한참 더 시간이 흐른 뒤인 1975년으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그를 공식적으로 사면하고 시민권을 사후에 다시 부여했다.
- 참고로 리와 부인인 메어리 커스티스는 워싱턴 근교에 농장을 갖고 있었는데, 남북전쟁이 발발할 무렵 농장을 남겨두고(땅을 파서 가져갈 수는 없으니까...) 남부로 떠나게 되었다. 남북전쟁 당시 리의 남군에 의해 북군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북군 병참감이었던 메이그스 장군이 빡쳐서 리의 농장에 전사자들을 매장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의 알링턴 국립묘지이다. 그리고 그 농장에 있던 집이 알링턴 하우스(Arlington House)라고 불리는 기념관이 되었다.
- 리는 당시의 많은 군인들과 달리 성격이 독선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온화하며 부하들의 판단을 최대한 존중하는 스타일이었다. 덕분에 뛰어난 장교들은 그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는 활약을 보여줬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예스맨 스타일이나 무능한 인간들은 도저히 그의 방식으로는 써먹을 방도가 없었다. 당시의 전쟁에서는 전자에 해당하는 장교가 매우 드물었으므로, 이런 장교들이 전쟁기간 동안 소모되기 시작하면서 리의 군대가 약화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세심한 작전계획을 수립하는데 능하면서도 직관적으로 순간순간 상황에 따라 작전을 바꾸는 일이 잦았는데, 이에 대비해서 작전계획이 꽤 모호하게 작성되는 경우가 많아 당연히 그를 못 따라가는 부하장교들은 명확한 계획이 없어 혼란을 일으키곤 했다. 특히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토머스 잭슨이 쓰러진 이후 승진한 신임 군단장 및 사단장들이 그런 경우가 많아, 이것이 게티스버그 전투 패전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애포머톡스에서 항복하는 리.
- 북군 사령관 그랜트가 주정이나 부리다가 군대에서 쫓겨나고 매일 옷도 허름하게 입고 다니던 나사빠진 사람이었던 반면 리는 굉장한 신사였고 절도가 있었다. 사실 두 사람은 미국-멕시코 전쟁 때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랜트는 그때의 기억을 평생 잊지 않았지만 리는 그랜트가 하도 추레하게 하고 다녔던 탓에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1865년 버지니아 애포머톡스에서 리가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장면을 그린 기록화를 보면 말끔한 차림의 리 장군과 신발도 안 닦고 추레한 그랜트 장군이 같이 나오는데 옷 매무새를 보면 누가 항복하는지 모를 정도.
- 윌더니스 전투 당시 때맞춰 전장에 도착한 텍사스 여단을 보고 흥분한 리가 "텍사스인들이 언제나 적을 몰아내주는군"이라고 하자 텍사스 여단의 한 병사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리 장군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돌격해 가겠다"고 외쳤다고 한다. 또한 그가 선봉에서 돌격하려 하자 병사들은 리 장군이 안전한 후방으로 가지 않는다면 돌격하지 않겠다고 거부한 일도 있었다. 훗날 애포머톡스에서 포위당했을 때 부하 장교가 항복을 권유하자 리가 최후까지 싸우지 않으면 국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겠냐고 화를 냈는데, 그 부하 장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조국은 무슨 놈의 조국입니까![15] 조국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몇년간 우리에게 조국은 없었습니다. 당신이 저 불쌍한 병사들의 조국이었으며, 그들은 급료도 피복도 없이 굶주리면서도 오직 당신을 위해 싸웠습니다. 수천의 병사들이 아직도 당신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 하고 있습니다!”출처: 미국 남북전쟁- 애포머톡스의 종전 9. 4월 7일 - 병사들의 조국
- 후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그의 이름을 딴 M3 리 전차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M3 전차를 일부 개량한 개량형에는 그랜트의 이름이 붙었다. 이 이름은 영국군이 붙인 것으로, 영국군은 리와 그랜트 양자를 모두 공여받아서 북아프리카에서는 그랜트 중심으로 운용했다.
- 2011년 6월 20일 보도에 의하면 미국의 포털 MSN.com에서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 16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특히 미국 남부에서 그에 대한 추종은 절대적이어서 군신(軍神)을 넘어선 거의 반인반신(半人半神)으로 추앙받고 있다고 한다. 이는 그의 군사적 능력과 업적 뿐만 아니라 아래에 서술된 그의 고결한 인품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 망연자실한 일반 사병들 앞에서 "Friends, it is all my fault. It is entirely my fault(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사람은 오직 나 뿐이다)."라며 장엄하게 고백했다. 사실 전적으로 리 장군의 책임은 아니었다. 핑계는 얼마든지 댈 수 있었다. 이 때 이 부대는 이렇게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았고[16] 기병대는 늦게 도착했고[17] 여기서는 이것이 잘못되었고 저기서는 저것이 잘못됐다는 등...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하지만 고결한 인품의 리 장군은 남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았다. 역사에 남은 위인들 중 이 정도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그것도 사병들 앞에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할 정도의 용기와 인품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18][19]
패배를 시인하는 리. 1분 00초부터.
- 시대가 바뀌면서 평가가 크게 요동을 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때는 미국 전역에서 존경을 받았으나, 현재는 인종주의가 배격되고 구 남부의 신화가 하나 둘 비판받기 시작하면서 리의 평가도 크게 떨어지고 있다. 특히 찰스턴 총격 사건 이후로는 미국 남부에 있는 리의 동상들에 대한 철거 여론이 높아지고, 리의 이름을 딴 공공건물들이 하나 둘 이름을 바꾸는 상황.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남부가 승리하는 대체역사물에서는 항상 남부연합 대통령으로 재직한다.
- 마틴 신(게티스버그), 로버트 듀발(신의 장군들)이 리 역을 맡았는데, 특히 마틴 신의 연기가 유명하다. 연기도 출중했고 촬영 당시 보조 연기자들[20]에게도 정중하게 대해서 평가가 좋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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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군의 아이돌 리 장군참고로 이 장면은 계획되지 않은 것으로, 마틴 신이 촬영을 위해 이동하자 갑자기 리인액터들이 열성적으로 뛰쳐나와 환호했고, 이것이 영화에 추가되었다.
- ↑ Lee는 아일랜드계 성씨이다.
- ↑ 미국은 그 당시까지 독재를 막기 위해 상비군의 규모가 작았고, 주로 외곽 쪽에서 경비와 진지 구축, 영토 개척 위주로 운용되었기 때문에 육군의 경우 공병에 가장 우수한 장교들을 배치하였다. 미 육군원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도 공병 출신이다. 남북전쟁 발발 당시 연방 육군의 상비군은 3~4만 정도. 덕분에 인사 적체도 심하여 아무리 유능해도 진급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 ↑ 아내도 비범했는데 마샤 워싱턴과 그의 첫 번째 남편의 증손녀였다. 즉 조지 워싱턴의 양증손녀.
- ↑ 이전에 브라운은 이미 노예옹호자인 백인 5명을 살해한 '포토와토미 학살사건'을 저지른 적이 있다.
- ↑ 브라운은 반란 행위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헌데 남북전쟁 이후 브라운의 행적이 재평가되면서 덩달아 리에 대한 평가가 미묘해지기도 했다. 리 입장에서야 어디까지나 불법으로 군 창고를 점령한 자들을 진압했을 뿐이고, 노예 해방 문제에 대해선 별로 관여하지 않았지만 이 흑인 노예 문제가 워낙 거대한 사안인데다 리 자신이 남북전쟁 당시 상당히 큰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이라서 구설수에 오르기가 쉽다.
- ↑ 이 7일 전투의 전개 과정에서 리는 자신이 매우 공세지향적이며 고전적인 지휘관임을 드러냈다. 이 공세지향적 성향이 게티스버그 전투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 ↑ 앤티텀 전투는 리가 전술적으로는 승리한 전투라고 할 수 있었지만, 전략적 측면에선 리의 작전지속능력이 완전히 상실됨으로써 사실상 패한 전투가 되었다. 그리고 리 본인은 앤티텀 전투를 가장 자랑스러운 지휘경험으로 회고함으로써 자신이 전략 측면보단 전술 측면에 더욱 치중함을 드러냈다.
- ↑ 다만 전쟁 초기 1:3이나 되던 남북간의 병력 교환비에 비하면 확실히 교환비가 한결 낫긴 했다. 그것도 일단 남부 최고의 명장인 로버트 리를 상대로.
- ↑ 보충 병력과 치료된 부상자 덕분인지 3번의 전투 모두 이 병력이 비슷하게 유지되었다.
- ↑ 항복하기 직전 마지막 10일 동안 북군의 손실은 1만명에 이르렀다. 위에서부터 읽어보면 알겠지만 최악의 상황에서 엄청난 분투를 한 셈. 리가 포위됐을 당시 북군은 12만 5천명이었고, 리의 북버지니아군은 1만 5천에 불과하였다. 심지어 인원이 8명인 여단이 있을 정도.
- ↑ 학생 전원의 이름을 알았다고 한다. 참고로 이 대학의 학장을 맡을 당시에 리는 너무 가난해서 계급장을 뗀 군복을 입고 취임식에 참석했다.
- ↑ 정확하게는 교칙을 복사해주기를 원하는 학생들에게 "우리 대학에는 문서화된 규칙이 없다. 모든 학생이 신사로서 행동할 것을 기대한다."라고 답하였다.
- ↑ 신사가 영어로 Gentleman. 그리고 이 단어는 숙녀를 의미하는 Lady의 대칭점으로 쓰인 단어이기도 하다.
- ↑ 그랜트가 자기 육군총사령관 자리를 걸고 정부에 격렬히 항의한 끝에 그런 사태만은 막았다. 이 일이 있은 후 리는 자기 앞에서 그랜트를 비난한 자기 대학 교수에게 "앞으로 다시 내 앞에서 그랜트에 대해 불경한 말을 하면 귀하와 나 둘 중 하나는 이 대학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 ↑ 원문은 "Country be damned!" 이전에는 "조국은 저주받아야합니다!"라는 다소 어색한 직역으로 번역돼있었다.
- ↑ 유얼은 '가능하다면 점령하라'는 지시에 소극적인 지휘로 세메터리 힐을 점령하지 않아 북군이 전열을 정비할 여유를 줘버렸다. 영화 게티스버그에서도 부하가 이걸로 유얼을 작정하고 까자 리가 진정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 ↑ 기병대장 스튜어트는 복수심에 불탄 나머지 명령대로 안 움직이고 북군 진영을 휘젓고 다녀서 게티즈버그에서의 패배에 일조했다(...).
- ↑ 데일 카네기의 '인간 관계론' p.232, 리베르 출판
- ↑ 데일 카네기는 이 예화를 예로 들며 인간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리 장군처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라고 조언한다.
- ↑ 적은 보수와 숙식만 제공했음에도 남북전쟁 시기 남군 육군 피복과 장비를 자비로 갖추고 무리지어 자원한 리인액터들이 대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