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헤어베어거

이름제프 헤어베어거 (Josef "Sepp"[1] Herberger)
생년월일1897년 3월 28일 - 1977년 4월 28일
국적독일
출생지만하임
포지션스트라이커
소속팀발트호프 만하임 (1914~1921)
VfR 만하임 (1921~1926)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 (1926~1930)
지도자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 감독 (1930~1932)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 (1932~1936)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36~1942)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감독 (1945~1946)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50~1964)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오토 네어츠
(1926~1936)
제프 헤어베어거
(1936~1942, 1950~1964)
헬무트 쇤
(1964~1978)
공은 둥글고, 경기는 90분이나 진행된다.[2]

Der Ball ist rund und ein Spiel dauert 90 Minuten.

경기의 끝은 곧 경기의 시작이다.

Nach dem Spiel ist vor dem Spiel

1 개요

독일의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2차 대전의 패배 이후 실의에 빠져있던 서독 국민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안겨다준 베른의 기적을 이끈 감독으로 특히나 유명하다.

2 생애

제2제국 시기였던 1897년 만하임에서 출생했다. 선수 시절 주 포지션은 스트라이커로 주로 고향이었던 만하임를 연고로 둔 팀들에서 주로 활동했다. 선수시절 통산 기록은 236경기 186골로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3] 이를 바탕으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선출됐지만 선수 시절 국가 대표 경력은 딱 3경기 출전이 전부. 그런데 이 3경기에서도 골은 2골이나 넣었다. 골냄새 하나는 잘 맡았던 듯

1930년 선수생활을 마감한 헤어베어거는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오토 네어츠가 이끄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코치로 재임하다가 1936년 네어츠의 뒤를 이어 2대 감독으로 부임한다. 부임 당시 독일 국가대표 자체가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3위를 차지할 정도의 실력있는 팀이었고 1938년 오스트리아와의 합병을 통해 마찬가지로 한 실력 자랑하던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흡수하면서 엄청난 기대를 받았건만 정작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스위스와 졸전끝에 1라운드에서 허무하게 탈락...[4] 이후 2차 대전으로 나라꼴이 개판 오분직전인 상황에서 축구를 할 수 있을리가 없었고 종전 이후에도 독일은 전범 국가여서 국제대회 출전을 금지당하는 크리를 먹어서 헤어베어거는 1950년에야 서독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재부임한다.

그리고 종전 이후 근 10년만에 처음으로 출전한 국제대회인 스위스 월드컵에서 독일의 선전을 기대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첫상대이자 당대 최강의 팀이었던 '무적의 마자르' 헝가리와의 경기에서는 8-3이라는 떡실신에 가까운 스코어를 받아들며 참패한다. 당시 독일 내의 반응은 "전쟁도 진 국가인데 축구를 이길리가 있냐. 우린 안 될 거야 아마"와 정도의 반응... 하지만 하늘이 도우셨는지 이후 서독은 터키, 유고슬라비아, 오스트리아라는 엄청난 꿀대진을 받아들면서 결승까지 승승장구해나가는 기염을 토한다.[5] 그리고 시작된 결승전, 헤어베어거가 이끄는 독일은 기적과 같은 3-2 대역전승을 일궈낸다! 이 월드컵 우승 이후로도 헤어베어거는 스웨덴 월드컵칠레 월드컵까지도 서독을 지휘하며 그리 나쁘지 않은 성적[6]을 기록하고 헬무트 쇤에게 감독자리를 넘겨주며 축구계에서 은퇴한다.[7] 이후 80세였던 1977년 세상을 떠난다.

3 논란

나치정권을 잡은 시기에 국가대표팀을 지휘하였으니.. 당연히 나치당원이었다. 본인이 얼마나 나치를 신봉했는지는 본인만 알 수 있는 노릇이지만 이 때문에 나중에 독일 축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때 상당한 반발의 목소리도 있었다고...
  1. 요제프의 애칭이 제프
  2. 당시 무적의 팀이었던 헝가리와의 월드컵 결승전을 앞두고 기자들에게 한 명언이다.
  3. 이 당시 독일은 국가 전체를 대표하는 리그는 없고 지역별로 진행했는데 이 시기 헤어베어거의 소속팀들은 헤센주 리그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나름 실력있던 팀이다.
  4. 간혹 히틀러가 이거에 분노해서 선수들을 다들 수용소로 보내버렸다란 루머가 도는데 사실이 아니다. 그게 사실이면 감독이었던 이 양반이 히틀러 권력이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던 1942년까지 국가대표팀을 지휘나 할 수 있었겠는가?
  5. 헝가리가 전 대회 우승팀이었던 우루과이, 준우승팀이었던 브라질과 대혈투를 벌이면서 힘겹게 결승전을 나갔단 것을 생각해보자. 심지어 브라질과의 준준결승전에서는 경기가 끝나고 패싸움까지 있었다....
  6. 스웨덴 월드컵 4위, 칠레 월드컵 8강 진출
  7. 1964년 당시 나이도 67세로 상당한 고령이었던 데다가 이 시기 독일 축구계는 지역 리가가 해체되고 전국적 리그인 분데스리가로 재편성되는 대격변의 시기였기에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마인드도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