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위의 추존 황제 | ||||
고황제 조등 | 태황제 조숭 | 태조 무황제 조조 |
1 개요
曹騰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환관으로 자는 계흥(季興). 전한의 상국 조참의 자손[1]으로 아버지는 조절(曹節)이다.
1.1 집안관계
그의 아버지인 조절은 십상시의 하나인 그 조절과는 동명이인이다.[2] 왕침의 위서에 따르면 조절은 덕이 많은 대인배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것을 증명하는 일화가 하나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이웃집 돼지가 도망쳤고 마침 조절의 집에서 키우던 돼지가 그 돼지와 모습이 비슷했는데 이에 그 이웃은 그 돼지가 도망친 자기 돼지라며 우겼다. 하지만 조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이웃이 자기 돼지를 가져가는 것을 지켜봤다. 그런데 며칠 후에 도망쳤던 진짜 이웃집 돼지가 돌아오자 이웃은 부끄러워하며 돼지를 돌려주면서 사과했으며 조절은 이웃을 탓하지 않고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이 기록이 전부이며 벼슬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다. 다만 자식으로는 백흥, 중흥, 숙흥이라는 자를 가진 아들 세 명과 막내로 조등 등 아들 네 명이 있었다.
조등의 형제관계는 위로 백흥, 중흥, 숙흥이라는 자(字)를 가진 세 명의 형이 있었다.[3] 양자 조숭은 하후씨라는 설이 있다. 자세한 것은 조숭 항목 참조.
원래 삼국지 이전 세대이긴 하지만 삼국지에서는 몇차례 언급되는 이유가 바로 조조의 할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환관이므로 혈통이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1.2 본인의 능력
조등이 환관일 시절의 한나라는 외척과 환관들의 권력싸움이 굉장히 심했는데, 조등은 후한 안제 때 황문종관으로 처음 환관이 되어 대궐에서 30여년간 일을 처리하면서 순제, 충제, 질제, 환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5명의 황제를 섬겨 과실이 없었다. 특히 외척 양기가 질제를 독살하고 다음 황제를 세울 때 환제가 물망에 오르자, 환제가 질제의 숙부 뻘이라 옹립하기가 어려웠을 때[4] 조등이 나서서 힘을 보태주어 결국 환제를 옹립하는 데에 성공하기까지 했다.
이 외에도 양기가 몰락한 뒤에도 다른 외척들이 준동하는 등 너무 황권을 넘보자 조등을 비롯한 환관들(일명 '22열후')이 황제와 힘을 합쳐 외척들을 몰아내고 황권을 수호한 일이 있었다. 황제는 그 상으로 환관들에게 양자를 들이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 상을 받은 조등은 조숭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를 양자로 받았다. 조숭은 조조라는 아들을 뒀는데 엄청나게 영민했다. (조숭이 조등의 양자가 아니라 양손이라는 설도 있다. 조홍/조인 역시 조조의 사촌이라는 설이 존재.)
이 사건은 후한 말기의 청류파와 탁류파가 확연히 나뉘는 계기가 되는데, 충제 시절 외척과 척을 진 재야유학자 집단이 바로 청류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청류파는 이후 상당수가 양기의 정치적 세력이 되는데, 양기의 전횡이 심해지자 왕권 강화를 위해 내관들과 일부 중신이 합세하여 환제를 새로 세웠고 이 과정에서 새로 득세한 내관과 중신들을 탁류파라고 불렀다.[5]
손자 조조는 관리를 하고 있을 때 십상시 건석의 친척이 통금을 어겼을 때 규정대로 처리해서 유명해진 일화가 있었다. 하지만 조조는 환관계의 전설이라 불릴 정도의 거물 환관인 조등의 손자. 실제로 십상시 중 수위를 차지하고 있던 장양은 조등이 직접 양물이 떨어진 걸 확인하고 데려다가 자기 수발을 들게 하면서 키웠으며, 역시 십상시의 수위 중 하나였던 단규는 조등이 대장추를 지낼때 비서역할인 대장추승을 지낸 바가 있다. 건석은 삼국지 연의에는 십상시로 기록되어있으나 정사에는 십상시로 기록되어있지 않으며 서원팔교위를 새로 정립하면서 내관들이 무력을 가지게 되었을때 이를 총책임맡게 되는, 일종의 행동대장 겸 신흥세력이다. 조등하고는 세대도, 세력도, 권위도 큰 차이가 있다.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즉위할 가망이 전혀 없는 황제도 자신의 힘으로 즉위시킨 적이 있는 등 조등은 전성기엔 '마음 먹으면 황제도 갈아치울 수 있던 인물'이었다. 이렇듯 환관 세계에서도 전 세대의 거물이라 비교적 신흥 세력인 십상시 '따위'가 어찌할 수 있던 집안이 아니었다.
거기다 역대 황제들의 총애를 항상 유지하였는데, 138년에 중상시 장규, 거정, 양정 등(위의 '22열후'에 속하던 이들로 역시 큰 권세를 부리던 환관들이었다)이 양상, 맹분과 함께 조등을 참소했는데, 순제는 양상 부자는 자신과 친한 사이이고 자신이 아끼는 사람이므로 그런 일이 없다면서 공동으로 투기할 뿐이라 했으며, 이로 인해 장규 등이 조서를 고쳐서 조등, 맹분 등을 체포했다가 순제가 진노해 이들을 석방하고 오히려 장규 등 10명이나 되는 중상시들을 감옥에 넣었다.
1.3 정치감각
조등이 후대의 십상시로 대표되는 환관 집단과 가장 큰 차이점을 보인 것은 뛰어난 정치감각에 있다. 환제 옹립을 둘러싼 외척과 중신의 갈등에 내관이 개입한 것은 굉장히 이례적이면서도 위험한 일이었고 이에 양기에 동조하지 않은 청류파들조차 환관을 경계하면서, 직접적으로 정계에 진출하게 되고 그로 인해 청류파와 탁류파의 갈등이 초래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새로 진출한 청류파 상당수가 정치감각이 떨어지면서 인품과 학식을 존중받는 사람들이었고, 대표적인 것이 당고의 금에서 피해자가 된 이응, 삼국지에서도 존경받는 유학자로 나오는 정현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탁류파 중 내관들의 수장인 조등은 유학자, 특히 청류파의 거두들에게 상당히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본인의 학식이 부족하다고 굽히고 들어가서 따로 글을 배우기도 하는 등 아주 유화적인 제스쳐를 보여준다. 이후 이응 등의 청류파가 강경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결국 환관들에 의해 '당파를 조장한다'라는 고소를 당하게 되며, 결국 청류파 200여 명이 투옥된다. 그러나 청류파는 이를 탁류파의 죄상을 폭로할 기회로 여기고 전국적인 유학자들의 봉기를 준비하게 되고 이 갈등이 커질 것을 우려한 조등은 탁류파를 설득하여 청류파의 벼슬을 깎고(주로 향리와 같은 지방 말단직으로 내려보냈다) 몇몇 주동자를 금고 처분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또한 환제 당시 외척이던 두무가 이응과 결탁하여 청류파에 힘을 실어주는 상황이었으므로, 두무 등이 청류파에 대한 무고를 호소한 것을 외척의 개입으로 몰고 가서 실각시키는데 성공한다.
이 사건이 바로 당고의 옥이며, 조등은 청류파에게서는 목숨을 빚진 사람이 되고 탁류파에서는 외척을 몰아내고 환관의 권위를 세운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받게 된다. 이 사건으로 자신의 세를 확고히 굳히고 권위를 내세운 조등은 정사에 참여한 환관으로는 드물게 무탈한 은퇴에 성공하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대 정파에게서 모두 존경과 칭찬을 받으며, 권력을 움켜쥔 사람인데도 무탈하게 은퇴했다는 이야기라는 것. 대단한 정치감각이 아닐 수 없다.
1.4 황제추숭
언제 죽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황건적의 난 이전에 사망한 것은 분명하며[6] 죽은 지 한참 지나 229년에 양고손자 조예가 위나라의 황제로 등극하자 조등에게 고황제(高皇帝)라는 시호를 올려 황제로 추존했다.
중국에서 황제 명단에 오른 인물들 중 환관 출신으로서 황제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2 미디어 믹스
창천항로에서는 위의 설명처럼 다른 십상시들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거물로 나오며, 손자 조조하고 친하며, 겨울에 조조하고 같이 사냥을 나간 장면이 훈훈하다.- ↑ 조참의 후손이라는 내용도 '손견이 손무의 후손일지도 모른다'는 식의 서술이어서 진위여부는 불확실하다.
- ↑ 복황후의 뒤를 이어 헌제의 황후가 된 조황후의 이름과 같으며 조조의 할아버지가 조등이므로 조조의 딸인 조황후에게는 조절이 고조할아버지에 해당된다. 비록 조숭이 양자지만 당시 조상에 대한 피휘에 엄격한 시대에 고조할아버지와 고손녀의 이름이 동명이인일 정도로 같다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 ↑ 다만 그의 형들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자(字)를 보면 '백중숙계'라는 항렬 질서를 따른 것을 알 수 있다. 조등은 막내 아들이었기 때문에 흥자 돌림에 계를 붙여 계흥이라는 자를 얻은 것이다.
- ↑ 거기다, 당시 다른 후보였던 청하왕 유산(劉蒜)의 경우 항렬로도 질제의 사촌 형뻘에다 위엄있고 엄격한 성격으로 중신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이 때문에 양기가 자신의 권세에 해가 갈까 우려했고, 또한 조등이 유산에게 사사로운 원한이 있어 양기에게 유산을 세우면 당신은 망한다고 지적했다. 덕분에, 중신들의 반발을 우려하던 양기는 고위 환관인 조등의 말에 힘입어 환제를 세우는게 된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난세가 시작되고... - ↑ 다만 탁류와 청류의 첨예한 대립은 영제 시절에 일어났으며 실제로 조등은 탁류파의 수장이었음에도 청류파에 대해서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 ↑ 창천항로에서는 북부위 시절의 조조와 직접 대화하는 것으로 잠시 등장하기도 한다. 물론 창작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