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침

1 삼국시대 위나라와 서진의 인물

진서 「왕침등전(王沈等傳)」
왕침순의순욱풍담

王沈
(? ~ 266)

삼국시대 위나라와 서진의 인물. 자는 처도(處道). 왕기(王機)의 아들이자 왕유의 손자.

태원군 진양현 사람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종숙 왕창에게 양육되어 그를 아버지처럼 섬겼으며, 계모가 미망인이 되자 받들었고 효행과 절의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책을 좋아하고 글을 잘 썼으며, 조상의 부름을 받고 조상의 연속으로 중서문하시랑이 되었다.

양호를 조상의 일파로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249년에 고평릉 사변으로 사마의에게 조상이 살해될 때 면직되었다.

왕침은 오래된 관리라는 명목으로 화를 면하고 양호를 만난 뒤에

나는 항상 경께서 일전에 말한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라고 하니 양호는

이것은 처음부터 저의 생각이 닿은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라고 했다.

이후 치서시어사, 비서감, 전저작이 되었다가 정원 연간[1]에 산기상시, 시중 등을 역임했고 조모가 학문을 좋아해 왕침은 배수와 함께 동당의 강연에 자주 초청되어 글을 지었으며, 조모로부터 문적선생(文籍先生)이라 불렸다. 이 때 저작 활동을 하면서 순의, 완적 등과 함께 위서를 편찬했다. 조모는 왕침을 믿었기에 왕침, 왕업, 왕경을 모아 같이 사마소를 없앨 계획을 세우지만 왕침은 왕업과 함께 사마소에게 고자질하면서 결국 조모는 가충의 사주를 받은 성쉬, 성제에게 살해당했다.이번에는 줄을 잘 섰다

이 공으로 안평후(安平侯)에 봉해지고 식읍 2천 호를 받았지만 세상 사람들로부터 불충을 저질렀다고 비난을 받았으며, 상서로 옮겨졌다가 감예주제군사, 분무장군, 예주자사 등을 역임했고 예주에 있을 때 선정을 펼치면서 가규 이후의 법제 금령을 참조해 여러 곳에 시행해 선한 사람들은 그를 따랐고 왕침이 이들을 가르쳐 예주 9군의 선비들은 그의 가르침을 받는 것을 기뻐했다고 한다.

정로장군, 지절, 도독강북제군사가 되었고 다섯 등급의 제도가 생길 때 박릉후에 봉해지면서 차국[2]으로 받았으며, 263년에 촉이 멸망할 때 오군이 위로 올라와 촉을 구하려고 할 때 변경을 위협하자 왕침은 각지를 방어해 오군이 철수하자 이 공적으로 진남장군이 되었다. 사마염이 왕이 되었을 때 어사대부, 수상서령, 급사중이 되었고 왕침의 재주와 명망은 당시에 표창되어 양호, 순의, 배수, 가충 등이 왕침과 함께 의논했다.

사마염이 선양을 받을 때 임금의 명을 보좌한 공으로 표기장군, 녹상서사에 임명되고 산기상시를 더하면서 박릉군공에 봉해졌지만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아 작은 현의 공으로 임명되어 읍 1800호를 받았으며, 사마염이 국정을 왕침에게 맡기려고 했지만 266년에 사망했다.

1.1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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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9

코에이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9에서 등장한다.

삼국전투기에선 조모가 그라함 에이커로 나옴에 따라 조슈아 에드워드로 패러디되었다. 다만 그라함의 부하였던 그가 여기선 자기 상관을 배신하는 것으로 나온다는 게 아이러니지만. 다만 조슈아는 그라함을 무시하고 나서다 죽는 캐릭터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그런데 268년에도 살아있는 것으로 나온다!! 아마 2번 항목의 동명이인과 착각한 듯.[3] 정작 타이틀 컷에서 왕침을 소개할 때는 분명 266년에 사망한 것으로 생몰년도가 나와있다.

2 서진의 인물

王琛
(? ~ ?)

서진의 인물. 자는 사위(士瑋). 왕람의 여섯째 아들이자 막내 아들.

중앙에서는 국자좨주를 지낸 적이 있고 지방에서는 회북감군을 지냈으며, 석포를 미천하다고 업신여겼다. 257년에 제갈탄이 군사를 일으켰다가 258년에 진압당하고 석포가 회남을 담당했는데, 268년에 오나라에서 정봉이 이간책으로 궁중의 큰 말이 거의 당나귀가 됐고, 큰 돌이 이를 눌러 편안할 수가 없구나라는 내용의 동요를 퍼뜨리자 왕침은 이를 듣고 사마염에게 석포가 오나라와 결탁했다고 알렸다.

또 이전에 점을 치던 사람이 동남의 방향에서 큰 병사가 일어날 기미가 보인다고 하거나 호열이 오나라에서 크게 침범한다고 상주하면서 석포가 사마염에게 의심을 사게 되며, 양호가 석포를 변호했음에도 의심을 풀지 않아 석포가 병사를 풀고 홀로 죄를 빌어야 했다. 나중에 석포가 무죄하다고 하자 석포는 대사마로 올라갔다.

삼국전투기에서는 최훈 작가가 1번 항목의 인물과 착각했는지 1번 항목의 인물과 동일 인물로 나온다.
  1. 254 ~ 256년이다.
  2. 1만호, 2군, 사병 3천명이다.
  3. 석포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석포를 모함한 왕침과 이 왕침은 엄연히 동명이인이다. 이 항목의 왕침은 '沈'이고 석포를 모함한 2번 항목의 왕침은 '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