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忠武公

1 개요

주로 무인으로서 공을 세운 이들이 받았던 시호. 시법해에 따르면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을 받드는 것(危身奉上)'을 충(忠)이라 하고, '적의 창끝을 꺾어 침입을 막는 것(折衝禦侮)'과 '위엄을 크게 떨쳐 적을 물리치는 것(威强敵德)'을 무(武)라 한다. 이외에도 여러 뜻이 있지만 '신하의 도리를 지키고 나라를 위하여 몸을 아끼지 않아 밖으로는 외적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법도를 바로 세운' 것으로 평가되는 이들에게 내려지는 시호다. 신하가 받을 수 있는 시호로서는 그야말로 최고의 선시(善諡)인 셈.

2 사례

2.1 한국

과거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장군에게 내리는 시호인 충무(忠武)를 받은 사람들을 높여 이르는 말. 고려에서 3명이 충무 시호를 받았으며 조선에는 이 시호를 받아 충무공으로 불리는 사람이 총 9명이다.

다들 알다시피 충무공 이순신이 워낙 넘사벽으로 유명하시기 때문에 이것이 이순신 전용 칭호인 줄 알고 나머지 8명의 충무공들은 아예 충무공의 시호를 받았는지조차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이 항목은 원래 이순신 항목으로 넘어가는 리다이렉트문서였다. 다들 나름 활약한 위인들임에도 그분들의 위엄을 모두 씹어버리시는 통제사또의 패기

조선에서는 이순신의 경우는 물론이고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시호가 내려질 때에는 삼망(三望)이라 하여, 세개의 시호를 먼저 선정한 뒤 그 중 가장 적당하다 여겨지는 시호를 선정하는 것이 법도였는데, 이순신 장군에게 시호가 내려질 때 선정되었던 세 시호는 각각 충무(忠武), 충장(忠壯), 무목(武穆)[3]이었다. 삼망에서 논의되는 세 시호의 뜻을 풀어보면 시호를 받는 이에 대한 당대의 평가를 대략 알 수 있으니, 이순신의 경우 논의의 내용을 보면, '일신의 위험을 마다않고 임금을 받들어'(忠), '적의 창끝을 꺾어 나라를 구했으며'(武), '적을 무찔러 전란을 평정하였고'(壯), '덕을 펼쳐 의를 지켰다'(穆)가 된다[4]. 이 중 가장 격이 높은 것으로 여겨진 것이 바로 '충무'.

조일전쟁이라는 불쏘시개에서는 이순신 말고 김시민 역시 충무공의 시호를 받은 장수인데 왜 이순신 하나만 충무공으로 여기고 김시민은 칭송을 안 해주냐고 징징거렸다. 거기까지였으면 좋은데, 문제는 "충무공은 이순신과 김시민 두 명이었다."라고 한 것이다. 나머지는 어쩌고?

참고로 이순신의 시호 '충무공'을 선조가 붙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매우 많은데, 이순신의 시호는 선조가 아니라 인조 때인 1643년에 붙여진 시호다.

2.2 중국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전공과 충의가 가장 뛰어난 장군에게 충무의 시호를 붙이도록 했는데 그 중 유명한 사람이 촉한의 충무후 제갈량남송의 명장 악비이다.

  1. 경상남도 진주시 경남혁신도시 지역에 그의 시호를 따 '충무공동(洞)'이라는 행정구역이 설치되어 있다.
  2. 그의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던 경상남도 통영시는 과거 그의 시호를 따 '충무시'로 명명되었다가(충무김밥이 이 시기에 유명해졌다), 1995년 통영군과 도농복합시로 통합되면서 현재의 통영시로 개칭되었다.
  3. 악비에게 내려진 첫번째 시호. 김용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악비의 병서인 '무목유서'의 '무목'이다.
  4. 단어 맞추기 수준이지만 여기서 논의된 시호들을 짜맞춰보면, 충무-충장-장목-무목이 나온다. 충무는 말할 것도 없고, 충장은 충무만은 못하지만 그에 버금가는 높은 시호로 권율이 이를 받았으며, 장목은 다름아닌 관우에게 내려졌던 시호이고, 무목은 악비가 받았던 시호다. 하나같이 최고의 시호라고 할 수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