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한민국의 전 기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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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조중훈(趙重勳) |
생몰년 | 1920년 2월 11일 ~ 2002년 11월 17일 |
본관 | 양주조씨(楊州趙氏) |
호 | 정석(靜石) |
호는 정석(靜石)[1]이다. 한진그룹의 창업주이다. 192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휘문고보 재학 중 아버지 사업의 부도로 인해 자퇴한 후, 서울을 떠나 국비지원교육기관이던 경남 진해고등해원(海員)양성소(현 한국해양대학교)를 수료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갖은 고생을 하며 2등 기관사 자격증을 땄다고 한다.기사
1945년 11월 인천에서 한진그룹의 시초가 되는 운수업체인 한진상사를 창업하였다. 6.25 전쟁 이후인 1956년 주한미8군과 군수물자 수송 계약을 체결하고, 베트남 전쟁 때인 1966년에 파병되는 미군과 군수물자 수송계약을 체결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한진그룹을 운송, 물류전문 재벌로 키웠다. 그러나 베트남전때 가장 이익을 낸 한진그룹의 당시 근로자들의 사정이 극단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음에도 투자이익을 위해 외면한 장본인이기도 하다.기사
에어버스 A300 여객기의 성공적인 운용 및 에어버스의 외국 판로 개척을 열게 한 공로로 199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 중 2등급인 그랑도피시에를 받았다.[2]
동생으로 조중건 대한항공 고문이 있는데, 조중건 고문은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에 유학 및 졸업한 수재로 영어회화가 매우 유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한 후 5년 만에 흑자로 돌리고 이후 대한항공 사장, 대한항공 부회장을 역임하며 대한항공을 세계 유수의 항공사 반열에 올리는 데 조중훈 못지않게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유명하며 조중훈의 후계 경영자 구도에도 올랐을 정도였으나, 결국 조중훈의 직계 후손이 아니다 보니 후계구도에서 밀려났다.[3]
하지만 1969년에 대한항공공사(현 대한항공)를 인수할 당시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서슬퍼런 정권의 인수 압력에도 불구하고 가장 반대가 심해서 형을 말렸다고 한다. 사실 당시 적자투성이였던 공기업을 떠맡아 민영화하는 것이다 보니 사운을 걸고 모험을 건 셈인데, 조중훈 창업주 또한 당시 대통령인 박정희의 제안에 감히 반기를 들 수 없었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수용한 셈이다. 조중건이 박정희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항공사업 인수를 결정하고 나온 조중훈에게 "형 미쳤냐?"고 역정을 내자, 이에 조중훈이 사색이 되어 "야 임마, 대통령 앞에 가서 싸움을 하냐?"라고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했을 정도다.[4] 그래도 1969년 당시 27억 원의 빚을 모두 떠안는다는 조건 하에 인수대금 14억 5,300만 원을 주고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하여 대한항공으로 민영화한다.
여하튼 적자투성이의 기업을 인수한것에 대해서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해외 비즈니스 수요가 크게 늘고, 중동으로 나가는 노동자들도 크게 늘어났기 때문에 예상보다 일찍 재정은 안정화되었고 1980년대 후반 올림픽 개최로 인한 해외관광객 수요증가 및 1990년대 해외여행과 해외유학붐에 따른 비행기편 증가로 급속히 성장하였다.
1999년 탈세 사건으로 검찰의 소환 조사를 받았으나, 2002년에 사재 1천억원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고 별세했다.
자녀는 조양호, 조남호, 조수호, 손녀 조현아(!), 조현민 등이 있다.
이렇게 세워놓은 것을 장손녀년이 모두 말아먹고 말았다. 그 할애비에 그 아들에 그 손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