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말로리


George Herbert Leigh Mallory.
1886년 6월 18일 ~ 1924년 6월 8일

기자 :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려고 하는 거죠?(Why did you want to climb Mount Everest?)"

말로리 : "에베레스트가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Because it is there)"

ㅡ 1923년 3월 18일.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 중기사 원문(PDF)

1 소개

영국 산악인. 그가 유명해 진것은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정복했던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논란의 주인공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가 이 말을 했는지 아는 이는 거의 없지만, 말 자체만큼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바로 위 등산에 대한 최고의 명언을 남긴 사람이기도 하다.

2 일생

20대 초반부터 등산에 나섰으며 1910년대에는 몽블랑이라든지 유럽 여러 산을 등정했다. 루스 터너(Ruth Turner 1892~1942)와 1914년 결혼했으며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포병대에 지원하여 참전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등정에 지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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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영국 에베레스트 등정대 사진(뒤에서 가장 오른쪽이 말로리

가이 불록(Guy Bullock/1887~1956)을 리더로 하는 등정대는 에베레스트 등정에 실패했다. 1922년 2차 등정대도 실패했고 결국 1924년 3차 등정대에 마지막으로 나서게 된다.

2.1 1924년 에베레스트 등정

찰스 G. 브루스(Charles G. Bruce/1866~1939) 육군 준장을 리더로 한 3차 등정대는 1924년 6월 1일, 리더인 브루스와 말로리가 1차 등정에 나섰지만 눈보라로 인하여 결국 포기해야 했다. 다음날인 2일에는 등정대 다른 멤버인 에드워드 펠릭스 노튼(Edward Felix Norton,1884~1954)과 하워드 섬머벨(Howard Somervell,/1890~1975)이 2차 등정대로 도전했으나 이들은 8,611미터에서 포기해야 했다. 산소통 없이 도전했던 이 둘은 더 이상 올라갔다가 목숨이 위험할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2차 등정대가 실패하자 말로리는 산소통을 써야 올라갈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브루스와 다른 일행은 내키지 않았다. 맨 몸으로 올라가서 등정해야지 더더욱 그 값어치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산소통은 기술부족으로 워낙 무거웠기에 그 무거운 걸 들고 올라가는 건 그만큼 체력적으로 더 힘들고 위험했기 때문에 잘 쓰이지 않았다. 당시에는 산소통 1개가 거의 20킬로그램에 가까운 무게였기에 더 많이 가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맨몸으로 가도 위험한 것은 마찬가자리며 산소통에 의존하기로 마음먹은 말로리는 리더인 브루스로서는 도저히 그 나이에 산소통을 들고 가는 건 위험했기에 일행 중 가장 어린 앤드루 어빈 (Andrew Irvine, 1902~1924)과 같이 산소통을 메고 3차 등정대로 도전하기로 한다. 그리고 멤버이며 지질학자인 노엘 오델(Noel Odell, 1890~1987)과 몇몇 셰르파들이 도우면서 6월 4일 등정에 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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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등정대)사진 맨 왼쪽이 앤드루 어빈.그 옆이 조지 말로리, 옆으로 에드워드 F.노튼, 노엘 오델,존 맥도널드, 앞은 왼쪽부터 에드워드 오스월드 셰비어, 제프리 브루스(Geoffrey Bruce,1896~1972), 하워드 섬머벨, 벤틀리 비템(Bentley Beetham/1885~1963).

여러 캠프를 두면서 서서히 도전하던 이들은 캠프마다 산소통과 먹을 것과 생필품을 따로 두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산소통 2개를 메고 올라가다 보니 다른 생필품을 많이 가져갈 수 없었다. 6월 6일,말로리와 어빈은 먼저 캠프 6(7,900미터)까지 올라가면서 거기에 친 천막에서 숨을 돌렸다. 뒤따라온 오델과 셰르파들이 여분의 산소통과 담요,옷,먹을 것을 두고 오델과 말로리와 어빈을 놔두고 우선 셰르파들은 내려갔다.

6월 8일 아침,말로리와 어빈은 정상 도전에 나섰고 남겨진 오델은 캠프 6에서 조금 올라가서 이 둘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기후가 나뻐서 잠깐 물러선 다음에 서서히 기후가 나아져서 다시 도전했다. 이들은 각자 산소통 2개를 메고 있었으며 캠프 7를 만들 천막 및 가벼운 먹을 것과 여러 장비를 갖추고 올라갔다.

그리고 6월 8일 오후 12시 50분. 안개 속으로 약 7,940미터 정도 높이에서 말로리와 어빈이 올라가는 것을 멀리서 오델이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안개 속으로 사라진 둘을 오델은 그래도 정상에 오를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캠프 6에는 산소통 12개를 비롯하여 생필품들이 잘 갖춰졌기 때문이었다. 캠프 6에서 가볍게 점심식사를 마친 오델은 내려와서 캠프 5에서 대기하던 다른 멤버들과 만난다. 그러나 오후 5시가 되어가도록 말로리와 어빈은 내려오지 않았으며 올라갈때부터 끼어있던 안개는 더욱 자욱해져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캠프 5 일행들은 "말로리와 어빈이 캠프 7를 설치한 다음, 날씨가 좋아지길 기다리는거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말로리와 어빈이 캠프 6까지 내려온다면 최소한 먹을 것이나 여분의 산소통이 있으니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인 6월 9일 오델과 셰르파 2명은 말로리와 어빈이 있을 것으로 추측했던 캠프 6으로 올라갔지만 남겨진 캠프 6은 누구도 들어온 흔적이 없었다. 그제서야 오델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고, 오델은 셰르파들과 올라가려고 했지만 셰르파 2명은 불길하다면서 올라가길 거부해 할 수 없이 오델 홀로 산소통을 메고 올라가야 했다. 홀로 올라간 오델은 해발 8,200미터에 설치된 캠프 7을 발견했지만... 말로리와 어빈이 가져간 천막은 강한 바람으로 반이 찢겨진 채로 휘날리고 있었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어빈과 말로리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6월 10일, 다시 한번 몇몇 멤버들이 캠프 7을 찾아봤지만 역시 아무 것도 없었다. 이미 산소통에 들어간 공기는 떨어진지 오래였으며 말로리와 어빈이 가져간 먹을 것은 떨어진지 오래였다.아무리 생각해도 이 둘은 죽었다고 봐야했기에 결국 브루스는 등정을 포기하고 내려가기로 한다.

6월 11일,남은 등정대 일행은 내려와서 추도문을 읽고 두 사람 명복을 빌었다. 한편, 1924년 10월 17일, 영국 세인트폴 성당에서 총리가 참가하고 유족들이 참가한 가운데 이 두 사람의 추도식이 열렸다.

3 논란

1933년 퍼시 윈 해리스(1903~1979)가 이끌던 영국 에베레스트 등정대는 8,250미터쯤 올라가서 한 피켈이 꽂혀진 걸 발견한다. 이 피켈은 바로 앤드루 어빈의 것이었다.해리스 등정대도 결국 등정에 실패했지만 이들이 발견한 이 피켈 때문에 세계적인 논란이 된다. 이 피켈은 어빈이 내려오던 길에 쓰던 것일까? 아니면 올라오던 길에 쓰던 것일까? 이란 논란이 되었던 것.

말로리는 당시 최첨단 신제품인 코닥 카메라를 가져갔기에 에베레스트 정상을 올라갔다면 반드시 찍었을테고 이게 발견된다면 세계 최초로 말로리와 어빈이 올라갔을 것이라는 논란이 되었다. 우선 이 둘을 마지막으로 봤던 오델은 이 둘은 반드시 올라갔으며 내려오던 길에 사고를 당해 죽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위에 나오듯이 오델은 1987년 만 97살까지 살면서 1924년 등정대원에서 가장 오래살았는데[1] 죽을때까지 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1953년 4월 29일,비로소 뉴질랜드인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 1919~2006)와 네팔 국적 셰르파인 텐징 노르가이(Tenzing Norgay, 1914~1986)가 에베레스트에 오른 사진을 남기고 무사히 내려오면서 다시 한번 말로리와 어빈이 먼저 올랐는지 논란이 된다. 우선 영국에서는 뉴질랜드국적인 힐러리와 네팔 국적인 노르가이가 먼저 올랐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치 남극점 첫 정복을 노르웨이로알 아문센이 차지한 걸 열폭하며 패배자이자 무능과 여러 논란을 일으키며 죽음을 자초한 로버트 스콧을 더 위대하다고 억지부리던 것과 똑같았다.

그래서 같은 영국계 백인이었음에도 힐러리는 무시당했으며 줄곧 영국에서는 말로리와 어빈이 에베레스트에 먼저 도달했으리라 주장해왔다.

4 75년만에 발견된 시체

"8,100미터 지점에 웬 영국인 시체가 있었다. 영국인인지 어찌 아냐고? 당연히 유니온 잭이 다 찢어지긴 해도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채로 있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에베레스트에 시체는 별것도 아닌지라 대충 보고 지나쳤다."

ㅡ 왕홍보.

그리고 세월이 지나 1975년 중국인 왕홍보가 에베레스트를 등정할 당시, 목격했던 게 알려지기 시작한다. 왕홍보는 에베레스트 등정일로 알고 지내던 일본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그만 왕홍보도 에베레스트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으며 그에게 이야기를 듣고 일본에서 이걸 글로 쓰며 그 시체가 혹시 말로리 아니었을까? 추측하던 일본인 등산가 하세가와 또한 에베레스트 등정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1980년대부터 말로리 시체를 찾기위한 등정대가 조직되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99년 5월 1일 오전 11시45분. 에릭 시몬슨이 이끌던 조지 말로리 시신 수습 작업 등정대에 참가한 미국 산악인 콘래드 앵커는 에베레스트 북동릉 8138m 지점 약 30도 경사진 곳에서 앞으로 넘어진 채 숨진 시체를을 발견했다. 앵커는 시체 주머니에서 손수건에 곱게 싸인 편지를 발견했는데 그건 조지 말로리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BBC가 스폰서로 참여해서인지 BBC는 특종으로 이걸 보도했고 생생하게 방송 카메라로도 시체가 나왔다. 75년이나 지났지만 역시 추운 기후인지라 시체는 꽤 많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역시 온난화 여파인지 옷은 거의 찢어졌고 다리 부분과 흙에 파묻힌 손 일부 등은 좀 썩어있었다. 얼핏보면 이건 무슨 마네킹이 아닐까 하는 형체로 남아있었는데, 옷이 찢어져 노출된 피부가 오랜 세월 강한 직사광선에 탈색된 것으로 보인다.

대원들은 조지 말로리를 감고 있던 로프를 제거한 후 주머니에서 고글나이프, 가위, 물통 고도계, 등산화 등을 회수했다. 그리고, 주변의 흙과 돌을 모아 시신을 덮어 간이 무덤을 만들었다.

그리고 관심거리인 카메라도 발견됐지만 필름이 엉망이었기 때문에, 아쉽지만 영원히 "조지 말로리가 최초로 정상을 밟았는가?"라는 수수께끼를 풀 수 없게 되었다. 더불어 말로리는 발견했지만 어빈의 시체는 대관절 어디로 갔는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이다.

그러나...지금은 말로리와 어빈은 실패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많다. 당시 말로리 시체를 발견한 등정대는 유품을 보고 어이없었다고 한다. 등산화는 무거웠으며 입고 있던 옷 재질을 분석하니 얼어죽지 않은 게 기적일 정도로 현대에 비해 너무나도 장비가 엉망이었다는 것. 오델이 말한대로 올라갔다고 해도 도저히 이걸로 올라가긴 힘들다고 입모아 말했을 정도였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말로리와 어빈이 가장 먼저 올랐다고 주장하는 이들이야 있긴 하다.

당시 현장을 촬영한 동영상으로, 약 2분 50분쯤부터 보면 말로리 시체가 나온다. 동영상에서 볼 수 있듯, 촬영 후 무덤을 만들어 시체를 돌과 흙으로 덮었기 때문에 현재는 근처를 지나가도 말로리의 시체를 볼 수는 없다. 흙에 파묻혀 있던 얼굴 부분은 고인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인지 파내거나 찍지 않았다.

5 기타

  • 그의 유명한 명언인 "산이 거기 있기에"는 가끔 인터넷 상에서 살짝 변형을 시켜서 나온다. 이말년 시리즈에서는 "아낄 게 거기 있기 때문이다."와 "내가 마카오로 가는이유는 칩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를 패러디 하였다. 원사운드의 "XX, 오락하는 데 이유가 어디있어? 그냥 하는거지." 과 최고의 궁합. 여담으로 이 명언을 의외로 엄홍길이 말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의외로 꽤 많다.
  • 이 사람의 동생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공군 전투기사령부 사령관이었던 트래퍼드 리맬러리 장군이다. 그 역시 비행기 사고로 인해 알프스 산맥에 추락해 산에서 목숨을 잃는다.
  1. 등정대원 가운데 오델이 가장 오래 살았고 등정대는 아니지만 일행 사진을 찍던 사진 담당 존 밥티스트 노엘(John Baptist L. Noel,1890~1989)은 99살까지 살았기에 여기 일원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