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스콧

1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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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Falcon Scott(로버트 팰컨 스콧).

1868. 06. 06 ~ 1912. 03. 29(추정)
사망 당시 만 43세.

영국해군 장교(최종 계급은 항해대령)이자 남극탐험가. 짧게 줄이면 탐험대장으로서는 시원찮은 인물에, 음험하고, 쪼잔하고, 오만하며 고집불통에 뒤끝은 또 오래갔다.[1] 해군 장교로서도 유능한 편이 아니었다. [2]

1901∼1904년 남극탐험을 지휘해 남한 도달기록인 남위 82도 17분을 기록했다. 스콧은 당시의 이야기를 《디스커버리 호의 여행(The Voyage of the Discovery)》이라는 책으로 써서 영국인들을 흥분시켰다. 이 탐험에서는 어니스트 섀클턴도 동행했는데, 섀클턴은 스콧이 책에서 자신이나 다른 동료의 행동을 지나치게 별 볼일 없이 기록했다고 하여 스콧과 사이가 돌이킬 수 없이 나빠졌다.

훗날 섀클턴 탐험대에 지나치게 비협조적이었던 점, 비록 아문센이 경쟁자임에도 불구하고 스콧에게 꼭 필요한 현명한 조언을 해주었던 점을 생각하면, 영국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인격자도 아니고 현명하지도 않으며, 영웅은 더더욱 아니다. 사실 과하게 포장된 인물이다. 국가빨을 정말 잘 타고 났다. 그리고 설상차의 치명적 결함을 신나게(?)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인력으로 끌고가는 멍청한 짓을 저지르는 데다가 그나마 판단력이 빠른 영국 육군 로런스 오츠(Lawrence E. G. Oates) 기병대위가 "어차피 조랑말은 관리가 너무 힘드니까 죽을 때까지 질질 끌고가다가 죽으면 그거라도 먹자"고 조언한 것조차 무시했다.

스콧이 내세울 경력이 하나 있다면 1905년에 로열 빅토리아 훈장 3등급 수훈을 수상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건 말이 좋아서 로열 빅토리아 훈장이지 저 훈장의 진짜 정체는 영국 왕실 사람만 만나도 주는 훈장이였다. 농담 아니고 고작 영국 왕실 정원사에 불과한 위인조차 스콧보다 더 높은 등급인 로열 빅토리아 훈장 2등급 수훈을 수상한 전례도 있다. 결국 저 훈장은 영국의 국왕과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주고 받기만 해도 받는 훈장이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훈장은 훈장이며, 개나소나 영국국왕과 만나 이야기 할수있는것은 물론 아니다. 그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만나는것이며 그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수여되는것. 쓸데없는 편견으로 폄하할 이유는 없다. 라고는 하지만 실상 천재금수저는 명백히 다른 것이다. 스콧은 천재가 아니라 금수저일 뿐이다.

섀클턴이 1908년 12월에 남극점 100마일 전방까지 갔다가 상황이 악화되어 퇴각하고 돌아와 유명해졌다. 스콧은 섀클턴이 다음 번에는 반드시 성공하리라 생각했기에 섀클턴보다 먼저 성공하려고 남극점 도달을 다시 시도했다. 하지만 스콧은 섀클턴이 아니라 노르웨이의 탐험가 로알 아문센과 경쟁을 하게 되었다.

1910년 제2차 남극탐험에 나서 1912년 1월 18일 남극점에 도달했다. 하지만 스콧 일행이 남극점에서 본 것은 1911년 12월 14일 한 발 앞서 남극점에 도달한 로알 아문센이 남긴 빈 천막과 노르웨이 국기, 그리고 천막 안에 있던 몇몇 물품과 메모지였다. 메모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가 먼저 남극점에 깃발 꽂고 가오. 필요없어진 물품은 남겨두니 행여나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쓰시오. 아, 더불어 친애하는 스콧 대령님께.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 폐하와 노르웨이 민중들에게 우리 노르웨이 팀이 먼저 남극점에 도달했다는 증인이 되실 수 있겠지요?(...)

아문센이 이 편지를 쓴 이유는 나쁜 의도가 아니라 만에 하나 그 자신이 귀로에서 쓰러져 죽을 경우에 대비한 것이지만, 스콧 탐험대에게는 속을 벅벅 긁는 비수같은 글이었다. 스콧 탐험대의 반응은 "우리가 우편 배달부냐"였다고 한다. 어쨌든 물품이 약간이라도 필요한 극지 탐험에서 라이벌에게 이런 배려를 하고 탐험 전에도 요긴한 충고를 해준 아문센에 대해 스콧과 그 탐험대의 태도는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스콧이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아문센의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최소한 비참한 최후는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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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탐험대가 남기고 간 빈 천막과 국기를 보고 망연자실한 스콧 탐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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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달 뒤에 찍은 사진. 얼굴들 봐도 울적함이 드러난다.

그 후 스콧 탐험대는 귀로에 악천후로 조난, 전원이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나중에 이들의 시체와 스콧 탐험대의 기록이 발견된 것은 스콧 탐험대 중에서 남극점으로 향한 사람은 5명이고 나머지는 지원대로서 참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남극점으로 가던 도중에 스콧 일행과 작별하고 기지로 돌아왔었다.

2 스콧이 패배한 이유

당시 세계에선 당연히 최강대국 영국의 막강한 지원을 받는 스콧이 이길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정작 스콧의 탐사팀은 여러 모로 심각한 문제투성이였다. 그 문제들은 아문센 VS 스콧 문서에서 정리한다.

3 죽음의 길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하겠다는 꿈이 좌절된 이후, 지칠대로 지친 영국 탐험대는 철수를 시작했지만 그들에게는 이미 힘이 없었다. 말도 개도 설상차도 없이, 사람의 힘으로 썰매를 끌고 강행군을 했기 때문이다.

5명의 탐험대 중 2월 17일에 크레바스에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뇌진탕과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해군중사(First Class Petty Officer) 에드거 에번스(Edgar Evans /1876~1912)[3]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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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희생자는 오츠였다. 보어 전쟁 때 입은 총상이 동상으로 도져 발이 썩어들어가서 오래 걷지 못하게 되자, 스콧에게 자신을 놔두고 가라고 애원했지만, 스콧은 그럴 수 없다고 거부했다. 그러자 오츠는 3월 16일 발의 고통을 참으며 신발을 신고, 스스로 눈보라가 불어대는 천막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국내에도 번역된 스콧의 일기인 남극일기에 나온다.

오츠 : 잠시 밖에 나갔다 오겠습니다.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스콧 : 우리는 가엾은 오츠가 우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죽음을 향해 걷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그것이 용감한 자의, 영국 신사의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 스콧의 일기에서

결국 오츠는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고,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다음날인 3월 17일은 그의 32번째 생일이었다.[4]

스콧 일행은 큰 슬픔에 빠졌지만, 오츠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이 '나를 놔두고 가라'는 뜻이었음을 깨닫고 다시 힘을 내 귀환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계속 몰아치는 눈보라가 기다리고 있었고, 9일 동안이나 계속된 이 눈보라는 스콧 일행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등유도 바닥나 뼈까지 얼어붙을 듯한 지독한 추위 속에 식료품이라고는 홍차가 전부였고, 나머지는 진정제 30알과 모르핀 주사액 등의 의약품과 탐험 일지, 광물 샘플들 뿐이었다. 물을 끓일 수 없었으니 홍차는 그냥 이파리 째로 먹어야 했고, 진정제와 모르핀은 자살을 원한다면 바로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서양 기독교 사회에서 자살은 금기시되는 행동이었기에 하지 않고, 끝까지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5]

일기를 보면 스콧이 가장 오래 살아남았다. 탐험 일지 마지막 페이지에 먼저 세상을 떠난 오츠 대위와 에번스 중사, 그리고 자신과 함께 마지막으로 남아 있다가 생을 마감한 헨리 바워스(Henry R. Bowers 1883~1912) 해병소위민간인 탐험가 에드워드 윌슨(Edward A. Wilson 1872~1912)의 아내와 식구들에게 사죄하는 글까지 써두었기 때문이다. 아내와 식구, 그리고 지인들에게 글을 쓴 스콧은 글 말미에 '침낭에 누운 채로 잠자듯이 영원히 눈을 감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저 홀로 남아있는 게 괴롭습니다...'라고 적어두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기기 위해 의도한 듯한 일기는 다음과 같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끝까지 버티겠지만 우리는 점점 더 약해지고 있다. 끝이 멀지 않았다. 슬프지만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다. - 스콧"

그리고 3월 29일에 스콧은 이 일기의 마지막에 한 문장을 더 써 넣었다.

"부디 우리 식구들을 돌봐주기를."

이 문장을 끝으로 스콧의 탐험 일지는 중단되어 있다. 세 명 모두 자연사했다. 그리고 약 8개월 남짓 뒤, 스콧 탐험대를 구조하기 위해 파견된 후발대가 스콧과 바워스 소위, 윌슨 세 사람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 후발대에는 지원대로 탐험 초기에 참가했다가 스콧의 지시에 따라 도중에 기지로 복귀한 7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 앱슬리 체리개러드(Apsley Cherry-Garrard/1886~1959)의 회고록에서 세 사람의 주검을 발견했을 당시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1912년 11월 12일 정오 쯤, 우리는 마침내 그들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혹독한 눈보라가 모든 걸 덮어서 거대한 눈구덩이로만 보였기에,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곳은 윈튼 캠프로부터 12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다. 말문이 막혔다. 눈을 헤치고 보니 천막이 보였다. 천막 위에는 약 2~3피트는 됨직한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천막이 무너지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그걸 보고 난 짐작했다. '이들은 죽었구나'. 천막 입구 바깥에는 두 쌍의 스키 스틱이 눈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작은 희망이라도 품고 천막 안을 열어봤다. 안에는 보워스 소위와 윌슨이 침낭 속에 누워 있었고, 스콧은 등을 기대어 앉아 있었다. 이름을 불러봤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셋 다 눈을 감고 잠을 자는 듯이 편안해 보였다. 윌슨과 보워스 소위는 기도하듯이 두 손을 가슴에 포개고 있었고, 스콧은 평생의 친구이던 윌슨에게 왼손을 내민 채로 굳어 있었다. 스콧의 곁에는 작은 가방이 있었는데 안에는 탐험 기록이 꼼꼼하게 적혀있는 세 권의 공책이 들어 있었다. 보워스 소위의 기후 관련 기록은 3월 13일까지 적혀 있었다.(중략)
해군 군의관 에드워드 앳킨슨(Edward L. Atkinson/1881~1929)이 고린도전서에 나온 장례식 구절를 손수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마지막으로 있던 자리에 그들을 묻었다.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장례식을 끝내고 보니 어느 새 자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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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마지막 남은 세 사람도 남극에 묻혔다. 극지방에서 죽은 다음 추위 속에 장기간 방치된 시체는 100~200㎏이 넘는 무게가 나가기 때문에, 시체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도 무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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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들의 유품은 영국 탐험대의 전초 기지였던 윈튼 캠프(사진)로 옮겨졌고, 이 오두막은 탐험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스콧 탐험대 기념관'이 되어 있다.

여담으로, 스콧 탐험대는 마지막까지 자신들이 저장고에서 17.7㎞ 떨어져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사실은 서쪽으로 800m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제대로 방향을 잡아 800 m만 더 갔으면, 조금이나마 식량과 연료를 얻어서 생환했을지도 모른다. 전초 기지인 윈튼 캠프까지는 19.3㎞만 가면 되는 위치였으니...물론 눈보라와 추위 속에서 겨우 800 m가 그들에겐 800 km처럼 느껴졌을테지만 이걸 알았더라면 희망으로 힘을 냈을테니 후세에 안타까움을 준다고 하지만 눈보라가 불어닥치면 800 m는 별것도 아니다가 아니라 무척 어렵다. 1960년대에 실제 일본인 남극탐사기지대원이 볼일이 있어 잠깐 나갔다가 눈보라로 인해 20 미터도 안되는 곳에서 길을 잃고 100 미터 가까이 엉뚱한 곳으로 갔다가 결국 동사한 실화가 있는 걸 봐도.

4 그 후의 이야기

스콧 원정대가 추위 속에서 절망과 고통으로 생을 마감할 때, 아문센 원정대는 개 41마리를 잡아먹어서 잃은 것을 제외하고[6] 이미 전원 무사히 아무도 다치지 않고 돌아왔기에 노르웨이에서는 당시 국왕이었던 호콘 7세(1872~1957)가 탐험 성공을 치하하는 등 나라 전체가 잔치 분위기였다. 그야말로 세계의 예상을 뒤엎은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영국을 제외한 세계 언론은 아문센의 기적같은 대승리[7]를 축하하고 보도했다. 무엇보다 영국을 아니꼽게 보던 프랑스에서는 좋아라 하며 아문센에게 몰려와 축하해 주면서 아문센의 탐험 성과를 상세하게 보도했다.

물론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당시 최강대국인 영국은 유럽에서 새로 등장한 신생국 노르웨이(노르웨이는 1905년에 스웨덴으로부터 겨우 독립했다.)에게 졌다는 게 분통이 터져[8] 아문센을 어떻게든 깎아내리려고 언플에 나섰다. 탐험 도중 개를 잡아 식량으로 썼다는 말을 듣고는 영국 신문들은 '개를 잡아먹는 야만인', '개, 남극점에 도달하다'라는 제목으로 깠고, 심지어 아문센의 탐험에 귀중한 조언과 경험을 전수해준 이누이트들을 '날고기 먹는 놈들'이라는 비하적인 명칭인 에스키모로 칭하며 도매금으로 비난하는 추태를 저질렀다. 犬eat

아문센은 "그럼 추위와 굶주림 속에 죽어가면서 개를 보호하고 싶냐?"탐험 알지도 못하는 놈들아 너네들이 와서 함 해볼래?라며 영국 기자들을 비꼬았고, 이 일갈에 영국 기자들은 제대로 반론도 못했다. 사실 아문센의 동료이자 개훈련 담당이던 할머 한센은 당연히 직업상 개를 무척 아꼈지만 그조차도 개고기를 조금 먹어야 했기에 아문센에게 불만을 가졌으나 그렇다고 영국 기자들 앞에서 동조하는 짓은 안했다. 되려 개들의 숭고한 희생을 더럽혔다며 영국 기자들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그 밖에도 영국 언론은 몰살당한 스콧 탐사대를 기리고 슬퍼하면서 스콧 일행을 우상화하는 감정적인 보도를 쏟아냈다. 스콧을 자상한 인품과 강한 의지를 동시에 지닌 이상적인 인물이었다고 보도하면서 은근히 아문센이 성질 더럽네 어쩌네 하며 은근히 까내리는 것도 잊지 않았고, 탐험 초기에 이탈한 요한센의 예를 들어 독선적인 고집불통이라고 계속 공격했다. 그러나 아문센 VS 스콧 문서를 읽었으면 알 수 있듯이 오히려 아문센은 스콧의 탐험에 계속해서 충고와 도움을 주었으나 그것을 무시한 건 스콧 본인이었으며 게다가 같은 나라의 동료인 어니스트 섀클턴에게 보인 이기적인 태도를 보면 오히려 이러한 영국 언론의 비난은 스콧 본인에게 가야 할 것이었다.

이외에 영국 정부는 계속 아문센과 스콧의 업적을 동일시하려고 온갖 로비를 벌였다. 이 영향은 지금도 계속되어 남극점 코앞에 조성된 미국 기지가 '아문센-스콧 기지'로 명명되어 있는 것은 물론 남극점 위치 푯말에도 1등인 아문센과 2등인 스콧의 이름이 같이 새겨져 있다. 등산가 고(故) 박영석(1963~2011)은 생전에 남극점 탐험에 나선 뒤 이 푯말을 보면서 '당시 아문센이 2등을 했다면 과연 이렇게 같이 이름이 적혀 있었을까?'라고 회고한 적도 있다.[9]

영국의 힘빨도 컸거니와, 스콧 일행은 하여튼 모두가 생환하지 못했다는 동정표 및 그 와중에도 틈틈히 기후를 꼼꼼하게 기록하면서 마지막까지 광물과 온갖 자료를 소중히 간직하며 죽었다는 점으로 남극점만 가려던 아문센보다 더 성과가 많다는 점으로도 부각되었다.

그래도 굳이 변호를 해 보자면 적어도 스콧이 노력한 남극 생태 광물 및 기후, 빙하 연구같은 분야는 무시할 수 없다. 남극에 사는 펭귄들, 그 중에서도 황제펭귄 연구는 스콧이 처음 시도했던 점이다.

하지만 마냥 변호만 해 줄 수도 없는 게 다음과 같은 일화다. 스콧은 남극에 먼저 기지를 만들고 준비를 다했건만, 기지 주변의 기후 및 빙하 연구에서 눈보라 속에 나가 펭귄들 생존과 생활방식을 연구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소비했다. 심지어 알을 가져와 크기와 그림을 다 그리고 보니 블리자드가 불어닥쳤는데 스콧은 "이걸 찾느라 어미 펭귄[10]이 얼마나 상심이 크겠냐"면서 바워스와 같이 나가 둥지를 찾으며 헤매다가 기지 근처에서 조난당해 죽을뻔했다.

실드를 치자면 목숨을 건 탐구정신이지만, 탐험대장이 펭귄 알 돌려 주러 갔다가 목숨을 잃을 뻔 했다! 같이 간 인물들에게는 심히 민폐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덤으로 그들이 몰랐던 점이긴 했지만 부모 품에서 빼돌린 팽귄 알을 돌려준다는 것 자체가 의미없는 발상이었는데, 부모 팽귄의 품에서 떨어진 팽귄 알의 생존률은 급추락한다. 아비 팽귄/어미 팽귄이 가장 유의하는 게 혹시라도 알이 자기내들 품에서 떨어져서 추위에 노출되는 건데, 이는 남극의 혹한에 알이 접촉하면 얼어죽을 가능성이 있어서(...) 즉 사람 손에 빼앗긴 덕에 아비 품에서 제대로 된 온도유지를 못 받은 알인만큼 나중에 가서 팽귄 부모한테 무사히 돌려줬다고 해도 이미 알 안의 새끼는 제대로 된 보온을 못 받아 죽어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그냥 멀쩡한 알을 부모한테서 떨어뜨리지나 마[11]

기억해야 할 것은 스콧은 탐험대를 이끈 인물이었고, 탐험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업적이나 탐사가 아니라 생존과 생환이다. 섀클턴이 왜 그리 칭송받는 지, 아문센이 왜 지고의 탐험가로 남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섀클턴은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며 기적적인 생환을 할 수 있었고, 말년에는 판단을 잘 못 하긴 했지만 아문센은 최악의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는 최고의 탐험대장이었다.

반면 승리자인 아문센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되려 부정적인 면이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같은 시대를 살며 북극점을 먼저 정복한 로버트 피어리이누이트 원주민에게 저지른 잔악한 행위로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것과 달리, 아문센은 승리에 대한 욕망이 크기는 했지만 원주민들과 친하게 지냈고 사생활적으로도 그다지 부를 탐하지 않았고 경쟁자였던 스콧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탐험 인생 내내 원수 지간이던 움베르토 노빌레를 구하고자 나섰다가 사고로 생을 마친 점을 보면 사람됨됨이도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대인배스럽다.

사실 스콧이 남극점 정복에 무리하게 나선 것도 한때 자신의 수하였던 어니스트 섀클턴이 비록 남극점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큰 성과를 얻고 남극 탐험을 마치자 열폭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저서에서는 섀클턴을 변변치 못한 인물로 까고 있는데, 탐험대의 리더로 놓고 본다면 섀클턴과 스콧 사이에는 넘사벽의 기량 차이가 있다. 훗날 아문센이 섀클턴을 '나는 그 상황에서 그렇게 못 해냈을 거다'라며 칭찬했던 것을 비교하면 인격가지고 스콧과 아문센을 비교해도 절대 스콧의 손을 들어줄 수는 없다.

거기에 스콧과 아문센이 남극점 정복을 위해 각자의 베이스 캠프와 보급기지를 만들고 준비하던 시기, 나름대로 훈훈한 분위기에서 서로 조언을 하고 충고를 해주며 교류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스콧이 침낭에서 자다가 벌떡 일어나며 '아문센은 영국 영토에 침범한 것이니 붙잡아서 귀국시킬 수 있었는데 기회를 놓쳤다'라고 하며 매우 아까워하기도 했다. 스콧이 베이스 캠프로 삼은 그레이트 보빙 아이스 지역은 스콧과 섀클턴이 발견한 지역이므로 영국 영토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그 지역은 영국령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이딴 찌질한 수단으로 상대방을 해코지하려 했다는 것부터가 신사나 페어 플레이에서 한참 벗어난 발상이다.

스콧에게서 그나마 평가해 줄 만한 부분이 있다면 위에도 나온 과학적 탐구정신 정도일 것이다.[12]

더불어 세월이 지나면서 1970년대부터는 아문센이 지나치게 저평가되고 있다는 주장과 인식이 크게 떠올랐고, 반대로 아무리 스콧이 인정이 많았고 과학 탐사에 기여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더라도 스콧의 무능이 대원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스콧의 탐험에 대한 비판 여론이 강해지고 있다. 심지어 사실 스콧이 살려면 살 수도 있었는데 남극점 최초 도달 기록을 빼앗긴 패배자로 살기보다는 순교자로 기억되기를 원했고 죄 없는 동료들도 함께 고의로 죽음으로 몰고갔다는 극단적인 평가까지 나올 정도다.[13] 오히려 남극점에 도달하지도 못했지만, 현명한 판단력과 강한 의지로 전원 생환에 성공한 섀클턴이 재조명되고 있다.

심지어 '스콧은 일기를 잘 써서 평가가 높아졌다'는 주장까지 있다. 자신들이 겪은 스스로 자초한 고난을 구구절절하게 문학적으로 서술하며 최후까지 가는 스콧의 마지막 일기에 비하여, 아문센의 남극 회고록은 아무래도 아문센 본인이 애초에 탐험중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지는 않아서 일반인들 관점에서 흥미로운 지점[14]이 없고, 실용적인 성품이다보니 문체 자체도 비교적 서술이 건조한 편이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 나온 저술에서는 스콧의 실패는 곧 대영제국의 몰락과 연계시키는 연구까지 나오는데, 남극에서 망해서 저주를 받았다는 식은 아니고 스콧의 오만함과 무계획성, 그리고 소통의 부재가 이후 20세기의 영국이 벌인 여러 병크를 연상시킨다는 것으로 상당히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이론이다.

2000년대 이후에는 또다시 스콧의 탐험에 대하여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긍정적인 평가는 아니며 되려 과거처럼 어거지로 스콧 미화라는 이름의 재평가라는 비아냥도 있다. 사실 탐험에 대한 재평가로서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건 이미 100년전부터 열심히 홍보하곤 했었다.즉 재평가가 미화 재방송

WWF(세계 자연보호 기금)의 창립자 중 한 명이자 자연주의 화가였던 아들 피터 스콧(1909~1989)은 아버지가 죽을 당시 세 살이었는데, 어머니인 캐슬린 스콧/1878~1947-(원래 성은 브루스) 나중에 힐턴 캔넷 남작(1879~1960)과 재혼하면서 캐슬린 캔넷이 된다.)과 의붓아버지 켄넷 남작의 배려로 자연과 친숙하게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훗날 가족들과 남극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아버지가 탐험대원들과 함께 케이크와 바다표범 고기로 생애 마지막 잔치(생일잔치라고 알려졌는데 생일잔치가 아니라 남극 기지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미드윈터스 데이를 즐기는 잔치 자리이다.)를 즐겼던 윈튼 캠프(전술한 스콧 탐험대의 전초 기지)가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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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6월 22일 미드윈터스 데이 당시 사진(굵은 글씨가 스콧과 마지막을 한 이들이다.) 사진 속에 나온 사람들은 앉아있는 왼쪽부터 데버넘, 오츠 대위, 미어스, 바워스 소위, 체리개러드, 라이트, '스콧 대령(가운데), 윌슨, 심슨, 넬슨, 에번스 중사, 데이, 테일러. 그 밖에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은 앳킨슨, 오른쪽 서 있는 사람은 글렌.

다들 보면 누구도 울적하거나 심각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운명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 누가 겨우 몇 달 뒤에 실패와 절망 속에서 이들 중 5명이 생을 마감할 것이라고 예측했을까?

5 미디어

일본에서 나온 학습 애니메이션 미미의 컴퓨터 여행(ミームいろいろ夢の旅(원제목은 미무와 여러가지 꿈의 여행)/1983. 우리나라에서는 1986년에 KBS-1에서 방영했다.)에서는 아예 아문센 이야기와 함께 스콧 편을 따로 만들기도 했다.여기서도 스콧 편을 더 비중있게 만들어버린 게 문제...같은 섬나라라 그런가? 일본과 영국은 정치체제상 같은 군주국에 통행방식도 같고 영국을 좋아하는 경향이 강하긴 하다.헌데 노르웨이도 왕 있는 군주국이잖아.

1985년 영국에서 The Last Place on Earth (지구의 마지막 땅)라는 제목으로 아문센과 스콧 탐험대에 대한 미니시리즈를 제작했고 한국에서는 MBC를 통해서 방영된 바 있다. 영국 배우 마틴 쇼가 스콧 역을 맡았고 이하 영국, 노르웨이 배우들이 대거 참가한 작품인데.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스콧 탐험대의 병크를 많이 줄이고 아문센의 철저한 계획부분을 그냥 넘어가버린 게 흠이다. 다만 위인전 이상으로 스콧 탐험대의 비장한 최후를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6 기타

파일:캡틴스콧티.png
영국인답게 이 사람의 이름을 딴 홍차인 Captain Scott Tea(스콧 탐험대장 차)가 있다. 자세한 것은 홍차 항목 참조.

자손으로 피터 스콧이 있다. 올림픽 요트 선수 및 자연사학자, 자연 보호론자로 활약했는데 2차 세계대전때 선박의 위장도색으로도 유명했다

7 관련 링크

  1. 아문센도 뒤끝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공사를 혼동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인간이 계획도 엉망진창으로 세우는 인간이라는 게 바로 다름 아닌 탐험에 말 잔뜩 끌고 간 것 이다. 이미 실패했던 탐험가들이 있는데도 아문센이 개 끌고가니 나도 질수없뜸. 나는 말 끌고 남들이 못했던 것도 성공해서 이름날릴 거임! 이었단 거다(...). 보다못한 아문센이 그러지 말고 개 데리고 가는게 낫고 잘못하단 말도 죽고 너까지 죽는다고 조언을 해줬지만 그걸 난 너보다 더 나으니 조언해 준다 로 잘못 알아듣고 신경도 안 썼다. 그 결과는? 아문센 말(言)대로 말(馬)은 말(馬)대로 다 죽고 스콧도 스콧대로 추위에 떨다가 세상을 하직했다.
  2. 당시 영국 육해군은 유능한 장교를 위험이 득실대는 데다가 군공을 전혀 세울 수 없는 여행이 분명할 탐험대로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일례로 스콧 탐험대의 대원 중 한명인 육군대위 로런스 오츠의 경우는 꽤 유능한 장교였으나 다리의 총상으로 더 이상 제대로 된 군복무를 하기 힘든 지경이 되어 스콧 탐험대의 대원이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무능하거나 뭔가 결함이 있는 인원이 탐험대로 선발되었다.
  3. 사실 그 전에도 뇌진탕의 후유증으로 정신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스콧의 일기를 보면 잘 나와있는데 바쁘게 가는 길을 가로막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횡설수설했다. 외국에서 제작한 미니시리즈에서는 완벽히 실성한 모습이 리얼하게 방영되어 충격을 준 바 있다.
  4. 오츠가 쓰던 침낭은 구조를 위해 파견된 후발대에 의해 회수되었고, 케임브리지의 스콧 극지 연구협회에 전시되어 있다.
  5. 실제 죽음의 원인도 전원 동사, 즉 얼어죽은 것이다. 사실상 자살에 가깝게 죽은 사람은 오츠뿐인데 자살이라기보다는 동료들을 위한 희생이었고 후일 찢어진 침낭이 발견된 걸로 봐서는 그 와중에도 살려고 몸부림친 것이 확인된다. 즉 인생이 절망스럽다고 포기하고 죽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는 뜻이다.
  6. 잃었다 하기도 뭐한 게 잡아먹을 것을 상정하고 데려간 거라...
  7. 하지만 아문센 VS 스콧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사실 스콧이 이기는 게 더 기적이었고 아문센이 이기는 게 당연했다
  8. 무리일수도 있겠지만 비유하자면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과학자가 냉전 몰락 후 유고슬라비아나 소련 연방에서 독립한 동유럽 신생국 나라의 과학자와의 과학 연구 경쟁에서 패한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9. 자신들이 무조건 세계 최초가 되어야 한다는 제국주의 시대 영국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다른 예로, 과거 영국이 에베레스트 등정에 도전한 조지 말로리와 앤드루 어빈의 유해를 찾으면서 동시에 그들이 가지고 간 카메라 기록에 집착한 것도 해당된다. 뉴질랜드 출신의 에드먼드 힐러리와 (자기들이 보기엔 하등 원주민인)텐징 노르게이가 이룩한 에베레스트 최초 정상등정 기록에 대한 반감으로 어떻게든 정상 등반이 촬영된 카메라 기록을 찾아서 맬러리와 어빈을 1등으로 만들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힐러리는 지금도 여전히 영국에서 영웅 취급받고 있어서 반박하는 의견도 있다. 어쨌든 당시 뉴질랜드는 아직 영국 땅이었으니...)
  10. 실은 애비 황제펭귄이겠지만 당시만 해도 어미 펭귄으로 알았다.
  11. 뭐 알았다면 그럴리도 없었을테고 스콧 자신이 학자도 아닌데 그걸 그리도 잘 알았을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12. 물론 그나마도 무리한 모험 때문에 자신과 탐험대를 죽음으로 몰아넣음으로서 이마저도 묻혀질 뻔했다. 스콧 탐험대를 구조대가 찾아내지 못했더라면 스콧의 기록도 영영 묻혀진채로 사라졌을 테니.
  13. 책 '죽음에 대한 잡학사전'의 평가.
  14. 흥미로운 이야기가 되려면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 되어야 하는데 너무 탐험을 잘해서 초반에 너무 빠른 출발이라는 실수를 한 것 정도 빼면 애초에 위기라고 할 만한 위기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