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호

1932 ~ 2006. 11. 19

대한민국군인.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납치되어 전사자로 처리되었다가 무려 43년 만에 탈출하여 대한민국에 귀환한 인물.

부유한 가정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대한민국 국군에 자원 입대, 갑종간부후보생으로 소위로 임관하여 육군본부 직속 포병 101대대 관측담당으로 참전하였다가,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힌 뒤 북한으로 끌려갔다.

이후 북한군에 편입되었으나, 1952년 동료 포로들과 탈출을 계획하다가 정치부에 발각되어 월남기도와 반동분자의 혐의로 13년간 서흥, 덕천, 함흥, 아오지, 강계 광산 등지의 강제 노역소에 복역하였다.

13년 동안의 강제 노역소 생활을 마친 후에는 자강도에 광부로 배치되어서 노역에 동원되었으며, 오랜 광산에서의 노역으로 인해 지병인 규폐증을 얻게 된다. 하루 10시간여의 중노동에 동원되었으나 일일 식량 배급량은 고작 300그램 정도였다.

이후 규폐 증세가 심해져서 산간마을로 보내지게 되었는데 거기서 알게 된 중국 상인을 통해서 귀환을 결심하게 되고, 목선을 타고 중국을 통해 북한을 탈출하여 해상을 표류하다 1994년 10월 23일 새벽 대한민국 수산청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출되었고, 병원에 입원하여 가족 상봉을 하였다.

곧이어 그는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지고, 같은 해 10월 25일에는 입원한 병실을 찾아온 국방부 장관에게 귀환을 보고하였으며, 10월 27일에는 육군참모총장에게 귀환을 보고하였다. 11월 25일에는 국립 현충원에 있는 현충탑 지하 영현 봉안실의 대리석 위패에 새겨져 있는 자신의 이름을 손수 지웠다. 왜냐하면 전쟁 중에 실종 처리되었다가 1977년에 전사자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날 중위로 진급하고, 군인 정신에 귀감이 된 점을 평가받아 보국훈장 통일장을 받았다.

11월 26일에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역식을 가짐으로써 43년 3개월이라는 최장기록의 군생활을 마감하였다.[1]

그는 한국전쟁 당시에 포로로 잡힌 많은 국군포로들이 여전히 북한에 생존하고 있음을 증언하였고, 이는 북한에 생존해 있을많은 국군포로들과 강제 납북자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들이 처한 참혹한 인권환경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말년에 그는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 북한에 남아 있는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의 생활상을 증언하고 그들의 귀환을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

2006년 11월 19일, 북한에서의 오랜 노역으로 인한 지병이 악화되어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영면하였으며, 11월 21일에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전역식에서 길고 참담했던 북한 억류생활을 이겨낸 힘은 신앙심과 전쟁터에서 배운 군진 수칙이었다고 회고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포로 가운데 320여 명이 회유와 협박에 굴복해 전향한 사실에 비춰볼 때 그가 40여 년 만에 탈출해서 돌아온 것은 군인정신의 귀감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에 대하여 영화로 만들어진 게 바로 알바트로스이다...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괴작으로 묻혀졌다.
  1. 전사자로 처리되었을 뿐, 전역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귀환 순간에도 현역 군인의 신분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대위 이하의 정년은 43세로 정한다는 대한민국의 군인사법 규정에 따라 중위 진급 후 바로 전역하였다. 이 외에도 대한민국 군 인사법에서 명시한 근속연한도 40년까지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