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dith Lynne Sill | |
출생 | 1944년 10월 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
사망 | 1979년 11월 2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데뷔 | 1971년 1집 Judee Sill |
1 소개
2 생애
2.1 불우한 어린시절
주디 씰은 1944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 90년대 이전 자료에서 할리우드 카메라맨으로 묘사되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사실 희귀생물, 특히 파충류를 거래하면서 동시에 술집을 경영했던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영화계에 파충류를 조달하면서 할리우드와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1952년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가업을 이은 오빠도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만다.[1] 얼마지나지 않아서 어머니는 한나-바바라 (Hanna Barbara)라는 애니메이터 켄 뮤즈 (Kenneth Lee Muse)와 재혼했고, 이 결혼은 그녀의 인생이 어긋나는 출발점이 되었다. 전부터 술에 의존하며 살던 어머니는 재혼 후 더 심해졌고, 새 아버지는 권위적인 남자였다.
이미 술과 약물, 섹스까지 경험한 주디는 15살에 첫 결혼을 했고, 남편은 무장강도였다. 부부는 상점 등을 털다 결국 경찰에 붙잡혔고, 첫 남편의 운명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미성년인 주디 씰이 소년원으로 보내진 것은 확실하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이곳에서 그녀가 음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훗날 관계자들이 '천재적'으로 묘사한 음악적 재능을 스스로 발견한 것이다. 주디 씰의 앨범들을 제작한 '헨리 루이 (Henry Lewy)'는 그녀가 어떤 장르의 음악이건 한번만 들으면 기타로 옮길 수 있었다고 기억했다.
불행하게도 음악에 대한 관심보다 더 빠르게 성장한 것은 약물에 대한 의존이었다. 이 시기 두번째 남편인 피아노 연주자 '밥 해리스 (Bob Harris)'[2]를 만났지만 그 역시도 중독자였다. 약을 구하기 위해 주디 씰은 몸을 팔기도 했다. 이 충격적인 사실은 본인 스스로 '롤링 스톤' 인터뷰에서 밝힌 것이다. 결국 생사를 넘나드는 상태가 되었을 때 소년원이 아닌 진짜 교도소에 수감된다. 이곳에서 반강제로 금단치료를 받은 후 풀려난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미 두번째 남편과 이혼한 그녀는 당시의 변호사와 연인으로 발전한다. 이후로도 수많은 남자들과 인연을 맺었지만 최근의 추적에 따르면 그녀는 양성애적 성향을 보였다고 한다. 본인도 딱히 숨기는 기색도 아니였다고.
2.2 데뷔
인생의 첫번째 기회는 당시 미국의 유명 록밴드인 '터틀스 (The Turtles)'의 베이시스트이며 친구인 '짐 폰스 (Jim Pons)'의 소개로 밴드에 자신의 곡을 팔면서 찾아왔다. 자신의 데뷔앨범에도 수록된 "Lady-O"를 터틀스가 녹음했고, 밴드의 저작권대행사는 주당 65달러에 그녀를 고용했다.
이번에는 '데이비드 게펜 (David Geffen)'과 '그레이엄 내시 (Grahm Nash)'가 주디 씰을 지목했고, 드디어 염원하던 첫 앨범 'Judee Sill'이 발매된다. 평가는 대체로 우호적이었고, 주디 씰과 함께 작업했던 관계자들은 그녀의 음악적 재능에 감탄에 감탄을 더했다. 특히나 작곡 능력이 고스란히 담긴 앨범이었다. 바다 건너 영국의 록 잡지들도 그녀를 주목했고, 시대도 여성 싱어송라이터에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첫 싱글이 라디오 네트워크에서 소폭의 인기를 끈 것을 제외하면 앨범의 상업적인 성적은, 그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실패였다.
눈앞에 다가온 것으로 보였던 성공은 여전히 신기루처럼 허황되어 보였고, 게펜 사단에 속해있는 다른 아티스트들의 오프닝 무대에 오르는 생활을 1년 넘게 지속했다. 1973년에 발표한 두번째 앨범 'Heart Food'는 데뷔작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전작보다 덜 매력적이나 감출 수 없는 재능은 여전히 생생히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 앨범 역시 그 누구도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시장에서 사라져간다. 이쯤되면 망했어요
2.3 죽음과 사후
곧바로 세번째 앨범의 녹음을 준비했으나 데모 제작 단계에서 중단된 작업은 결국 미완으로 끝나버렸다. 교통사고 때문에, 척추 교정 수술의 후유증의 결과라고도 하는데 어쨌든 신체적 신체적 고통을 덜기 위해 다시 약물에 손을 대면서 그녀의 음악인생은 막을 내리고 만다. 그리고 음악계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사라진 듯이 보였다. 그리고 6년 뒤 1979년 11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나이 겨우 35세였다. 사인은 약물 과용이지만 지금도 공식 사망 신고서에는 자살로 기록되어 있다. 음악적인 후견자였던 그래이엄 내쉬는 주디 씰의 사망소식을 듣고선 깜짝 놀랐다. 1974년에 이미 약물 과용으로 숨진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재조명 받기 전까지 주디 씰은 그냥 잊혀진 이름이었다. 70년대 초반에 남긴 두 장의 앨범은 이후 30년 내내 절판상태였다. 록의 시시콜콜한 뒷면까지 들춰내던 매체들에서도 그녀의 이름은 찾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주디 씰이 언더그라운드만을 전전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데뷔앨범은 음악산업의 마이너스라고 불렸던 '데이비스 게펜'이 설립한 '어사일럼 레코드 (Asylum Records)'의 첫번째 레코드다. 게펜이 자기 사단에 속했던 '잭슨 브라운 (Jackson Browne)', '이글스 (The Eagles)', '린다 론스태드 (Linda Ronstadt)', '조니 미첼 (Joni Mitchell)'을 제치고 어사일럼의 처녀작으로 선택한 것은 주디 씰의 데뷔 앨범이었다. 데뷔 싱글은 다름아닌 그래이엄 내쉬가 프로듀싱했다. 그만큼 게펜은 주디 씰의 성공을 확신했다. 그러나 2000년 출간된 게펜의 전기인 '수완가 (The Operator)'에는 주디 씰의 이름이 딱 한번 언급된다. 제대로 고인능욕
60년대 미국 변두리 개러지 밴드의 녹음까지 찾아내 발매하던 사람들도 주디 씰의 이름과 유산을 기억하지 못했다. 마치 그녀의 이름을 세상에서 지우려고 드는 거대한 음모론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확실히 주디 씰의 일생은 굳이 되살려내 기억해 주지 않는 것이 예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슬프고 어두운 면이 가득하다. 그 어두운 이야기의 자세한 내막들도 그녀 사후 20여년이 지난 후에야 확인되었다. 많은 부분이 밝혀졌지만 여전히 그녀의 인생의 중요한 대목에 대해서는 두가지 이상의 다른 증언이 존재한다.
3 평가
오늘 날의 시점에서 본 이야기지만,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이 스테디엄을 가득 메우고, 듀언 올맨(Duane Allman)과 짐 모리슨(Jim Morrison), 재니스 조플린이 아직(!) 살아있으며, 사람들은 비틀즈의 재결합을 의심하지 않은 채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의 새 앨범을 기다리는 시대는 27살의 신인 여성 뮤지션이 데뷔하기에 결코 적당한 시기가 아니다. 하지만 주디 실의 데뷔 앨범이자 어사일럼의 1호 LP는 1971년 10월 세상에 공개됐다.
워낙 걸작들이 줄을 이어 선보였고, 여성 아티스트들의 진출도 그 어느 해보다 왕성했던 만큼, 인지도가 낮은 신인 아티스트의 작품 하나가 시장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억울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주디 실의 데뷔 앨범은 다르다. 진지하게 이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본다면 왜 비범함과 정제된 매력으로 가득한 창작물이 발표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 30년 동안 그런 대접을 받았는지 의문과 분노를 동시에 가지게 된다.
대중적으로는 외면 받았지만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주목했던 동료들은 당시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적지 않다. 게펜과 내쉬, 터틀즈는 말할 것도 없고, 19살 때부터 팬이었다는 XTC의 앤디 파트리지(Andy Partridge)는 지금도 주디 실의 전도사 노릇을 하고 있다. 소닉 유스(Sonic Youth)의 짐 오루크(Jim O'Rourke)는 주디 실의 미발표 녹음을 모은 앨범을 직접 프로듀스 했다. [3] 워런 제본(Warren Zevon)과 플릿 폭시즈(Fleet Foxes)[4], 숀 콜빈(Shawn Colvin)은 그의 노래를 커버함으로써 애정을 표현했다. 엘튼 존(Elton John)의 프로듀서로 유명한 거스 더젼(Gus Dudgeon)도 데뷔 앨범을 들은 이후 팬이 됐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최소한 음반시장과 달리 음악인들의 기억 속에서는 생명을 이어나갔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주디 실의 음악은 당시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주된 흐름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시장의 경향과는 구분되는 독특함을 담고 있다. 그의 음악을 인수 분해하면 컨트리(Country)-가스펠(Gospel)-바하(Bach) 라는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질적 요소들이 튀어 나온다. 대부분의 싱어송라이터들은 포크에서 전향하거나 최소한 포크의 전통에 의존했다. 특히 여성 아티스트들은 그런 기반 위에서 재즈나 브로드웨이풍의 세련된 음악과 결합하는 사례가 많았다. 컨트리와 가스펠의 조합은 포크-재즈의 조합과 비슷하게 보일 수 있지만 매우 독창적인, 사실은 유일한 시도였다. 그러나 주디 실의 노래를 다른 모든 노래들과 구분해주는 특징은 바하에게서 빌려온 다양한 형식 실험들이다.
주디 실은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그가 자란 환경이 바로크 음악과 거리가 멀었음에도 푸가와 화성법을 풍부하게 차용해 대중적인 멜로디를 만들어 냈다. 일반적으로 록과 클래식의 조합은 프로그레시브나 하드록 밴드의 선택지다.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이 어설프게 그레고리안 성가를 흉내 낸 적은 있지만 포크와 클래식, 특히 바로크 양식은 권할만한 조합이 아니다. 관현악의 복잡한 구성과 웅장함은 마이크와 기타 하나로 무장한 싱어송라이터가 결코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디사이저가 일반화되기 전까지는 심포닉 록을 하려면 밴드를 구성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래서 프로듀서 헨리 루이는 풍부한 오케스트레이션과 보컬을 몇 겹으로 오버 더빙하는 방법으로 주디 실이 상상하던 사운드를 재현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최소한 음반 상에서는. 문제는 라이브에서 음반과 같은 사운드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디 실이 남긴 라이브 녹음(고맙게도 첫 번째 디스크에 보너스 트랙으로 들어있다)을 들어보면 이런 매력이 모두 사라진 채 그냥 예쁜 목소리로 노래 잘하는 여성 가수만이 남아있다. 동시대의 다른 경쟁하던 여성 싱어송라이터들과 차별점이 없는 것이다. 여기에 앤디 파트리지가 지적했던 것처럼 외모의 이점마저 없었다.
그러나 주디 실은 밴드와, 밴드의 음악을 경멸했다. 자기가 추구하는 음악은 결코 홀로 재현할 수 없는 사운드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순은 사운드뿐만 아니라 그의 음악 안과 밖에서 무수하게 발견된다.
음악적인 완성도보다 상업적인 성공, 그것도 어마어마한 성공을 바랬음에도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가사가 아니라 모호한 이미지로 가득한 노랫말을 만들었다. 복잡한 인생과정 때문이었는지 그의 노랫말은 종종 난해하고, 양면적이고, 상충하는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주디 실이 노래했던 주된 테마는 예수와 카우보이다. 그런데 예수는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아침에 눈 떠보니 침대 옆에 누워있는 남자로, 카우보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처럼 도통 누구 편인지 구분이 안가는 그런 존재로 묘사된다. 양자는 종종 한 노래 속에서 서로 결합된 형태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래서 예수는 정의를 위해 기꺼이 총을 난사하고, 카우보이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기 싫어 사막으로 도망간다.
인생 과정을 보면 이해가 가지만 그에게 기독교는 참회와 구원의 믿음이 아니라 흑마술과 성배기사단, 크로울리(Aleister Crowley)의 신비주의로 연결되는 통로였다. 아름다운 멜로디 뒤에 숨겨진 이미지들은 전원의 목가적인 풍경이 아니라 묵시론과 구원의 변형된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죄 많은 인생을 살았지만 구원에 대한 갈망은 그의 작품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그리고 총잡이 카우보이의 이미지는 짧았지만 강렬했던 십대시절의 결혼경험의 반영이다. 주디 실은 친구들에게 무장강도 남편과 함께 상점 등을 털기 위해 모텔 방 거울 앞에서 권총을 들고 연습을 하던 경험을 이야기하곤 했다. 이 폭풍 같은 삶의 경험은 그에게 사랑이란 보니와 클라이드("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같은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70년대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이 여성주의가 발흥하는 시대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여성 자신을 주체로 내세우는 경향을 보였는데 비해 주디 실의 노래는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거나, 남성 그 자체에 대해 노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최근 알려진 그의 양성애 성향을 고려하면 노랫말의 남성성은 외부의 존재가 아니라 주디 실의 또 다른 모습일 수 도 있다.
이토록 복잡한 내면을 지녔고, 또 이를 자신의 음악에 온전히 담으려 했기 때문에 많은 음악인들이 그를 추종했음에도 대중들에게는 폭 넓은 지지를 받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현지에서도 거의 잊혀졌다가 최근에서야 복권된 뮤지션이였기에 한국에서 인지도는 (...). 하지만 놀랍게도 정규 앨범 두장+미발표곡을 묶은 앨범 Abracadabra: The Asylum Years가 정식발매된 적이 있다. 상당히 저렴한 가격에 전곡 리마스터링+번역 가사집까지 증정하는 가성비가 쩔어주는 음반이기에 입문용으로 좋다.
4 디스코그래피
Judee Sill Discography | |
Judee Sill | Heart Foo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