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 역대 황제 | |||||
14대 신종 만력제 주익균 | ← | 15대 광종 태창제 주상락 | → | 16대 희종 천계제 주유교 |
묘호 | 광종(光宗) | |
시호 | 숭천계도영예공순헌문경무연인의효정황제 (崇天契道英睿恭純憲文景武淵仁懿孝貞皇帝) | |
연호 | 태창(泰昌) | |
성 | 주(朱) | |
휘 | 상락(常洛) | |
생몰기간 | 1582 ~ 1620년 9월 26일(39세) | |
재위기간 | 1620년 8월 28일 ~ 1620년 9월 26일(29일) |
명나라 15대 황제이자 만력제 주익균의 장남. 휘는 주상락(朱常洛)이다.
1 개요
중국 명나라의 14대 황제. 만력제의 장남으로, 정격안 등에서 보듯 상당히 위태로운 왕자(장자), 태자(계승자) 시절 테러 등을 가까스로 버텨내고 즉위한 인물.
주상락은 만력제의 장남이었으므로 엄밀히 그가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어야 했으나, 만력제는 정작 셋째아들이었던 삼겹살 주상순을 총애하여 그를 황태자로 옹립하려 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주상락이 19세가 되어서야 정식적으로 그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2 위태로운 제위
그는 즉위 직후 황실 내탕금을 들여 요동의 군사들을 위무하는 등 나름 국방과 내치에 자질이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제위에 오른지 한달만에 사망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항상 위태로운 태자였기에 태자비가 죽어도 비를 들이지 못하고 두 명의 이씨 측실만을 거느렸다. 야사에 의하면 정귀비가 일종의 화해의 제스처로 혹은 죽으라고? 4명 혹은 8명의 후궁을 보냈고 이것이 건강을 악화시켰다고 한다. 다만 신뢰도는 그닥. 결국 재위 29일만에 죽고 만다. 안습
두통과 복통을 호소하다 죽기 전날, 이가작이란 인물이 바친 붉은 환약(홍환)을 먹고 병세가 호전되는 것 같아서 하나를 더 먹었는데 그 다음날 죽었다고 한다. 이것이 홍환안이다. 역시 아직 살아있던 정귀비의 암살이 점쳐지지만 증거는 없었다.[1] 이를 보면 꼭 암군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결코 평범한 황제는 아닌 것 같다.
황제가 된 다음 우선 만력제가 각지에 파견한 광감세사를 정지시키고 모두 복귀시켰으며, 내탕금을 털어 국경 부근 가난한 지역의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다시 황실의 사고를 털어서 요동의 군사들을 위한 군량으로 보냈으며, 아버지가 태업을 하느라 결원이 생긴 부서에 인원을 충원하는 조치를 취한 것으로 봐서 황태자로 있는 동안 무엇이 문제였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백성들은 그의 짧은 조치만으로도 "성군이 왔다"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하긴, 48년이 길기는 길지..
3 연호
다만 1620년 8월부터 그가 죽고 지난 12월까지는 "만력 48년"이 아닌 "태창 원년"으로 불린다. 원래는 황제가 즉위한 해는 즉위년이라고만 하고 전 황제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며, 그 다음해부터 새로 만든 연호를 사용하므로 1620년은 만력 48년이고, 원래 태창 원년은 1621년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즉위한 해를 넘기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1621년은 그 다음 황제가 정한 천계라는 연호를 사용해서 천계 원년으로 쓰고있고 대신 1620년(정확하게는 태창제 사망 이후부터)을 만력 48년(태창 즉위년)이 아니라 태창 원년으로 사용한다. [2][3] 그렇지 않으면 태창이라는 연호는 아예 사용되지 않고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원래는 1620년 12월 31일 이전=만력 48년, 1621년 1월 1일 이후=태창 원년이 되어야 하는 것이 바뀌어서 1620년 7월 이전=만력 48년, 1620년 8월-12월 31일까지 태창 원년, 1621년 1월 1일 이후 천계 원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