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약
重商學派. 이용후생학파 또는 북학파라고도 하며, 조선 후기에 상공업을 중시한 실학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대표적인 실학자는 유수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가 있다. 이들은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달, 서양과 청의 선진 문물에 영향을 받았고, 농업에 기초한 유교적 이상국가론을 벗어나 상공업 진흥, 기술 혁신, 대외 무역 중시를 통한 부국강병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후의 개화사상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대표적으로 박지원의 손자가 박규수.
중농학파와 대비된다. 큰 줄기에서는 같지만.
2 유수원
중상학파의 주요 이론의 토대를 정립한 선구자.
위의 상공업 진흥이나 기술 혁신 같은 주장이 그에게서 처음 나왔다. 그의 사상은 그의 저서인 '우서(迂書)' 에 집대성되어 있는데, 이 책의 중심내용은 나라가 발전하려면 백성이 각자 맡은 일을 열심히 해야하는데 신분제의 고착화로 그게 잘 안되고 있음. 그러니까 사농공상의 구분을 신분이 아닌 평등한 직업으로 대하고 전문화해라! 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 '우서' 는 문답형식으로, 매우 논리적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당시 왕이었던 영조가 읽기도 했다! 영조 曰 ‘대체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저술은 선대 유학자의 말을 뽑아 모아서 기교만 부리는데, 이 사람은 자기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만을 기술하였으니, 참으로 귀하다’ 라고 할 정도니... 그밖의 주장으로 상인들이 연합하여 대자본을 형성해 규모를 늘리고, 생산과 판매를 직접 담당함으로서 상공업을 진흥시키자, 대상인이 학교와 교량, 방위시설 등을 건설해 지역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자 등이 있다.
여담이지만 유수원의 일생은 그야말로 안습... 관리가 되어서 영의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잘못보여 파직되었다. 다행히 복직되었지만 이미 세상은 노론의 세상...[1] 고위직으로 못 올라가고 작은 고을 수령으로 떠돌다가 심한 귓병까지 얻어 귀머거리가 되었다. '우서' 집필로 뜨긴 했지만... 후에 나주벽서 사건때 역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고 만다... 1908년(순종 2년)에 복권 되긴했지만 복권시킨 인물이 그 유명한 이완용[2]... 아아...전생에 뭔 죄를 지으셨길래...
3 홍대용
조선의 코페르니쿠스.
청년기 때 박지원, 박제가 같은 북학파들과 교류하였고, 35세 때 청으로 가 선진 문물을 접했다. 청으로 가서 연구한 것을 토대로 '의산문답(醫山問答)' 이라는 저서를 통해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를 돈다는 지전설(地轉說)과 우주는'무한하다는 우주무한론(宇宙無限論)을 주장했다. 실학자를 서술하랬지 과학자를 서술하라 했냐 지금보면 별거 아닌 거지만 이 주장은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엄청난 주장이다!!! 이게 뭔 소리인가하니, 지구가 한 곳에 멈추고 있지 않고 계속 움직이니 중심은 계속 바뀌는 것이고, 우주는 무한한데 그 중심이 지구라고 할 수 있냐? 따라서 중심 그런거 없다 라는 것. 물론 이것 가지고 홍대용이 중상학파인 것은 아니다. 홍대용은 과거의 철폐와 공거제[3]를 통한 인재 등용, 신분 관계 없이 8세 이상 아동을 전부 교육 시켜야한다 등 과감한 개혁을 주장했다. 엄연히 따지면 중상학파보다는 북학파라는 호칭이 더 어울리는 사람.
'의산문답' 외에도 여러 저서를 남겼는데 그 저서는 '담헌서', '사서문의', '건정필담', '주해수용'[4], '계방일기'[5] 이다.
4 연암 박지원
허생전과 양반전을 집필했으며 수레와 선박의 이용을 강조했다. 또 화폐의 유통도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