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심체요절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파일:Attachment/unesco-memoryoftheworld.gif
이름한글『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
영어[1]
프랑스어[2]
국가·위치국가 : 대한민국
위치 : 프랑스 파리
소장·관리프랑스 국립도서관
등재유형기록유산
등재연도2001년
제작시기1377년

1 개요

공식적으로[3] 현재까지 남은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

고려시대에 흥덕사[4]에서 만들어진 인쇄물로 정확한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흔히 직지심경[5], 혹은 직지로 축약해서 부르는 경우가 많다. 기록에 의하면 직지 이전에도 '남명천화상송증도가'[6], '고금상정예문(상정고금예문)' 같은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들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나 현대에까지 전해지지 않았기에 현재까지 남은 것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 이 직지뿐이다. 간행년도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간행한 성경보다 78년 더 앞선다.

상권, 하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현재 프랑스에 있는 물건은 하권. 상권은 한때 현상금까지 내걸고 찾는 물건이었으나 행방이 묘연하다.[7] 직지는 1900년 프랑스 만국박람회 한국관에 소개되기도 했으나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72년 외규장각 조선왕실의궤를 찾아헤매던 재불 역사학자이자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 박병선 박사에 의해 직지가 발견되었다. 동료들은 직지가 구텐베르크의 성서보다 더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박병선 박사의 말을 믿지 않고 철저히 무시했다. 결국 박병선 박사는 혼자서 연구를 시작했고, 한국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기어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임을 입증해낸다. 이로써 그녀는 직지대모로 불리게 된다.

2 직지의 역사

직지는 구한말 당시 주한 프랑스 공사이자 고서적 수집광이기도 했던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가 길거리에서 구입하여 여러 단계를 거쳐 국립도서관으로 보내진 것인데 1967년부터 13년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일하던 故 #박병선 박사가 외규장각 문서와 함께 발견하였으며 또한 박병선 박사에 의해 직지심경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부에서는 직지심체요절이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을 약탈하면서 이를 가져갔다고 말하기도 하나 개소리이니 상큼하게 무시하자. 외규장곽과 직지심체요절이 프랑스로 가게 된 바에는 하등 관계가 없다. 위에서 밝혔다시피 직지는 프랑스인이 합법적으로 구매해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보내진 것이지만, 외규장각 문서는 프랑스군이 약탈한 것이기 때문이다. 약탈과 구매는 엄연히 다르다.[8]

3 한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유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문서이지만, 인쇄술 면으로 보자면 가치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기본적으로 활자주조를 제대로 못하여 글자획의 굵기와 가늘기가 일정하지 않고, 어떤 글자는 기울어져 있고, 각 열이 곧지 못하고, 삐뚤빼뚤하고, 어떤 글자는 희미한데다가, 횟수의 일부가 제대로 찍히지 않았으며, 어떤 데는 윗열의 글자와 아랫열의 글자의 획이 맞물려 있는 등 조잡한 오류가 많다.[9]

지방의 중소사찰에서 만든 금속활자였기 때문에 완성도가 저조하다는 의견이 있지만, 이러한 인쇄기술 상 문제는 조정에서 직접 주조해 낸 계미자와 경자자로 찍어낸 조선 초기 인쇄본에서도 계속 드러났기 때문에 적절한 이유가 될 수 없다. 고려 말~조선 초 금속활자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쇄 문제는 활판에 밀랍을 깔고 활자를 심는 조판형태 자체의 한계로 인해 발생한 문제로 몇 번만 인쇄하다 보면 조판 전체가 흔들리는 치명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 인쇄작업량도 많지 않았고, 또한 이는 목판에 비해서 효율적이지 못한 방식이었다. 세종대왕 재위 중에 갑인자가 주조되기 이전까지는 해결되지 못했던 활자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따라서 본격적인 인쇄술은 1450년경에 만들어진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로 본다.

때문에 최초라는 것은 최고(最古)는 될 수 있어도 최고(最高)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말에 적합하다는 평이 있다.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종이인 한지는 경도가 낮고 흡습성이 너무 높아 금속 활자를 활용한 인쇄에는 적합하지 않았으며[10], 이러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특별한 먹(잉크)이 개발된 것도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활자와 활자, 활자와 활판을 조여주는 기술인 프레스 기술의 부재로, 금속 활자를 이용하면 오히려 효율이 떨어진다는 큰 문제점이 있었다.[11] 이러한 문제는 갑인자 주조 이후 어느 정도 해결되기는 하였으나, 당대의 기술 부족으로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여 인쇄가가 보편화되지 못했다.

또한 알파벳과 온갖 문장부호, 특수문자 등을 포함해서 약 60자 정도만 주조하면 되는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에 비해 한국의 금속 활자는 한자를 주조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실제 조선시대의 초기 금속활자 인쇄는 ‘인쇄본을 작성 → 인쇄본의 글자들을 그대로 활자로 주조 → 조판 → 인쇄’라는 과정을 거쳤는데, 이는 목판 인쇄보다 효율이 떨어지는 방식이었다.[12] 활자 인쇄라는 것은 수많은 활자를 미리 주조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즉시 조판해서 인쇄한다는 장점이 있는 방식인데, 위와 같은 과정에서는 이러한 활자 인쇄의 장점을 전혀 살릴 수 없었다. 대신 초주갑인자부터 한글 활자가 만들어 사용되고,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민간의 활자 제조가 활발해지면서 실록을 편찬하는 데 민간의 활자를 구입하였고 필요한 양을 나라에서 추가로 만들어 이용하기도 했다. 참조

그리고 이러한 금속 활자 기술은 한국의 전근대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맹점이 있다.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기 발명(1450년경) 이후 약 50여 년간 유럽 전역에서는 2천 만권 이상의 책이 인쇄되었고, 1500년대 초반 50여 년간에는 독일에서만 6천 만권 이상의 책이 인쇄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는 당대 유럽의 지성 세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 사회에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종교혁명 등과 같은 급진적인 사상적 발전도 이끌어낸 배경이 되었다. 반면 한국에서 금속 활자로는 하나의 책에 대해 적게는 10부, 많아야 80부 정도의 책을 인쇄하는데 그쳤으니 큰 반향을 이끌어 내었다고는 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에 대해 《조선의 뒷골목 풍경》의 저자인 강명관은 '최초임은 인정하나, 당시 기술의 한계를 명확히 직시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라 말했다.

4 기타

충북 청주시에 가면 직지라는 글자로 시내 이곳저곳이 도배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행정구 중 하나도 직지를 만든 흥덕사에서 이름을 따 흥덕구가 되었다.

과거 광화문 교보문고 입구에 직지심체요절이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라고 소개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기록상 최초의 금속활자본은 1234년[13] 인쇄된 상정고금예문[14]이다. 이는 이규보의 문집에서 직접 거론된 것이다. 다만 상정고금예문이 현재 행방불명 혹은 소실되었기 때문에 현재 존재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은 직지심체요절이 맞다.

2014년 8월 14일 방영된 비정상회담에서 미국인 타일러 라쉬는 병인양요때 가져간 게 아니라 프랑스 공사가 구매해 적법하게 가져간 것이라는 선후관계는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미국이 조선왕조의 어보와 인장을 돌려준 것처럼[15] , 프랑스측이 직지를 한국측에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미국측이 돌려준 조선왕조의 여러 보물들과는 달리 직지는 세계적인 유물이기에 프랑스측이 이를 들어주기는 어려울 듯.

2015년 직지심체요절의 저자가 백운경한 스님이라는 게 밝혀졌다.

직지심체요절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기념하고 세계기록유산 사업을 진흥하기 위해 '유네스코 직지상'(UNESCO/Jikji Memory of the World Prize)이 2004년 제정되었다. 2005년부터 2년마다 세계기록유산 보존·활용에 공헌한 개인/단체에게 시상하고 있으며, 상금과 비용은 청주시에서 부담하고 있다.##

  1. The second volume of "Anthology of Great Buddhist Priests' Zen Teachings"
  2. Second volume de l'"Anthologie des enseignements zen des grands prêtres bouddhistes"
  3. 2010년대에 발견된 증도가자의 년도가 더 앞선다는 주장이 제기 됐었으나, 검사 결과 증도가자는 위조로 밝혀졌다.
  4.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흥덕사지. 옆에 고인쇄박물관이 있다.
  5. 이 책은 불경이 아닌 요절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직지심경은 잘못된 표현이다.
  6. 현재 남은 건 후대에 간행된 목판본이다.
  7. 물론 금속활자가 아닌 목판본 직지는 완본이 남아있기 때문에 흥덕사 터에 세워진 청주고인쇄박물관의 주도 하에 목판본 직지의 내용을 바탕으로 금속활자본 직지 하권의 글자체와 판형을 본따서 상권 내용의 디지털 복원이 이루어졌고, 이후 실물활자를 전통방식 그대로 다시 만들어 상권을 복원할 계획이다.
  8. 9급 공무원 시험과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도 이 점을 노리고 문제가 출제된 바 있다. 둘 다 약탈과 관련된 문항을 고르면 틀리는 함정문제였다.
  9. 박문열,『고인쇄출판문화사론』, 피아이, 1999. 참조
  10. 글자가 종이에 제대로 인쇄되기 위해서는 종이를 활판에 압착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한지는 경도가 낮아 그렇게 하면 찢어지거나 잉크를 너무 많이 먹는 문제가 있었다.
  11. 반면 서양의 금속 활판은 프레스 기술의 완성으로 수백장을 인쇄해도 활판이 멀쩡했다.
  12. 인쇄를 할 때마다 주조를 새로 해야하니 비용도 어마어마하게 들었다고 한다.
  13. 흥미롭게도 이 해는 금나라몽골의 말발굽에 멸망한 해이다.
  14. 고려 인종 때 최윤의(崔允儀) 등 17명이 펴낸 유교의 예에 관한 책으로, 총 50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책은 조선 초기까지 남아서 고려사 예지(禮志) 편찬시에 주요 자료가 되었으나 현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려사와 조선왕조 실록에 책의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원래 고려 초기에는 고금상정례라는 예서가 있었는데, 고려 고종 때 내용을 보완해서 다시 내었다. 이 때 2부의 고금상정례가 편찬되어 한 부는 예관에게 보내어 정부에서 보관하고, 한 부는 이규보가 자신의 집에서 보관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몽골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를 하게 되는데 정부에서 보관하고 있던 고금상정례가 분실되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규보 집안에 있던 고금상정례를 가져와서 주자본(鑄字本)으로서 28부를 찍어 보관하였다. 이 책에서는 중국의 주자 예법과 고려의 전통적인 예법을 조화해 정리하였으며, 왕실 중심의 정치 질서를 보위하는 예제를 실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5. 하지만 조선왕조의 어보와 인장은 미군이 한국전쟁당시 혼란한 틈을타 궁궐에 들어와서 가져간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엄밀히 약탈이다. 따라서 단순히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