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활자

金屬活字

1 개요

말 그대로 금속으로 주조활자를 가리킨다.

2 발명

고려 숙종때인 1102년에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으나 정설로는 취급되지 않는다. 1234년 '상정고금예문'을 금속활자로 찍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공민왕때인 1372년, 직지심체요절을 인쇄하였으며 직지심체요절 한 본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직지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되었다. 최근에는 '증도가자(證道歌字)'라는 24자의 활자가 공개되어 그 연대를 놓고 논란이 일다가 사기극으로 판명났다.

3 활자의 역사

중국에 교니(膠泥) 활자라고 불린 것이 있었는데, 아교처럼 점성이 강한 진흙을 반죽해 구워낸 후 글자모양을 깎아 만드는 것으로, 재료가 흙이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부스러져 곧 사장되었다. 하지만 목판을 통째로 일일이 깎아야하는 데 비해 활자를 한 번 만들면 활판을 짜서 출판한다는 개념이 탄생했다는 점에서 서지학계에서는 상당히 중시한다.

그 외에도 나무, 도자기 등 내구성이 좋지않는 재료로 활자를 만들었기에 쉽게 파손되었으며 특히 목제 활자는 값이 싸지만 먹을 먹다 보면 쩍쩍 갈라지기 일쑤였다. 이때 고려에선 금속으로 만들어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금속 활자를 개발하였다. 목제 활자보다 제작과정이 어려웠지만 혁신적인 내구도로 거의 반영구적으로 사용 가능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금속활자는 일본, 중국 등으로 수출되었다.

4 한국에서의 금속활자의 의의와 한계

상정고금예문 (13세기) 등에 대한 기록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식적인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인 직지심경 (14세기) 등의 사례를 보아, 적어도 고려는 인류역사에서 금속활자인쇄술을 개척한 대표적인 선도국가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팔만대장경 등 엄청난 스케일의 목판인쇄술을 수행하는 측면에서 나타난 한계를 인식하고 극복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또한, 15세기 중반, 세종 대의 문화적 황금기에 기여한 측면에 대해서도 보다 살펴 보아야 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금속활자는 아래 이유들 때문에 성행하지 못했다.

4.1 기술적 한계

금속활자가 최초로 발명된 13세기까지는 활자끼리 맞물리게 하는 기술적인 부분이 미흡했기 때문에 밀랍으로 두 활자를 붙여서 찍어내는 불완전한 방식을 채택했으므로 한번에 통짜로 찍어내는데 무리가 많았다.
그래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밀랍대신 대나무로 만든 틀로 튼튼하게 글자틈을 메우는 방식을 개발하여 이 문제가 어느정도 개선되었다.

4.2 문자적 한계

한국의 금속활자는 주로 한자로 된 활자였기 때문에 아무리 글자당 한 개씩만 만들더라도 수천수만 가지 종류의 활자가 나오는데 이걸 일일이 맞춰서 인쇄를 하기에는 너무 불편했다. 더욱이 인쇄과정에서 중복되는 글자도 있으므로 대량인쇄는 사실상 어려웠다. 한글이 창제된 이후부터 한글 활자도 제작되어 여러 책들의 언해본들도 간행됐지만, 높은 수준의 학문서는 대부분 한자만으로 쓰인 것이 많았다. 여기에는 한글에 대한 양반들의 부정적인 인식도 한몫 하였다.

더욱이 한자를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계층은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충분했던 지배층에 국한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평민층들도 법적으로 과거시험에 응시할수는 있었지만 책의 가격도 비싸고, 생업을 제쳐두고 글자 하나하나 외우는 데 시간을 보내야 하니 경제적으로 크게 부담이 된다는 문제가 있었고, 이에 따라 서민들의 학문에 대한 관심도 부족했다. 그래서 천자문이나 소학같은 기초 교육서적을 제외하면 서민층에서 수요가 많지 않았다. 그래도 경서언해류는 어떤 왕이든 간에 꾸준히 찍어냈다. 문제는 어떤 책이든 인쇄한 양이 적어 필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또한 조선이 한자를 폐기하였더라도 한글패치 또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글은 음소문자임에도 마치 음절문자처럼 초성+중성+종성을 한 글자에 모아쓰기 때문이다. 즉 만드는 활자의 수는 줄일 수 있지만 그 뒤에는 문자조합이라는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ㅇㅣㄹㅓㅎㄱㅔ ㅍㅜㄹㅓㅆㅡㅁㅕㄴ(이렇게 풀어쓰면) 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데, 실제로 이런 장점들 때문에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로마자처럼 풀어쓰자는 주장을 주시경 선생 등이 하기도 했다.[1] 다만 이 방법도 문제는 있는게 이렇게 만들면 가독성이 매우 떨어진다. 이렇든 저렇든 한자보다 만드는 활자의 종류를 확연하게 줄이고 낭비되는 활자를 최소화 시킨다는 장점을 가지기 때문에 한자보다는 낫다.

다만 한글의 조합 문제는 대량생산을 고려했을 경우에 문제가 되지만 조선시대의 인쇄물은 한 번 조립하고 찍어내는 양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선 초기 병용한글자들의 경우 글자를 분리한 것이 아니라 유니코드처럼 완성형 글자로 하나하나 만드는 방법을 채택했다. 이러면 한자와 다를바가 없잖아 [2] 금속활자 자체가 목판본처럼 대량생산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에 글자를 하나하나 심고 소량 인쇄한 뒤 털어내는 방식으로 필요한 만큼만 활자를 만들었다.[3] 보통 어조사처럼 많이 쓰는 단어는 한 판에서 충분히 쓸 수 있도록 많이 만들고 인쇄가 끝나면 털어냈다. 한글 서적은 경서언해류, 외국어 학습서적 등 수요는 꾸준히 있었지만, 인쇄물의 양이 적고 이를 빌려 필사하는 문화였기 때문에 활자 수가 부족한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4.3 구하기 어려운 재료

원래 고려시대 금속활자는 으로 주조했는데, 납은 물러서 오래 쓰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세종대왕 때부터 활자의 재료가 구리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구리는 한반도에서는 중국, 일본과 달리 생산량이 너무 적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도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명나라를 중심으로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15세기경에는 명과 일본에서 구리를 어려움 없이 대량으로 수입하여 이용할 수 있었다. 위키백과의 '조선의 활자' 항목에 따르면, 세종 때 하루에 주조하는 활자 수는 약 3,500자로, 구텐베르크가 주조한 활자수의 약 10배에 달했다고 한다.[4] 그러나 16세기부터 명이 주변 민족으로부터 갖은 침략을 당하고, 조선에서도 왜구가 극성을 부려 대일 외교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조선에서 구리가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에도 침략에 대한 조선의 보복을 염려한 청과 일본의 불안감 때문에 구리가 조선 전기만큼 충분히 수입되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구리 가격이 비싸다 보니 저렴한 목판인쇄가 성행했다. 흔히 고서를 분류할 때 경판본(京板本), 완판본(完板本) 등으로 구분하는데, 경판본은 한양에서, 완판본은 완산, 즉 전주에서 목판본으로 인쇄되었다는 뜻이다. 이 외에도 안성과 대구에서도 목판인쇄가 성행하였다.[5]

임진왜란 이후로 책 수요가 늘어나 훈련도감에서 책을 찍어내기 시작했으나 활자가 부족해 훈련도감자를 새로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전후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아 이전에 있던 활자들을 섞어야 할 정도로 물자가 부족했다. 그 덕에 훈련도감에서 제작된 책에는 각종 활자들이 뒤섞여 있다. 물론 활자를 만들고 책을 찍어내는 것은 사병의 몫이었다. 훈련도감자 제작 원인이 잉여가 되어버린 병사들을 어떻게 써먹을까 하다 나온 것이다. 그만큼 활자 제작과 인쇄에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는 증거이다.

4.4 비활성화

조선후기가 아닌 이상 국가가 나서지 않으면 서적간행이 활성화가 잘 안될 정도로 활자사용이 낮았기 때문에 유럽같은 활성화를 바라기는 무리였다. 활자 사용 증가는 조선 후기 식량 생산량 증대 및 한글의 사용범위 확대와 겹친다.

5 유럽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본격적인 인쇄술로 인정받는다. 자세한 건 해당항목 참조.

6 기타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으로 공식인정을 받자 가장 반발하던 게 중국이었다. 물론 최초의 인쇄술은 중국에서 비롯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최대의 떡밥은 직지심체요절이 현존하는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이라는 부분이다. 이규보(1168∼1241)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에 1234년에 '상정고금예문'을 금속활자로 28부 인쇄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239년 이전에 금속활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존재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활자본이나 유물이 없어 인정 받지 못하고 있었다. 2010년 고려시대 활자라는 '증도가자'가 공개됐으나 아직도 진품인지 위작인지 논란이 뜨겁다. 2015년 2월에 들어서 직지보다 앞선 서기 1239년 이전에 제작되었다는 '증도가자'가 진품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아직 논쟁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증도가자'가 진품으로 인정되면 최소 138년 이상 금속활자의 공식 발명시기가 당겨지며 직지심체요절은 콩라인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2015년 10월, 국립과학수사원의 조사 결과, 증도가자가 위조로 밝혀지면서 논란이 사그라들것으로 보인다. 국과수 결과

2015년 11월 30일 남북역사학자협의회는 개성 만월대 발굴 조사에서 고려시대 금속활자를 발굴했다. 이 활자는 정확한 출토지와 발굴 경위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활자 제작시기는 만월대가 소실된 1361년 이전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비파괴 검사나 성분 분석 등을 거쳐 정확한 제작 연도가 확인되면 1377년 제작된 직지심체요절은 콩라인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중국은 배아파서 죽는다.

중국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직지심체요절' 이전의 금속활자본을 찾으려 눈에 불을 키고 있다. 1103년 발행된 '불설관무량수불경'(佛說觀無量壽佛經)을 금속활자본으로 주장했으나 금속활자가 아니라 찰흙활자가 사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1341∼1345년 사이에 인쇄된 어시책(御試策)이 금속활자본이라 주장했으나 일본 정가당(靜嘉堂) 문고에 소장된 어시책의 원본을 확인한 결과 1341년 편찬된 목판본으로 확인됐다.

중국쪽의 최대 떡밥은 원(元)나라의 왕정(王禎)이 1298년에 발간한 목판본 조활자인서법(造活字印書法)으로 이 책에서 남송(南宋) 시기의 금속활자에 관한 내용이 있지만 실제 유물과 원판이 확인된 적이 없어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중국에선 자기들이 세계 최초 금속활자를 만들었지만 현존하지 않는다고 교과서로 배운다. 증거가 있어야지

사실 중국 입장에서 억울할 만도 하겠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고려의 서적들에도 직지심체요절 이전에 금속활자본이 있었다고 적혀있으니까(…)[6] 일단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중국에서 만들었다는 정황 증거는 넘치지만 결정적인 물증이 없어 입증을 못하니 중국쪽에서는 답답해 죽을 지경일 것이다. 상당수 문화재가 해외로 반출되거나 분실된 것도 많지만 문화대혁명이라는 개소리로 당시 자기 문화재들을 마구잡이로 불태워고 부숴버린 게 두고두고 한 일 듯. 자기가 자기꺼를 부숴놓고 억울하다는것 자체가 웃기는데?

그리고 한국인들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본이 아니라 직지심체요절이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라고 발끈해하고 억울해하기도 하는데 직지심체요절 금속활자본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본이 가져온 변화를 비교해보면 이것 역시 단순한 열폭이다(…) 하나는 그냥 활자본의 교체 주기를 늘렸다면 다른 하나는 아예 인쇄술로 이어졌으니까. 이런 이유에서인지 2016년 교황이 고려 국왕 충숙왕에게 보낸 편지의 필사본이 발견되자 이를 근거로 고려의 금속활자가 서유럽에 영향을 줬다는 억지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자세한 얘기는 충숙왕 문서 참고.

7 관련 항목

  1. 한글을 풀어쓰면 '타자기'로 표현하기가 매우 쉬워지고, 컴퓨터분야에서도 기술적으로 매우 심플해진다. 다만 현대에는 완성형 한글 한개 한개를 모조리 유니코드에 때려박는 방법으로 해결했는데, 덕분에 한글은 유니코드상에서 한자 다음으로 많은 영역을 차지하는 크고 아름다운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2. 한글은 유니코드에서 11172자를 차지한다. 여기에 조선시대때 쓰였던 옛한글 표기까지 감안하면 더욱 늘어난다(…) 물론 거의 안쓰이는 문자들을 생략하면 줄여버릴 수는 있으나, 아무리 적게 잡아도 4자리수가 필요하다.
  3. 활자인쇄는 글자를 심고 나서 필요한 만큼 인쇄한 뒤 글자를 다 털어낸다. 목판본은 한번 새기고 나면 글자가 깨지거나 닳아서 판독하기 힘들 때까지 얼마든지 찍어냈다.
  4. 하루에 3,500자를 주조한 활자는 갑인자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졌고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정조때까지 주조되었을 정도로 조선의 표준 서체로 자리잡았다.
  5. 금속활자는 만들어진 해의 60갑자를 쓰지만 목판본은 주로 만들어진 지방이나 책 이름을 붙인다. 금속활자의 경우 중앙관청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중앙에서 만들어진 서적은 각 도로 전해져 목판을 새겨 다시 보급되었다.
  6. 뭐 당연한 이야기이긴 하다. 상단에도 적혀있지만, 문헌적으로 남아있는 상정고금예문의 경우는 직지보다 적어도 200년 가략 이르다. 문제는 현존의 여부. 증도가자와 직지가 싸우는 것도 현존의 문제다. 직지측도 증도가가 직지보다 먼저 나왔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현존하는 증도가 판본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목판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