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선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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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대모

朴炳善
1923년 3월 25일 ~ 2011년 11월 22일

대한민국역사학/종교학 박사이다. 종교가톨릭, 세례명은 루갈다.

일제강점기경성부에서 태어났다. 진명여자고등학교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1955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한국에서 유학 비자를 받은 최초의 여성이다. 소르본대학교에서 역사학, 프랑스고등교육원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병선 박사는 1967년 동백림 사건[1]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가 그녀에게 귀국을 종용하자 프랑스로 귀화했다. 당시 동백림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된 예술인들과 학자들이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생각하면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녀의 스승 이병도는 프랑스에 가게 되면 병인양요 때 약탈 당한 외규장각 조선왕실의궤의 행방을 찾아볼 것을 당부했고, 이에 따라 그녀는 프랑스 국립 도서관 사서로 13년 간 일하면서 1972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을, 1975년에는 외규장각 어람용 의궤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들 문화재의 가치를 입증하고 세계에 알리는 한편,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에 앞장서 2011년 5월 외규장각 도서를 모두 반환 받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6개월 뒤 세상을 떠났다.

귀중한 문화재 발견과 반환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2007년 국민훈장 동백장, 2011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였다.

2 업적

  •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하고,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임을 입증

1967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사서가 되어 스승 이병도의 당부에 따라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다니던 중 우연히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해 1972년 직지심체요절이 구텐베르크42행 성서보다 78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임을 입증하였다.[2] 당시 직지는 프랑스국립도서관 내에서 방치되어 있었고, 박병선 박사가 직지를 발견해 알리자 "말도 안된다"며 무시를 받았다고 한다. 결국 그녀는 혼자서 스스로 직지가 최초의 금속활자본임을 입증해내야 했다. 이 일로 2001년 9월 직지심체요절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게 하는 데 크게 공헌한다. 이 일로 그녀의 이명은 직지대모가 되었다.

그러나 도서관 내에서 그녀의 입지는 오히려 좁아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한국관에서 직지를 전시한 적이 있었지만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고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임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 언론에 "직지심체요절 발견"이라는 기사가 나가자, 도서관과 아무런 상의 없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그 사실을 공개했음에 분노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박병선 박사는 자리는 보전할 수 있게 되었다.

1975년 프랑스가 1866년 병인양요(고종 3년) 때 빼앗은 도서인 ‘외규장각 의궤’를 프랑스 국립도서관 베르사유 별관 창고에서 발견하였다. 이 사실을 알린 박병선은 프랑스국립도서관 측에서 사표를 강요받게 된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웬 외국인이 와서 자신들이 과거에 했던 약탈행위를 까발린 것이었으니 심기가 불편했을 수밖에. 이 때 박병선은 도서관에 사표를 내고 개인 자격으로 도서관에 매일매일 10여 년간 드나들며, 도서관 관계자가 책을 치울까봐 밥도 먹지 않고 연구에만 매진하였다. 이 때 도서관에서의 별명은 "파란 책만 들여다보는 여자"였다고 한다.[3] 당시 주불 한국대사관에서는 사무실 하나를 연구실로 내주어 지원했다. 그리고 그 연구결과를 <조선조의 의궤>라는 책으로 출간한다. 연구 후에도 수많은 반환 운동을 펼치게 된다. 결국 이런 노력으로 2011년 6월 대여 형식으로 프랑스에게서 외규장각 의궤를 145년 만에 돌려받게 된다.

외규장각 의궤가 프랑스에 있기 전 국내에 있던 의궤는 대부분 신하들이 열람하는 분상용 의궤였다. 반대로 프랑스에서 보관 중이던 외규장각 의궤는 표지가 파란색 비단으로 만들어진 어람용 의궤였다. 당연히 어람(御覽)이니 왕만 보는 의궤였다. 외규장각 의궤가 있다는 걸 몰랐던 국내의 학자들은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을 찾다보니 어람용과 분상용이 있었던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람용 의궤가 외규장각에 전부 소장되다 보니 국내에 어람용 의궤가 전혀 남아있지 않아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병인양요 이후에도 그 행적이 추적되지 않았는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외규장각에 있던 어람용 의궤들이 발견된 것이다.

어람용과 관상용 의궤 전부 내용에서는 큰 차이가 없지만, 어람용 의궤는 왕이 열람하기 때문에 분상용 의궤보다 더 화려하다. 어람용 의궤의 특징은 파란색/녹색 비단으로 표지를 만들고 초주지에 내용을 필사/인출했다. 당연히 인찰선은 붉은색으로 만들었고 책 겉에 변철[4]을 놋쇠로 만들었고 책을 고정하기 위해 박을정에 국화동 5개를 대었다.[5] 그리고 변철에 원활을 붙여놓았다. 왕이 보는 건데 당연히 신경 써서 만들어야지 어람용은 도감을 설치하고 의궤를 완성해서 폐지할 때까지 단 1권만 만든다. 분상용은 붉은색 베로 표지를 만들고 종이도 저주지를 쓰고 인찰선은 검은색으로 만들었다. 도감에서 어람용 의궤 1부를 만들고 분상용으로 최소 4~8부 정도를 필사/인출한 뒤 신하들에게 하사하거나 춘추관 또는 의궤가 필요한 기관에 배포했다. [6] 의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참조

외규장각 의궤는 본래 외규장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1782년에 강화도 외규장각을 설치해서 기존에 있던 어람용 의궤를 옮겨 보관하고 있었는데 1886년 병인양요로 인해 프랑스로 넘어간 것이었다. 외규장각 의궤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국내의 역사학자/서지학자 등 많은 학자들이 의궤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조선시대의 행사 등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7]

3 타계

2009년 직장 선고를 받았다. 이 때부터 병원에서의 투병을 시작하였다. 2011년 6월, 외규장각 의궤의 귀환을 확인하였으며 2011년 11월 22일로 타계하였다.

죽을 때까지 독신이였다. 정말 문화재 되찾기에 인생을 바친 인물인 셈.
  1. 중앙정보부가 독일과 프랑스에 체류 중이던 유학생과 교민 197명이 대남적화활동을 했다고 주장했던 간첩단 사건으로, 이후 확대·과장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 후술하겠지만 안타깝게도 되찾아오지는 못한다.
  3. 외규장각 의궤의 표지는 파란 색이였기 때문이다. 파란색인 이유는 아래에서 서술.
  4. 책에 오침을 뚫어놓은 부분.
  5. 장식적 측면이 강하다. 당연히 분상용 의궤는 그런 것 없이 박을정 5개만 박아버렸다. 조선시대를 포함하여 한국의 고서들은 전부 오침안정법을 따랐다. 책 오른쪽에 구멍을 5개를 뚫고 책을 엮는 방법을 썼는데 중국과 일본은 짝수개로 뚫었다. 주로 4개 아니면 6개를 뚫었다.
  6. 기본적으로 의궤는 5~9권 정도를 만드는데 대부분이 필사본이다. 대량배포가 필요하면 목판이나 활자로 인출했다. 인출된 의궤의 가장 대표적인 의궤는 원행을묘정리의궤이다. 배다리, 화성행차 등 7차교육과정 국사 교과서 등에 그림이 수록된 그 의궤 맞다. 이 의궤를 만드려고 정조가 정리자 제작을 지시했고 글자는 인출하고 그림은 목판으로 인쇄했는데 현재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박물관, 개인 등이 소장 중이다.
  7. 그러나 국내의 서지학자들은 중국/일본에 비하면 그 수가 극소수고 학문의 역사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아 연구가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의궤가 조선시대에 있었던 하나의 행사를 상세히 기록해놓은 책인데 조선왕조에서 행사가 한두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상세히 기록했으니 내용도 엄청나게 많다. 행사만 보더라도 관혼상제 뿐만 아니라 어보 제작, 책봉, 행차 등을 다 기록했다. 의궤 한 종류만 골라도 내용이 ㅎ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