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지 선정 지난 1천년의 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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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구텐베르크 |
Johannes Gutenberg
1398년 경 ~ 1468년 2월 3일
1 생애
독일 마인츠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 수 없지만 1397년이나 1398년이 유력하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마인츠에서는 1400년 6월 23일을 구텐베르크의 "생일"로 정해 대대적으로 축하했지만, 뚜렷한 역사적 근거가 있어서 정한 날짜는 아니다. 원래 이름도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이며 구텐베르크는 그의 가문 대대로 살아온 저택의 이름이다. 요하네스의 아버지는 귀족 출신으로 조폐국에서 일했으며, 어머니도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없었다.
사실 구텐베르크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드물며 본격적인 인쇄술을 고안한 업적 외에는 알려진 일화가 거의 없다(…).
많지 않은 기록에 의하면 인쇄술을 개발을 위한 자금 마련에 어려움이 많아서 부자인 요한 푸스트에게 돈을 빌렸다고 한다. 결국 구텐베르크는 푸스트에 의한 원금반환 소송에 휘말린다. 이에 대해서 독일 괴팅겐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1455년 11월 6일자 헬마스페르거 공증문서에 일부분이 기록되어 남았다. 이 기록에 의하면 결국 푸스트가 승소하면서 2번에 걸쳐 빌린 원금과 복리이자를 합한 2,026길더를 갚으라는 판결로 끝났다. 그러나 구텐베르크는 이 거액을 줄 돈이 없었기에 인쇄장비를 비롯한 모든 걸 압수당해야 했다. 푸스트가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구텐베르크를 이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재정적으로 파산한 구텐베르크는 절망에 빠져 어려움을 겪다가 비참하게 죽었다는 기록만 전해진다.
1971년 마이클 하트가 인류의 자료를 수집해 전자정보로 저장, 배포하기 위해 시작한 '프로젝트 구텐베르크'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공식 홈페이지
2 인쇄술 개발
세계사에서는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역사상 최초의 본격 인쇄술로 공인되어 있다. 한국의 직지심체요절이 구텐베르그 42행 성서보다 78년이나 앞서 제작된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긴 하지만 이것이 당시 사회에 미친 영향이 전혀 없었던 걸 고려하면 본격적으로 인쇄물과 인쇄기술이 보급되기 시작하게 한 역사적 가치는 구텐베르크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1 개발사
구텐베르크는 마인츠의 조폐국에서 일했던 경력을 살려 활자 기술을 창안한다. 금화, 은화의 초상화 도안을 찍어내는 펀치에다 글자를 거꾸로 새겨 철판에다 찍어 형틀을 만들고 그 위에다 철로 만든 주조기를 덧씌워 납과 안티몬, 주석 합금을 부어 주조하는 방식을 고안해냈다. 이 방식은 철로 만든 형틀 및 주조기를 쓴 덕분에 수천 번을 주조해도 모양과 크기가 일치했다. 형틀이 망가지더라도 펀치만 있으면 얼마든지 재제작이 가능했다. 조판과 활자에 서로 요철(凹凸)을 만들어 꽉 물리게 하는 방식을 썼으므로 수백 장을 찍어도 활자가 밀리는 일 역시 거의 없었다. 여기에 대량 인쇄에 용이하게끔 기존의 포도주 기름 등을 짜던 압축기(프레스)를 활용한다. 활자인쇄가 잘 되려면 충분한 압력이 필요하지만 인력으로는 한계가 있던 것이다. 현재도 신문과 언론을 press라 칭하는데, 이는 구텐베르크 인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1450년 경에 인쇄기를 발명하고, 1452년부터 3년에 걸쳐서 구텐베르크 성서를 인쇄한다. 3년에 걸쳐서 180부를 인쇄했는데, 필사본 생산 속도와 비교하여 15배 빨랐다.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인쇄공의 숙련도에 따라서 1분에 2~10장 가량을 인쇄할 수 있다고 한다. 인쇄 속도에 비해서 만들어진 성서의 숫자가 적어 보인다. 그 이유는 구텐베르크는 인쇄본 성서가 필사본과 같아 보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삽화나 머리말 장식등은 필사의 과정을 거쳐서 구텐베르크 성서 180부의 세부는 각각 조금씩 다르다.
현대 인쇄기와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기술적인 면에서 크게 달라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 제본을 고려하지 않고 양적으로만 환산하면 현대 기계식 인쇄기는 1분에 800~3,200장 가량 인쇄되어 대략 80~1600배 빠른 셈이다. 어쨌든 구텐베르크 인쇄기의 속도는 필사에 의존하던 기존의 방식과 비교하면 혁명적으로 빨랐다. 이후 활자 인쇄술은 급속히 퍼져서 1450년부터 1500년까지 50년 동안 3만 종의 책을 총 2,000만부 인쇄했다고 한다. 이는 이전 1,000년 동안 출판된 책보다 더 많은 양이라고 한다.
고려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있다. 앨 고어가 2005년에 서울 디지털 포럼에서 떡밥을 던지기도 했고. 하지만 그다지 신뢰하기는 힘든 주장이다.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While metal movable type printing was invented in Korea and the oldest extant metal print book had been printed in Korea, 'Korea never witnessed a printing revolution comparable to Europe's':Korean printing with movable metallic type developed mainly within the royal foundry of the Yi dynasty. Royalty kept a 'monopoly of this new technique' and by royal mandate suppressed all non-official printing activities and any budding attempts at commercialization of printing. Thus, printing in early Korea served only the small, noble groups of the highly stratified society.
요약하면, 고려 금속활자술이 세계 최고(最古)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수 지배층만 인쇄술을 독점했기에 한국에 유럽의 인쇄 혁명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 후술되겠지만 사실 이러한 차이는 동서양의 문자 차이에 기인한 바도 크다. 서구 제어를 표현하기 위한 활자는 알파벳 대소문자 + 약간의 구두점과 조정 문자 + 숫자 정도에 불과하지만, 동아시아 전통 문어인 한문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족히 수만 자의 한자 활자가 필요했다. 국가 레벨에서나 겨우 관리할 수 있는 규모. 당연히 보급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2.2 본격적인 인쇄술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본격적인 인쇄술이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2.2.1 문자적인 이유
유럽의 알파벳은 기본적으로 26개이다. 반면 한자는 상용 수 천자에, 전체는 수 만여 자에 달하므로 인쇄에 부적합하다. 음성을 바로 적을 수 있다는 알파벳의 특성상 알파벳을 알고 자국어를 발음대로 적기만 하면 소통이 가능했으므로 한자문화권에 비해 문맹 퇴치가 용이하기도 했다.
2.2.2 민간 개발
민간인인 구텐베르크가 발명해 주로 민간 영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퍼져나갔다. 당시 유럽은 중세를 거쳐 근세로 접어드는 시점이었으므로 상공업이 발달하는 상황이었다. 거래정보 및 시세 같은 정보를 빨리 대량으로 주고받아야 하는 상공업에의 적용은 인쇄술이 전파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2.3 영향
인쇄술 발명 이전에는 필사를 통한 값비싼 방법을 써야했다. 인쇄술은 책 양산을 가능하게 하여 가격을 떨어뜨려 사람들이 지식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 발명 전 유럽에서 500~1400년대까지 필사된 책의 총량은 대략 10만 여권으로 추산된다. 인쇄술 발명 후 불과 50년 사이에 유럽 전역에서 1,500~2,000만 권이나 되는 책이 생산되었다. 이는 이전 인류가 생산한 책의 숫자보다 더 많은 양이다.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책이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이전같으면 수도원이나 부잣집에서나 장만할 수 있었던 책들을 개인이 손쉽게 소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지식의 전파가 급속도로 빨라졌고 이를 바탕으로 개인이 철학이나 과학을 연구하고 발표 및 정리해서 출간하여 학자간에 새로운 발견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등 학문상의 '촉매작용'이 활발해졌다. 물론 학문 측면뿐만 아니라 플레잉 카드같이 비 학문 분야(…) 역시 인쇄술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구텐베르크 인쇄술은 '유럽의 질서'를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성서를 필사하던 시절엔[1] 가톨릭 기준 총 73권에[2] 달하는 방대한 내용 때문에 성경 1질 값이 집 10채 값에 해당했으므로 일반인들이 성서를 소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또한 손으로 일일이 베껴서 만드는 필사의 특성상 오·탈자 및 왜곡의 여지도 많았다. 때문에 이런 오류들을 바로잡고 정론을 가르칠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스도교가 체제의 중심이었던 중세였던 만큼 이런 '독점'은 교회가 교리를 자기네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체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인쇄술이 발명되면서 성경이 대량으로 보급되고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어 기존의 교리해석을 반박하고 체제를 비판이 용이하게 되면서 기존 질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종교개혁에도 큰 바탕이 되었다. 물론 가톨릭 평신도들도 값싸게 인쇄된 성경을 읽고 프로테스탄트를 비판함으로서 반종교개혁에도 영향을 주었다.
마르틴 루터는 면벌부 발행에 대해 비판했고, 비판문을 만든다. [3] 이 비판문은 인쇄술로 만들어져 순식간에 전 독일로 퍼진다. 안 그래도 기존 교회의 작태에 불만이 팽배했던 사회에 비판의 물꼬를 터 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후 루터는 1519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교황파인 요한 에크와 공개 토론을 벌이는 등 본격적으로 교회를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루터의 연설문, 논문, 논박문은 독일어로 인쇄되어 광범위하게 퍼지고 전유럽으로 불길이 번지면서 개신교가 탄생한다. 또한 신구간 종교전쟁이 발생하는 등 사회적으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당시 분위기상 비단 루터가 아니더라도 종교개혁은 시작되었겠지만 짧은 시일 안에 막대한 양의 책을 찍어낼 수 있는 인쇄술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한참 늦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루모 씨는 교황청제 코렁탕 드시고… 또한 루터가 1522년 34년 발간한 '독일어 성서'는 근대 독일어의 초석을 다졌고 민족주의의 형성에 기여하는 등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쳤다. 당시 독일에선 매년 100만 권 가량의 책이 인쇄되었다는데, 이 중 1/3이 루터의 저서였다고 하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인쇄술은 개신교뿐만 아니라 가톨릭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번역된 공인 성경과 기도서 미사경본[4]을 각 지방교회에 대량으로 배포할 수 있도록 해 가톨릭이 하나로 뭉치고, 가톨릭 신자들이 성경을 근거로 효율적으로 개신교에 반박할 수 있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개신교 농민 A가 성경을 근거로 가톨릭을 비판하고, 가톨릭 농민 B가 성경을 근거로 개신교를 비판하는 식의 일이 가능해졌다. 인쇄술이 대중의 지식 수준을 향상시켰기에 가능해진 풍경.
3 구텐베르크 성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 ||
파일:Attachment/unesco-memoryoftheworld.gif | ||
이름 | 한글 | 양피지에 인쇄된 『구텐베르크 42행 성경』과 동시대의 배경 문서 |
영어 | 42-line Gutenberg Bible, printed on vellum, and its contemporary documentary background | |
프랑스어 | La Bible dite de 42 lignes de Gutenberg | |
국가·위치 | 독일 괴팅겐 | |
소장·관리 | 니더작센 주립 대학도서관 | |
등재유형 | 기록유산 | |
등재연도 | 2001년 | |
제작시기 | 1450년경 |
- ↑ 단순히 텍스트만 배껴쓰는게 아니라 삽화나 서예기술도 동반되었기에 일반적으로 성경한권을 완성하는데 육개월정도가 소요되었다고 한다
- ↑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티즘은 66권
- ↑ 당시 규정상 대주교직은 30세 미만이면 안 되고 겸직도 안 되었다. 그러나 23살에 호엔촐레른 왕가 출신이라는 배경을 바탕으로 1513년 당시로서는 막대한 돈인 29,000길더를 당시 교황 레오 10세에게 바쳐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가 된다. 1년 후 마인츠 대주교직도 따낸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가 2군데의 대주교직을 얻는 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손실을 보충하고 '본전'을 뽑기 위해 면벌부 발행을 시작한다. 이를 교황 레오 10세도 허락하고 수입(…)을 반반씩 나누기로 합의했다. 면벌부는 연옥에서 받을 벌을 면제해주는 것이다. 심지어 '성모 마리아를 겁탈했다 하더라도 벌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선전하는 곳도 있었으니 양식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다 눈살을 지뿌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어가면 이렇다.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에게 죄를 용서 받는다고 본다. 다만 죄를 용서받는다고 벌을 면제받을 수는 없다. 따라서 고해성사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 죄에 해당하는 벌은 연옥에서 받게 된다. 이 벌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보속을 통하여 사면될 수 있는데, 살아서 보속을 행하지 못했으면 연옥에 가서라도 해야 한다. 현대 가톨릭에서는 "무슨 무슨 기도문을 외우세요" 같은 정도의 보속을 주지만, 당시 가톨릭의 보속은 가혹한 면이 있었고 많은 신자가 행하지 못하였다. 당연히 가톨릭 교회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어서, 특정 퀘스트 조건을 완수하면 그 신자에게 대사를 주었다. 이 대사의 효과가 '보속의 면제'이다. 문제는 루터 당시의 퀘스트 조건 중 하나가 '대성전 건축 헌금 내기'였고 헌금을 낸 신자에게는 인증 증서를 주었다. 이 증서가 속칭 면벌부이다. 문제는 이것이 '유전무벌 무전유벌'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 면벌부의 효과가 '죄의 용서'라고 잘못 알고 있는데, 엄연히 말하면 이는 틀린 말이다. 죄는 고해성사로 당연히 용서된다. 면벌부의 포인트는 어디까지나 벌이다.
- ↑ 이때문에 트리엔트 미사가 빠르게 퍼져나갈수있었다
- ↑ 출판 당시 각 페이지 단위로 분리하여 판매하여 소장한 것까지 합치면 더 많은 상태.
그 페이지 하나하나도 수천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