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공

역대 진나라 군주
24대
진문공(晉文公) 희중이(姬重耳)
25대
진양공(晉襄公) 희환(姬歡, 姬驩)
26대 진영공(晉靈公) 희이고(姬夷皐)
(姬)
진(晉)
환(歡, 驩)
아버지진문공 희중이(姬重耳)
생몰기간음력? ~ 기원전 621년
재위기간음력기원전 628년 ~ 기원전 621년

1 개요

진나라의 25대 군주. 진문공의 아들. 핍길의 소생. 진문공이 죽은 뒤 진(秦)과 대립했던 군주다.[1]

2 선진이 진양공의 얼굴에 침을 뱉다.

진문공 9년인 기원전 628년 진문공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서 진나라의 군주가 된다. 다음 해인 진양공 2년인 기원전 627년 진나라정나라를 습격하였다. 정나라와 진나라는 희성[2]으로 성이 같았기 때문에, 진문공의 휘하의 명장선진(先軫)이 정나라를 도우라고 진언했다. 그리하여 진양공은 진문공의 장례를 미처 치루지 못한체로 진목공이 보낸 장수인 맹명시(孟明視)[3]와 서걸출(西乞秫), 백을병(白乙丙)[4]을 효산 전투에서 이겨서 사로잡았으나 적모인 문영(文嬴)[5]의 말을 듣고 그 세 장수를 풀어주었다.
이것을 분하게 여긴 선진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하지만 진양공은 쿨하게 용서했다.만약 폭군에게 이랬다면 벌써 목이 달아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요즘으로 대입해봐도 상사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 회사에서 매장당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고 소송크리 당하겠지. 거기다가 짤없이 당해야할 패소는 덤. 진양공은 나중에나마 선진의 말을 듣고 그들을 추격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3 그 뒤의 치세

적족이 기(箕)를 침략해오자 진양공은 이들을 8월에 물리쳤다. 하군의 대부 극결(郤缺)이 백적자(白狄子)를 사로잡았으나, 선진은 적족들의 진으로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했다.카미카제? 자살?[6] 양공은 일이 끝난 뒤 선진의 아들인 선차거(先且巨)에게 중군의 원수를 담당하게 하고, 극결을 천거한 서신에게 상을 주고, 극결은 경이 되었으며, 아버지 극예(郤芮)는 명예가 회복되었고, 식읍인 기(冀)땅을 돌려받게 되었다.

같은 해 겨울에 진나라, 정나라와 더불어 허나라를 쳤다.

진양공 3년인 기원전 626년 진문공의 상을 마치고, 제후들과 함께 위나라를 쳤다. 그 이유는 바로 입조하지 않고 회맹한 정나라를 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차거는 진양공에게 주나라에 입조할 것을 진언해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피했다. 선차거와 서신에게 위나라를 쳐서 척(戚) 땅을 포위하고 6월에 점령해 위나라의 손소자(孫昭子)를 사로잡았다.

진양공 4년인 기원전 625년 진목공은 효산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맹명시를 보내 공격해왔다. 그런데 2월 팽아 땅에서 그것을 이겼으며, 겨울에 송나라의 공자 자성, 진(춘추전국시대)진나라의 규원선, 정나라의 공자 희귀생과 함게 진나라의 왕(汪) 땅을 쳐서 팽아까지 쳐들어와 단단하게 공격의 대가를 치루게 해주었으나 결국 맹명시에게 패해 도로 빼앗겼다.

진양공 5년인 기원전 624년 진목공이 친히 공격해 왕관(王官) 땅을 차지하고, 효산의 시체를 봉해놨지만, 진나라 조정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초나라가 강나라를 포위하자 주나라에 표문을 올린 진양공은 그것을 구하기 위해 양처보를 보내 구원에 성공하였다. 진양공 4년에 양처보를 시켜 회맹하게 할 때 노나라에 굴욕을 주었으므로, 진양공은 그것이 걸렸는지 노문공에게 회맹할 것을 청해 노문공과 그해 12월 회맹하였다.

진양공 6년인 기원전 623년 진의 신성을 빼앗아 왕관 땅의 굴욕을 갚아주었다.

진양공 7년인 기원전 622년 조최(趙衰)[7], 난지(欒枝), 호언(狐偃), 선차거가 죽자 조최의 아들인 조돈(趙盾)[8]이 조최의 뒤를 이었다.

진영공 8년인 기원전 621년 이(夷) 땅에서 군대를 사열하며, 2군을 폐지하고, 작년에 대신들이 죽어서 생긴 공백을 메우고, 사곡(士穀)을 중군원수에, 양익이(梁益夷)를 중군보좌에, 기정보(箕鄭父)와 선도(先都)를 등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선극의 말에 따라 호역고(狐射姑)를 중군 원수에, 조돈을 그 부장으로 삼았다. 진양공 7년에 옛 상관의 아들인 조최의 아들 조돈을 양처보가 칭찬하여 동(董) 땅에 다시 군대를 사열하고, 조돈과 호역고의 관직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조돈이 정권을 잡아 제도를 정하고 형법을 바로잡으며, 각종 악습을 다스리고,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했다.

진양공은 같은 해에 죽고 세자인 희이고가 어렸으나 결국 그 뒤를 이어 진영공이 된다.

4 후일담

진영공은 어렸기 때문에, 조돈이 섭정하였다. 그러나 진영공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막장화가 되어 조돈의 간언을 싫어해 살해하려다가 오히려 조천에게 역관광 당해 죽임을 당했다. 그 뒤 희흑둔이 진성공이 즉위해 나라를 잘 다스렸으나 일찍 죽었다. 그 뒤 아들인 진경공이 즉위하였는데, 그는 오나라를 이용해 초나라를 견제하는 등 나름대로 업적을 잘 쌓았다. 그런데, 그 죽음이 어이가 없었는데, 바로 화장실에 빠져서 죽어버렸다. 그리고 진여공이 즉위했는데, 그는 처음에는 나라를 그럭저럭 다스렸으나 대부들을 내쫓고 총애하는 후궁의 형제들로 채웠다. 극기, 극주, 극지를 살해하는 등 막장 행각을 자행했으므로 난서와 중항언에게 살해되었다. 그 뒤를 이은 진나라의 군주가 바로 진도공으로 그때 되어서야 진나라는 안정되었다.
  1. 단 이것은 진양공 탓은 아닌게, 진(秦)이 관동으로 진출하기 위해 진(晉)을 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대립할 수 밖에 없었던 것.
  2. 이 성이 바로 주나라 왕실의 국성이다.
  3. 본명은 백리시(百里視)로 자가 맹명이다. 진목공의 재상인 백리해의 아들이다.
  4. 건숙(蹇叔)의 아들로 본명은 건병(蹇丙)이며, 자가 백을(白乙)이다.
  5. 진나라의 공녀다.
  6. 선진이 이런 기행을 벌인 이유는 진양공의 얼굴에 침을 뱉은 것을 책임 진 것이다.
  7. 조쇠가 아니라 조최라 읽는다.
  8. 조순이 아니라 조돈이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