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고구려)


(332~408년)

1 개요

고구려의 인물. 덕흥리 고분의 묘주로,하필 묵서명에 판독이 안되는 부분 중 그의 성씨에 해당하는 부분도 있어서 이름만 판독이 가능한다.
생애로 보면 고국원왕 대에 태어나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왕 대에 활동했다.

2 덕흥리 고분과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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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무덤인 덕흥리 벽화 무덤[1]나에 그려진 벽화로 사진에서 우측에 보이는 인물이 진이다.
▨▨군(郡) 신도현(信都縣) 도향(都鄕) 중감리(中甘里) 사람이며 석가문불(釋迦文佛)의 제자(弟子)인 ▨▨씨(氏) 진(鎭)은 역임한 관직이 건위장군(建威將軍)·국소대형(國小大兄)·좌장군(左將軍)·용양장군(龍驤將軍)·요동태수(遼東太守)·사지절(使持節)·동이교위(東夷校尉)·유주자사(幽州刺史)이었다. 진(鎭)은 77세로 죽어, 영락(永樂)18년 무신년(戊申年) 초하루가 신유일(辛酉日)인 12월 25일 을유일(乙酉日)에 (무덤을) 완성해서 영구(靈柩)를 옮겼다. 주공(周公)이 땅을 상(相)하고 공자(孔子)가 날을 택했으니 무왕(武王)이 시간을 선택했다. 날짜와 시간을 택한 것이 한결같이 좋으므로 장례 후 부(富)는 7세(七世)에 미쳐 자손(子孫)은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위(位)는 후왕(侯王)에 이르도록 하라. 무덤을 만드는 데 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이다. 아침 식사로 먹을 간장을 한 창고 분이나 보관해 두었다.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며, 이 무덤을 방문하는 자가 끊어지지 않기를. - 덕흥리 벽화 무덤 묵서명출처
그의 생애에 대하여 전해지는 기록의 전부이다.(...)
이마저도 형식적인 수사로 채워저 있어 구체적인 삶은 알기 힘들지만[2] 덕흥리 벽화 무덤의 규모와 그가 거친 관직으로 보건대 고구려 지도층 중에서도 정상급 인물이였을것 같다.

330년 혹은 332년에 태어나 406년 혹은 408년에 사망했다. 330년은 고국원왕 즉위년, 332년은 고국원왕 2년에 해당하고 406년은 광개토왕 16년(영락 16년), 408년은 광개토왕 18년(영락18년)에 해당한다. 이렇게 출생과 사망 연도를 두 개로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진이 사망한 연도가 408년인지, 장사 지낸 해가 408년인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북사(北史) 등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의 장례 풍습은 3년 상이지만 3개월 이내에 장사를 지내고 3년 간 상복을 입는 중국식 3년상과 달리 3년 동안 시신을 모셨다가 장사 지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진의 장례가 408년 고구려의 풍습에 따라 치러진 것이라면 진의 사망 연도는 406년이 되고 출생 연도도 2년 더 올라가게 된다.

진에게는 당연히 성씨가 있었고 복성임이 확인되나 지워져 무슨 성씨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단, 모용씨일 가능성은 낮다. 이름이 같음을 들어 남연의 모용진이 고구려의 진이 아닌가 하는 설이 제기된 적은 있지만 둘의 행적은 확연히 다르므로 모용씨일 가능성은 낮다.

진은 다른 사료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인데, 1976년 북한 평안남도의 덕흥리 고분의 발견으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덕흥리 고분의 묘지명에 의하면 □□군 신도현 도향 □감리에서 태어나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의 관직을 역임했다. 건위장군으로 관료에 데뷔하여 유주자사로 마감한것. 77세[3]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영락18년(408년) 12월 25일에 안장되었다. 묘의 규모로 보나 묘지명에 '부(富)는 7세(七世)에 미쳐 자손(子孫)은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위(位)는 후왕(侯王)에 이르도록 하라. 무덤을 만드는 데 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이다. 아침 식사로 먹을 간장을 한 창고 분이나 보관해 두었다.'라는 기록으로 보건대 상당한 위치의 인물로 추정된다.

묘지명에서 자신을 석가문불의 제자라고 하는 것으로 보건대 불교를 신봉했던것 같고, '주공(周公)이 땅을 상(相)하고 공자(孔子)가 날을 택했으니 무왕(武王)이 시간을 선택했다'라고 하는걸로 보아서 중국의 관념에 젖어 있던 인물로 보인다. 이 구절은 진을 중국계로 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진에 관련해서는 크게 두가지 논쟁이 있는데, 첫째는 그의 출신국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그가 최종적으로 역임한 관직인 유주자사의 정체에 대한 것이다.

진의 출신국 논쟁에 대해서는 중국(전연)이라는 주장과 고구려라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는데, 학계에서는 대체로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로 본다. 진이 중국 출신이라는 가장 핵심적인 근거는 그의 출신지인 신도현이 중국에 존재하는 지명이라는 것인데[4] 신도라는 지명이 고구려에도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는 확언할 수 없다. 또한 중국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다른 인물들은 대개 중국측에 기록이 존재하는데 진은 그렇지 않다. 진이 덕흥리 고분과 같은 대규모의 릉과 묘지명에 기록된 내용과 같은 혜택을 누릴만한 중국의 핵심인물이였다면 당연히 중국측 기록에 있을텐데? 물론 출생과 젊은 시절만 중국에서 보내고 이후 고구려에 망명해서 공을 쌓아 출세했을지도 모르지만...[5] 소수설이기는 하지만 백제로 보는 설도 있다. 진의 출신지는 일단 유예해 두는 것이 좋다.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새로운 사료가 등장할 때까지는...

진이 마지막으로 역임한 관직은 유주자사인데 묘지의 벽에 유주에 대해 나름대로 자세히 적어놓았으며 그가 유주자사로서 지낼때 유주 행정단위 각지의 지배자들이 입조하는 모습도 벽화로 그려놓았다. 유주가 4세기에서 5세기에 초에 중원을 제외한 전연이나 후연의 전역에 해당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고구려가 고국원왕때나 광개토왕때 유주로 진출했다는 주장을 각각 북한과 남한에서 한다. 북한에서는 고국원왕때 유주로 진출했다는게 다수설이고 남한에서는 광개토왕때 유주로 진출했다는게 소수설이다. 진이 다스린 유주의 정체에 대한 논의는 활발히 이루어진 편은 아니지만 대체로 진이 중국계라는 전제와 진이 활동한 낙랑,대방 지역이 중국계 인사들이 포진해있는 지역이라는 점을 바탕으로 중국의 유주 지방에서 이주해온 유민들을 다스리기 위한 특수 행정 단위로 보곤 한다. 그러나 고구려가 낙랑, 대방을 영역화한지 거의 100년이 다된 시점인데다가 낙랑, 대방쪽으로 천도준비까지 하고 있던 판에 굳이 중국계 유민들을 따로 다스리기 위한 행정단위까지 설치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긴 하다. 더구나 대방 지역의 경우 백제와의 접경지대라 고구려가 성을 쌓아두는등 직접 지배를 더욱 관철시킨 곳이다. 당시 광개토왕이 후연에 공세를 퍼붓고 있던 상황이라 고구려가 후연을 정복하고 유주를 지배했다는 주장도 얼핏보면 옳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중국측 사서의 기록과는 완전히 뉘앙스가 달라서 수긍하기 어렵다.

반면에 중국이나 일본 학계에서는 고구려는 유주를 지배하지 못했고, 진이 칭한 유주자사는 진이 후연에서 고구려로 망명해 오면서 자칭한 것뻥카이라고 주장한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중국측 사서에는 유주가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는 기록이 어느 시대에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구려 고분 벽화에선 보통 벽 아래에는 생존 당시의 일상을, 벽 위에는 상상화가 그려졌다. 더구나 거짓으로 적었다고 보기엔 매우 디테일한 상황이 그려져 있다. 한국 학계에서는 여러 가능성을 제기한다. 우선 진은 고구려인이고 유주자사도 고구려 왕실에서 정식으로 수여한 관직은 맞지만, 실제로 고구려가 유주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현대 대한민국이 이북 5도에 도지사, 시장, 군수를 임명하는 것처럼 명목상의 지배를 나타내기 위한 명예직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고구려가 유주를 두어 지배한 것은 맞지만 지배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고 보는 주장도 있다. 어느 쪽 주장이든 당시 기록과 어긋나고 교차검증도 힘들다는 점에서 따르지 않고 유예해두는 편이 좋다.

광개토왕 시기를 다룬 고구려 관련 매체에서 등장할 법한데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비슷하게 고분 발굴로 알려진 모두루는 잘만 등장하는데도...모두루가 진에 비해 특별히 더 알려진것도 아님을 생각해보면 작가들이 더럽게 성의가 없는 것이다. 뭐 사실 광개토왕을 다루는 매체 대부분이 그 굇수격인 광개토대제의 등장 인물들을 거의 그대로 퍼왔고 광개토대제마저도 시원치 않은 작품임을 생각해보면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유일하게 제정신인 우리나라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진이라는 인물이 진으로 추정되는데 진이 부여 출신의 유민이라는 소수설을 채택한 것이다.

김진명이 그의 작품에서 진의 현무첩이라는 소재로 소설을 전개해나간 적이 있다. 그가 집필중인 '고구려'라는 소설에서 광개토왕 시기를 다룬다는것을 생각해보면 그의 작품에 진이 등장할 확률이 있다.
  1. 강서구역 근처에 있는데 1976년 12월 8일 처음 발견되었다. 고구려 무덤이 대개 그렇듯이 이 무덤도 이미 도굴되어 부장품과 유골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다만 곡괭이와 삽 등이 널려 있었고 인골 네 구가 흩어져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 도굴꾼들이 팀을 나눴다가 배신했을 가능성이 높다. 무덤 내부에서 부장품을 가지고 건네주는 팀, 무덤 외부에서 부장품을 받는 팀으로 나눴을텐데 아마 외부에 있던 도굴꾼들이 부장품만 챙기고 무덤을 닫아버려서 무덤 안에 있던 네 명은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부장된 모양이다. 실제로 중국 장안에 있는 나라 영태공주(당중종의 7녀로 이름은 이선혜)묘나 이집트에서 발견된 중왕국 피라미드에서 이런 경우가 있었다.
  2. 대신 출신지, 생몰년, 경력이 완벽하게 적혀있다. 대부분의 한국 고대 인물들이 기록의 부재로 출신지, 생몰년, 경력을 알수 없는 것을 보면 독특한 케이스. 헌데 구체적으로 적혀있는 출신지에 비해 최초 국적이나 성씨를 알수 없으니 이것또한 괴랄한 아이러니이다. 이상하게도 다른 기록은 완벽하게 멀쩡한데 최초 국적을 가늠할수 있는 군의 이름과 성씨만 지워저있다.
  3. 고대인의 평균 수명이 40세정도임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장수한것. 그가 고구려인이라면 젊어서는 고국원왕대의 쇠락을 지켜보고 늙어서는 광개토왕대의 영광을 지켜본 것이다.
  4. 그것도 '기주'의 치소가 바로 장락군 신도현이다.
  5. 국소대형 이후부터 역임한 관직을 고구려에서 역임한 것으로 보면 그랬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