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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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역대 국왕
16대 고국원왕 고사유17대 소수림왕 고구부18대 고국양왕 고이련
시호소수림왕(小獸林王) /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
해미류왕(解味留王)
고(高)/해(解)?
구부(丘夫)
생몰년도음력332? ~ 384년 11월
재위기간음력371년 10월 24일 ~ 384년 11월 (13년 1개월)

1 소개

먼치킨스러운 후대 왕들에게 가려져 과소평가되고 있지만, 거의 망하기 직전의 고구려를 단 5년 만에 부흥시킨 중흥명군

고구려의 제17대 .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또는 해미류왕(解味留王)이라고도 한다.[1]

백제의 고이왕, 신라의 법흥왕과 함께 나라의 기반을 단단히 마련한 개혁군주 중 하나다. 그리고 이런저런 굵직한 업적 덕분에 삼국시대를 공부하는 수능 응시생이나 공시생들에게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친구이자 주적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고국원왕대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거의 망하기 직전의 고구려를 부흥시킨 명군 중 한 명이다. 그것도 단 5년 만에. 백제에 대한 반격을 가한 첫번째 기록이 소수림왕이 재위하고 5년 뒤에 등장한다. 당시 무너질 대로 무너진 고구려가 전성기를 한창 구가하던 근초고왕에게 반격을 가하기란 쉽지 않았던 상황임을 감안하면 이때 고구려는 충분히 예전 힘을 다시 되찾았다고 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6대에 걸쳐 내려온 명군 혈맥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왕복이 꽤나 좋은 나라였는데 이 당시의 라인업이 특히 후덜덜했다. 소수림왕 - 고국양왕 - 광개토대왕 - 장수왕 - 문자명왕 - 안장왕에 이르기까지 무려 6대 하고 정확히 160년. 이들의 치세 동안 고구려는 전반적으로 내내 상승세를 이어 나가며 전성기를 구가하였고, 개털이 되어 오늘내일하던 산골짜기 막장 국가에서 동북아의 패권 국가로 각성하였다.

2 태자시절

기골이 장대하고 지략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하며 355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태자가 되고나서 활발하게 정사에 개입한 흔적도 보이는데[2], 이러한 움직임 덕에 왕으로써 임무를 좀더 일찍 수행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전연에 잠시 인질로 잡혀있었지만 370년, 전연이 망하자 다시 귀국했다. 그리고 371년 10월 23일, 아버지 고국원왕이 백제군의 화살에 맞아 죽자 직접 군대를 진두지휘하며 근초고왕의 공격을 막아냈다.

3 왕위에 오르다

3.1 당시 국제정세

370년, 모용씨의 전연은 티베트계 저족의 우두머리 부견이 건국한 전진(前秦)에게 몰락했다. 전진은 세를 불려 화북일대를 통일했고 동진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배후를 안전하게 해야 된다는 판단으로, 고구려에 온건적인 자세를 취한다.

백제는 근초고왕이 건재했고, 국력은 강력해 함부로 접근하기 힘든 지경이었다. 이러한 순간에 소수림왕이 선택한 건 강력한 중앙집권강화와, 불교를 통한 내부안정이었다.

3.2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다

二年 夏六月 秦王苻 堅 遣使及浮屠順道 送佛像經文。 王遣使廻謝 以貢方物。 立大學 敎育子弟。

2년 여름 6월에 진(秦)나라 왕 부견(苻堅)이 사신과 중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經文)을 보내왔다. 왕은 사신을 보내 답례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대학(大學)을 세우고 자제들을 교육시켰다.

三年 始頒律令。
3년에 율령(律令)을 처음으로 반포하였다.
ㅡ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했으며, 또한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의 기틀을 바로잡아 훗날의 번영에 대한 초석을 마련했다. 이러한 것들은 이전의 고구려에게서 볼수 없었던 문치주의(文治主義)를 표방했던 것으로 법치국가로써의 면모를 보여주며 중앙집권강화를 노렸던 것들이다.

四年 僧阿道來

4년에 중 아도(阿道)가 왔다.

五年 春二月 始創肖門寺 以置順道。 又創伊弗蘭寺 以置阿道。 此海東佛法之始。
5년 봄 2월에 처음으로 초문사(肖門寺)를 세우고 (그곳에) 순도를 두었다. 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우고 (그곳에) 아도(阿道)를 두었다. 이것은 우리 나라 불교의 시작이다.

 
또한 전진으로 부터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내부 안정을 위해 불교를 이용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러한 정책들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고구려는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단 5년 만에 흔들리던 나라를 붙잡고,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하자 소수림왕은 백제에 대한 복수를 시도하게 된다. 다만 여러 기록들을 통해 불교는 이미 고구려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소수림왕은 이를 국가적으로 "공인"한 것으로 보인다.[3]

3.3 백제에 대한 복수의 칼을 꺼내들다

五年 秋七月 攻百濟水谷城。

5년 가을 7월에 백제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였다.
ㅡ 《삼국사기》 소수림왕 본기

三十年 秋七月 高句麗來攻北鄙水谷城。 陷之 王遣將拒之 不克。 王又將大擧兵報之 以年荒不果。
30년 가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임금이 장수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임금이 다시 병사를 크게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
ㅡ 《삼국사기》 권 24 근초고왕 본기

 
국력을 조금씩 회복하자 재위 5년만인 375년 7월, 백제의 수곡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근초고왕은 이를 반격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어 반격하지 못했다고 하니 소수림왕으로썬 통쾌한 복수였을 것이다. 일년후인 376년, 근구수왕이 재위 하자 마자 고구려는 백제의 북경을 또다시 공격하였으나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六年 冬十一月 侵百濟北鄙。

6년 겨울 11월에 백제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ㅡ 《삼국사기》 소수림왕 본기

冬十一月 高句麗來侵北鄙
겨울 11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략했다.
ㅡ 《삼국사기》 권 24 근구수왕 본기

이러한 침략이 거듭발생하자, 근구수왕은 역으로 고구려에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했다. 3만의 병사를 이끌고 두 번째로 평양성을 향해 진격한 것이다.[4]

七年 十一月 南伐百濟。

7년 백제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침공해 왔다.
ㅡ 《삼국사기》 소수림왕 본기

三年 冬十月 王將兵三萬 侵高句麗平壤城。
3년 겨울 10월 임금이 병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침범하였다.
ㅡ 《삼국사기》 권 24 근구수왕 본기

이를 막아내고 소수림왕은 그해 11월에 백제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또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듯하다. 이처럼 백제와 아웅다웅하며 서로에 대한 견제를 시도하는 사이, 거란족이 소규모 침공을 해온 기록이 남아있다. 더군다나 이 시기에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 먹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 당시 고구려가 또다시 군사를 일으키긴 힘들어 보인다.

이후 별다른 침공 기록이 없다가 재위 14년 째인 384년 11월, 왕위를 고국양왕에게 물려주고 소수림(小獸林)에 묻혔다.

3.4 무너지는 나라를 재건하다

국사책에는 그냥 국가의 기틀을 세운 왕으로 무난하게 묘사되지만 알고 보면 거의 멸망 직전에 다다른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내고 까먹은 국력을 회복해서, 이후 광개토대왕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기반을 닦은 한국사에 전무후무한 내정과 수성 부문의 스페셜리스트 먼치킨 국왕이다.

고국원왕시기는 미천왕시기에 힘이 덜하여 전연과 백제에게 수도가 함락되고 왕비가 포로가 되며 왕이 전사하며 심지어 미천왕의 무덤도 도굴되는 등 치욕적이라고 해도 할말이 없는 시기였으나 단 5년 만에 백제를 공격하고 성을 함락시킬 정도로 나라를 재건해 냈다. 대외적인 확장 사업이 실시 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렇지 멸망위기 이후에 전성기를 맞이 할수있게 한 소수림왕의 능력은 한국사에서도 비교대상이 전무할 정도다. 그래서인지 광개토대왕보다 소수림왕을 더 높게 쳐주는 시각도 꽤 보인다.[5]

선대 고국원왕 시기에 전연과 백제에 털려서 수도가 함락되고 왕비가 포로가 되고 왕이 전사하는, 상식적으로 그대로 나라가 망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국력을 정비해서 거의 바로 다음 왕의 시기에 전성기와 영토 확장기를 맞은 경우는 중국 춘추시대오자서가 이끌던 오나라에게 무릎을 꿇었지만, 곧장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어 냈던 월왕구천의 월나라 같은 사례 등을 제외하면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경우다.

4 삼국사기 기록

一年冬十月 소수림왕이 즉위하다
二年夏六月 전진에서 불교가 전래되다
二年夏六月 태학을 세우다
三年 율령을 반포하다
四年 승려 아도가 오다
五年春二月 초문사와 이불란사 두 사찰을 창건하다
五年秋七月 백제 수곡성을 공격하다
六年冬十一月 백제를 침범하다
七年冬十月 백제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다
七年冬十一月 백제를 정벌하고 전진에 조공하다
八年 가뭄으로 백성이 굶주리다
八年秋九月 거란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다
十三年秋九月 혜성이 나타나다
十四年冬十一月 소수림왕이 죽다

5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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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사신기근초고왕

사극 드라마에서는 두 작품으로 조연으로만 등장했는데 태왕사신기에서는 말년에 귀족들에게 시달리던 나약한 왕으로 나왔지만 근초고왕에서는 시크한 외모에 냉철하고 명석한 젊은 태자로 나와 드라마가 각종 병크로 최악의 혹평과 시청률 부진을 겪고 있는 와중에도 주인공인 백제측 캐릭터들보다 훨씬 더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고구려를 다룬 광개토대왕에서는 개념없이 그냥 간단히 생략하여 등장하지 않았다.(...) 소수림왕이 생략되니까 고국양왕호구가 되었던 상황. 소수림왕이 나왔었다면 고국양왕의 이미지가 그렇게 망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고국양왕 문서 참고.

무한도전 결투특집 하하 VS 홍철 특집에서는 퀴즈 한국사 파트의 정답으로 인용되었다. 정답자는 노홍철.
  1. 이런 이름 때문에 대무신왕의 다른 명칭에서 제기되는 해씨 고구려설이 부정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명으로 소수림왕 시기에 고구려 왕계가 정리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2. 340년에 왕의 명령으로 전연의 태조 모용황을 예방한 것을 그 예로 든다.
  3. 각훈(覺訓)이 기록한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동진의 고승 지둔(支遁)(314~366)이 고구려도인(高句麗道人)에게 축법심(竺法深)이라는 스님의 덕행을 찬양하는 서신을 보낸 기록이 나온다.
  4. 백제 역사상 평양성을 직접 본 왕은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뿐이고, 두 번을 본 왕은 근구수왕이 유일하다. 이 두 시기를 제외하면 신라와 고구려에게 털리기 바빠서...
  5. 간단히 말해 조선시대의 태종세종대왕의 경우를 떠올리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