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이 항목: 중국 인민해방군
목차
1 시작
쑨원과 소련의 협상으로 성립된 1차 국공합작 이래 중국 공산당원은 개별적으로 중국 국민당에 입당하여 국민당군의 북벌에 적극 협력하였다. 공산당 지하조직이 상하이의 노동자들을 조직해서 총파업 투쟁으로 후방을 교란하는 와중에 국민당군은 지방군벌을 물리치고 1927년 4월 12일에 상하이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상하이 점령 직후 장제스는 돌연 국민당내의 공산당원을 학살하는 상하이 쿠데타를 벌여 국공합작은 붕괴하고 1차 국공내전이 시작되었다. 이때 공산당원의 90%가 처형되었고, 살아남은 당원들은 반격을 위해 무장을 시작한다.
같은해 8월 1일 후난 성 난창에서 공산당원들이 무장봉기하여 국민혁명군(국민당군)과 싸운 것을 군의 유래로 삼는다. 그래서 인민해방군 엠블럼에는 붉은별 안에 8월 1일을 뜻하는 八一이라고 씌여 있으며, 인민해방군의 군기를 팔일기라고 한다. 이때는 중국공농홍군(中国工农红军)[1]으로 불렸다. 이 봉기는 저우언라이가 지휘했으나, 압도적인 병력을 가졌던 국민혁명군(국민당군)에 패퇴했고, 남쪽방면으로 도주했다.[2]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이들 부대보다는 조금 늦은 9월 7일에 봉기한 마오쩌둥의 부대가 그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부대는 압도적인 국민혁명군부대에 패퇴하였고, 마오쩌둥은 패잔병을 이끌고 장시성 징강산으로 도피하였다.
여기서 마오쩌둥은 직업군인 출신이었던 주더의 부대와 합류하였다. 전략-전술의 일반적인 이론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었으나, 전문적으로 군사학을 공부한 적이 없던 마오는 주더의 도움을 받아 매우 효율적인 조직을 구성하였고, 특히 절대로 민폐를 끼치지 못하게 하는 엄격한 군율을 만들었다. 이 군율은 삼대기율 팔항주의(三大紀律 八項主義)라고 하며, 지금도 인민해방군에서 복무신조 내지 병영생활 행동강령 격으로 내려오고 있다. 이는 거의 떼강도나 다름 없던 국민혁명군(국민당군)이나 군벌의 군대와 차별화되어 인민의 지지를 받는 원인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게릴라 조직과 인민의 관계를 물고기와 물의 관계라고 말했는데, 이런 그의 사상은 현대 게릴라전의 전략 전술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사령관 주더와 정치위원 마오쩌둥은 수백만의 인구를 포괄하는 강서소비에트를 건설하였으며, 이외에도 인민해방군(홍군)은 중국 강남 지역에 유격전의 근거지인 해방구를 여러군데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수백명의 패잔병에 불과했던 주더와 마오쩌둥의 군대[3]는 이후 네차례의 국민당군의 토벌전을 분쇄하고 60만의 대군으로 성장했다. 이때 소련 유학에서 돌아온 소위 '28인의 볼셰비키'와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독일인 오토 브라운[4]은 소련의 지원아래 마오쩌둥을 밀어내고 중국 공산당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도시 노동자들의 무장봉기로 정권을 장악한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도시로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그동안 농촌과 산악지역 해방구에서 벌이던 게릴라 전술을 버리고 국민당군과의 정면대결을 선택하였다. 당시 국민당군은 독일인 군사고문인 팔켄하우젠 장군이 실질적으로 지휘하고 있었으며, 공산당 국민당 모두 독일인이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독일인끼리의 대결"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해방구의 민간인을 모두 소개시키고, 토치카를 건설하며 천천히 조여오는 압도적인 화력의 정규군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었고 이런 정면대결을 펼친 제5차 토벌전에서 홍군은 대패하였다. 더이상 해방구를 유지할 수 없자, 공산당군은 중국대륙을 남쪽으로 부터 시계방향으로 반바퀴 돌아 서북쪽에 마련된 산시성으로 1년간에 걸쳐 도주하였다. 이를 대장정이라고 하며, 공산당군은 병력의 90%를 잃으면서도 어쨌든 1년후에 이곳에 도착했다.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은 다시 지휘권을 되찾았고, 이렇게 마련된 서북방에서 게릴라전으로 다시 세력을 확장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대장정 항목 참조. 사실상 대장정이야말로 현대 중국과 중국 인민해방군의 모든 것이 만들어진 시기이다.
2 중일전쟁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몇년 전, 일본제국은 그렇게 꿈꾸던 중국 대륙 침략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장제스는 이런 상황인데도 군벌들과 반장전쟁이라는 대규모 내전을 벌이는 병크를 저질렀다. 한편으로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을 시작했으나, 이마저도 대장정을 시작한 공산당군을 포위하는 데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결국 목표하던 성과가 변변찮던 상황에, 공산당 토벌에 너무 역량을 쏟느라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지 않은 장제스에 대한 불만에 아버지 장쭤린을 암살한 일본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까지 겹쳐 동북지역 군벌 장쉐량(장학량)이 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를 감금하고, 석방조건으로 공산당과 연합하여 일본과 싸울 것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공산당군은 형식상 바로 전까지 적이었던 국민당군에 편입되어 제18방면군이 되었고, 그 아래 화북지역에는 제8로군(팔로군), 화남지역에서는 신4군으로 재편되어 중일전쟁을 맞게 되었다.
전선에선 장제스가 지도하는 국민혁명군(국민당군)이 일본군과 계속 대결하는 상황속에서, 후방 농촌지대에선 마오쩌둥이 지도하는 팔로군(공산당군)이 무제한적인 유격전으로 일본군을 괴롭혔다. 특히 펑더화이는 20만의 홍군 병력을 동원해서 하북지방에서 대규모 유격전을 시작하는데 이것이 백단대전이다. 이에 일본군은 팔로군을 섬멸하기 위해서 화북지역에서 게릴라 마을이 될 수 있는 지역을 초토화하는 신멸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이때문에 중국인들의 일본군에 대한 증오심은 더 커지기만 하였다.
한편 항일전쟁이란 명분하에 겉으로는 2차 국공합작에 동의하였지만,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은 이미 물과 기름 같은 관계였다. 국공합작 내내 서로를 견제하고, 비난하고, 고립시키는데 몰두하였다. 국민당은 공산당이 항일전에는 소극적이면서 화북, 화남에서 자신들의 해방구를 늘리는데만 몰두하고 있다고 비난했으며, 반대로 공산당은 국민당이 보급도 제대로 해주지도 않으면서, 항일 전선으로의 병력이동을 오히려 가로막고 공산당을 서북의 오지에 봉쇄해둔채 자기들만 세력을 확장하고 비난하였다. 이와중에 화남지역에 있던 신4군(공산당군)의 활동영역이 국민당군의 거점과 겹친다는 문제가 돌출되면서 양군 사이에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결국 장제스의 명령으로 신4군이 이동하기로 했지만, 일부 국민혁명군 장성들이 철수중이던 신4군을 공격해 궤멸시키는 환남사변을 일으켰다. 이것으로 2차 국공합작은 사실상 파탄나고, 이후 홍군과 국민혁명군은 사실상 별도로 활동한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홍군과 국민혁명군은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일본군은 중국 대륙의 어마어마한 넒이와 무제한적인 병력을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지도상으로 중국대륙을 거의 정복한듯 보였어도, 실제로는 점(도시)과 선(철도) 주변을 통제하는데 그쳤다. 무계획적인 전선의 학대로 무제한적인 소모전의 함정에 빠진 일본군은 점령지조차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고,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학살을 저지를 때마다 중국인들의 반일감정은 커져가는 악순환에 빠져 버렸다. 마침 세계에선 독일과 이탈리아가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지구가 지옥이 된 상황이었고, 일본의 동남아시아 침공으로 인해 일본은 추축국으로 찍혀 중국은 연합국으로 들어가며 전세는 일본에게 더욱 불리하게 돌아갔다. 결국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다.[5]
3 2차 국공내전
일본이 항복하자 공산당과 국민당은 평화교섭을 했으나,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946년에 국민당군은 휴전협정을 어기고 공산당군을 공격하였다. 홍군은 강력한 적의 주력과 교전을 피하면서 처음에는 본거지 옌안까지 내어줄 정도였으나, 이렇게 점령된 곳을 유지하기 위해 분산된 국민당군을 전략적으로 포위할 수 있었다. 상황이 무르익자 1948년 가을부터 공세로 전환했고, 수적으로 유리했지만 중국대륙에 분산된 국민당군은 별다른 저항도 못해보고 순식간에 무너졌다. 게다가 국민당군들이 계속해서 공산당군으로 이탈하면서 공산당군의 병력은 순식간에 500만까지 불어났다. 결국 1년 남짓한 기간에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어 국민당은 대만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1949년 10월 1일 중국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하였다.
처음에는 다른 국가들 모두 마오쩌둥을 못 미더워했고, 스탈린마저도 장제스를 더 믿었다. 일본 역시 중일전쟁에서 패전 후 항복을 할 때, 국민당 장제스와 공산당 마오쩌둥이 각각 '우리에게 항복해라' 며 동시에 일본의 항복문서를 받겠다고 나섰으나, 일본은 '중국 대륙의 지도자가 될 사람은 장제스일 것이라 판단, 장제스에게 항복했었다. 그러나 결국은 쫓겨나게 된 것.. 이렇게 공산당이 역전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자, 상황을 지켜보다가 '나도 저렇게 조선을 공산화 시킬 수 있겠다' 라는 기대를 품은 김일성은 1950년에 남침을 하여 한국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4 한국전쟁
UN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전쟁의 형세가 북한에 위태롭게 돌아가자, 내부의 치열한 격론 끝에 팽덕회를 사령관으로 해서 중국 인민지원군이란 이름하에 약 40만의 병력을 파병하였다.
비록 장비는 낙후되었지만,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통해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인민지원군은 뛰어난 야간이동능력과 기동성으로 UN군을 포위, 각개격파하는 전술을 즐겨사용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한국군과 미국군이 공동전선을 폈을경우 상대하기 쉬운 한국군만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며 뚫는데 성공하면 미군을 포위해서 공격하는 영악함도 보여줬다 오죽하면 인천상륙작전 이후 기고만장해져 무리하게 북진을 추진하던 유엔군과 미국정부가 1.4 후퇴를 전후한 시점에 유엔군을 한국에서 철수하는 계획을 비밀리에 검토했을 정도이니......
하지만 미8군사령관 매튜 B. 리지웨이가 중국군의 공격이 시작되는 방향으로 유엔군, 정확히는 미군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쇼미더머니와 각종 화포와 항공기 지원 등 가지고 있는 모든 화력을 총동원하여 곧장 반격하는 방식을 택하자 한동안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주춤거렸으나, 전쟁 말기에 다시 유례없는 규모로 반격에 나서는 저력을 보여줬다.
중요한 건 이때 중국군은 제해권 자체가 없던 상황으로 그러니까 모든 보급을 만주를 거쳐 지상으로 했다는 말이다.[6]
다만 제공권 관련해서는 논란거리가 있다. 흔히 중국측에서 소련에게 공군지원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소련공군은 한국전쟁에 참전했었다. 다만 공식적으로는 참전을 부정한 상태였기에 기체는 모두 북한이나 중국공군의 마크를 칠하는 등의 위장을 했었다.[7] 중국 또한 참전의 대가로 소련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최신예기인 MiG-15를 공급받는등 소련의 지원하에 공군을 확충해 나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지만 흔히 중공군에게 제공권이 없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이 소련-중국 공군의 활동무대가 압록강 남부지역이었기에 일반인들이 관련기록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덧붙여 이 때 개입이나 간섭이라는 이미지를 피하기 위함인지 대외적으론 자원자들로 구성된 의용병이라고 칭했는데, 이때문인지 중국인들 중에서는 당시 중국과 한국의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을 한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현재 중국에선 한국전쟁 개입을 항미원조라고 부른다. 자세한 내용은 중국 인민지원군 항목 참조.
1949년 건국선언 당시 550만에 달하던 병력은 한국전쟁 개입 과정에서 더 불어나서 한때 627만까지 늘어났다. 이후 1950년대 내내 계속된 병력감축으로 1958년도는 300만을 약간 웃도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5 계급제 도입
1955년도에 최초로 계급제도를 도입하였다. 즉 1927년 남창봉기 때부터 국공내전, 중일전쟁, 한국전쟁을 치루는 동안은 계급없이 직책만 존재하였던 것이다.[8] 그러나 군이 500만에 달하는 거대규모로 성장하자 계급제도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고, 한국전쟁때부터 의논해서 1955년도에 10대 원수, 10대 대장 임명을 시작으로 계급제도를 전면 도입하였다. 10대 원수는 주덕, 팽덕회, 임표, 유백승, 하룡, 진의, 나영환, 서향전, 섭영진, 섭검영이다.
6 중국-소련 국경분쟁
항목참조.
7 중국-인도 국경분쟁
항목참조.
8 베트남 전쟁
베트남 전쟁에서 막대한 양의 군사장비와 군사고문단을 북베트남에 지원하며 대내외적으로 입지를 굳힌다. 특히 북베트남군의 장교단 상당수는 중국 윈난성의 보병학교에서 게릴라전술을 배웠다. 전후 복구를 위해서도 많은 물자를 지원하였다.
9 문화대혁명과 발전의 정체
다만 중국 역사상 최대의 병크인 문화대혁명 기간에 군의 발전 역시도 정체된다. 아울러 소련과 관계악화로 인한 중국-소련 국경분쟁에서 전술, 전략적 취약점을 드러내며 "인민의 바다" 전략의 한계성[9] 또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에는 도리어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습격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베트남을 침공해 중월전쟁을 일으켜 베트남과의 어중간한 전쟁을 치루다가 깨지고 물러난다. 베트남은 주력이 다른 곳(캄보디아)에 파견나간 상태였는데도 중국군은 국경지대 이상 진출하지 못했다. 결국 베트남에게 고전한 중국군은 결국 포기하고 전쟁을 중단, 다시 돌아왔다. 그 당시에는 베트남이 프랑스와도, 미국과도 싸워 이긴 나라 타이틀을 갖고 있었던 상황이기도 했고, 중국군은 더욱 저평가 받게 된다.
한편 중국공산당은 이미 문화대혁명 이전부터 미국, 소련에 비해서 현격하게 뒤쳐진 재래식군사력과 경제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전략무기 개발에 몰두하였다. 1955년 첸쉐썬 박사와 100여명에 이르는 제자들이 귀국하면서 시작된 핵무기 개발와 장거리로켓/미사일 개발은 문화대혁명 와중에도 꾸준히 진행되어 1962년 핵실험에 성공하고 67년에는 수소폭탄을 보유하게 되었다. 1970년에는 독자적인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중국의 핵개발, 로켓 창정 항목 참조.
1960년대 중국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것을 첩보로 인지한 미국은 내륙에 있는 중국의 핵플랜트를 폭격하려고도 했으나, 베트남에서 발목을 잡히고 있는데 확전이 될 수도 있는 부담이 있어서 포기했다.
10 중국-베트남 전쟁
항목참조.
11 현대화 추진
덩샤오핑 집권 이후 서방과의 급속히 가까워지며 사회 전반에서 정체되었던 현대화가 가속되는 와중에도 고루한 "인민의 바다" 전략에 얽매인 군 조직은 변화에 둔감했으나 걸프전에서 미군이 보여준 가공할 첨단전쟁방식에 당 지도부와 군부 모두 큰 충격을 받고 장비뿐만 아니라 인적자원에서도 현대화를 시작한다. 90년부터 92년까지 걸프전에 대한 보고서만 2만 건이 넘는다고 한다. 이때부터 첨단 무기의 개발과 배치에 노력을 기울여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차세대 전차와 자체개발 전투기, 러시아로부터 수입한[10] 각종 무기에 이를 기반으로 자체개발한 장비 등 외형적으론 전투력의 급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또한, 병력 중심의 전투력을 변화시켜 병력수를 확 줄였으나, 여전히 이백만이 넘는(…) 병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인구규모에 비해서는 그정도 병력은 많다고 할 수가 없는게 맞다. (...) [11]
1990년-2000년 중국이 세계2위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하자 이제는 경제력에 걸맞는 전투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중이며, 질적으로도 계속 성장하고 있다.
12 관련 항목
- ↑ 당시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군대"였던 소련군의 명칭을 그대로 갖다 쓴 것이다.
- ↑ 당시 중국 공산당 중앙지도부는 궤멸되었고, 각 지역조직들간의 연락체계도 무너진 상황이었기에, 난창봉기는 저우언라이를 포함해서 살아남은 몇몇 당간부들의 독자적인 판단이었다.
- ↑ 이 시기 홍군은 보통 주모군으로 불렸다.
- ↑ 소련의 프룬제 군사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중국이름은 이덕이었다.
- ↑ 공식적으로는 중화민국 정부, 즉 장개석 총통측에 항복하였다.
- ↑ 참고로 해상수송은 대량의 물자를 가장 싸고 빠르게 수송하는 방법이다.
- ↑ 당시 참전한 소련 조종사들에게 전투시 중국어로 교신하라고 지시가 내려왔으나 실제로는 그냥 러시아어를 썼는데, 이를 미공군측도 알고 있었으나 세계대전으로 확대될것을 우려한 상부에서 이를 공개하지는 않았다고.
- ↑ 이는 소련군도 마찬가지로 초창기 적위대는' 모든 인민의 평등한 군대'라는 개념에 입각해서 계급이 없었으며, 병사소비에트의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지휘관들이 전투중에만 제한적인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모든 평시생활은 병사소비에트의 결정에 따랐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부작용을 일으켜서 적군은 적백내전 초창기에 연전연패했다. 이에 1918년 트로츠키는 장교선거제도를 폐지하고 임명제를 도입하였으며, 1935년 계급제가 전면도입된다. 중국군도 소련의 이러한 실패를 똑같이 따라간 것이다.
- ↑ 인민의 바다 전략은 적을 끌어들여 공간을 주고 시간을 벌어 전력을 모으는 극히 방어적이고 소모전적인 전략이다. 그런데 소련군의 전략은 그런 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기동전이었다. 그리고 구 소련은 만약 분쟁이 확대될 시 핵전쟁을 계획한 상태였다. 당시 중국은 재래식 전력이고 핵 전력이고 간에 전혀 소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 ↑ 다만 러시아 입장에서는 중국도 국경분쟁을 하고있는 가상적국이고, 영토를 맞대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핵심무기의 경우 다른 나라에는 팔아도 중국에는 안 파는 경우가 많다. 가령 Tu-22와 같은 전략폭격기는 중국이 아무리 비싸게 값을 불러도 안 팔고 있다. 이에 중국은 다른나라를 통해 표본을 얻어 짝퉁을 생산하거나 자기식으로 생산하는 경우가 많다.
- ↑ 러시아의 경우 90만 가량으로 군축했는데 영토는 러시아가 더 넓지만 인구수 대비로 따지면 러시아의 90 만은 중국의 800만 정도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