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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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서체 | ||||
전서 | 예서 | 해서 | 행서 | 초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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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水情懷老更新 | 산수정회로경신 |
산수에 대한 애틋함은 늙을 수록 새로우니 | |
如何長作未歸人 | 여하장작미귀인 |
어찌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으리 | |
碧桃花下靑蓮舍 | 벽도화하청연사 |
파란 복사꽃 아래 푸른 연꽃집에서 | |
瓊島瑤臺入夢頻 | 경도요대입몽빈 |
꿈결에 자주 경도요대로 들어가지 않으리 |
아무리 봐도 지렁이인데 어떻게 알아봤지?
한국 4대 명필[1] 중 광초(狂草)라 불린 봉래 양사언의 학성기우인.
후한대의 장지(張芝, ?~192)라는 인물이 초서를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장지의 초서는 장초(章草)라고 하여 한글자 한글자를 흘려 쓰는 방식인데 이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예서(隸書)를 속기로 흘려 쓰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2] 이 당시에는 한대 예서의 특징인 '파세'(혹은 '파략')가 글자에 드러나며, 이후 금초나 광초에서는 이것이 사라진다.
한자는 획수가 많아서 원래의 형태를 하나 하나 똑바로 적으려면 한 글자를 적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3] 따라서 속기의 필요성이 있을 때는 이 원래 한자의 모양이 걸림돌이 되기 십상이라 한자의 모양을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 로마자 필기체 처럼 흘려쓰는 형식이 발달했다. 이것이 초서인 셈. 그러나 속기성에 치우쳐 글자의 모양을 너무 간략화 했기 때문에 때로는 글 쓴 본인 조차도 세월이 흐르고 나서 자신이 무슨 글자를 썼는지 까먹을 정도로 글자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큰 단점이 있다. [4]
사적(私的)으로 작성된 고서나 고문서는 이 초서로 쓰인 경우가 많다. 게다가 글 쓴 사람에 따라서 필체가 제각각이기 때문에 고려~조선시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 초서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5][6] 사학 전공자 중에서도 초서를 능숙하게 읽는 사람은 소수인데[7] 진짜 빠르게 휘갈겨 쓴 초서는 실제 붓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원래의 글자를 추정해야 할 정도로 매우 복잡하다. 또한 서예가 중에서도 초서를 능수능란하게 구사 할 수 있는 서예가는 극히 소수이다. 그래서 기존 작품을 필사하는 것이 전부인 경우가 허다하다. 당연히 초서로 쓴 글은 글자 형태 자체만 보고서는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한다. 자형+문맥을 통해서만 제대로 독해가 가능하다. 승정원일기의 해독에 엄청난 시간이 요구되는 것도 그 방대한 분량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기록이 초서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초서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초서라는 필체는 물론 한문의 다양한 문맥 자체가 머리에 들어 있을 정도로 한문에 대단히 익숙한 사람이다. 한국 한정으로 한문의 전문가 중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언뜻 제멋대로 쓴 것 같아보여도 시중에 초서사전이 나와 있고 일정한 규칙이 있기 때문에 훈련을 하면 어느정도 익숙해지긴 한다. 문제는 옛날 고문서가 그렇듯 깔끔하게 작성된 서류는 많지 않다. 쓰다가 틀리면 검은 먹으로 그냥 지워버리기도 하고 좀먹거나 찢어진 부분도 많아 판독하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국내에서도 읽고 쓰는 것을 모두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드물며, 쓸줄 안다고해서 다른 사람이 쓴 것을 쉽게 읽을 수 있는 서체가 아니다.[8]
행서와 기본 개념은 비슷하다. 기본 법칙과 형태를 가지고, 간략하게 쓴 것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한번 더 간략화 한 것이 초서이다. 사실 행서에서도 쓰는 필자에 따라 글자 하나에도 강조되는 구조나 형태가 제각각이다. 그러나, 초서는 가뜩이나 제각각이고 축약된 행서에 더욱 형태에 대한 제한을 두지 않음으로서, 그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해독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또한, 글자 형태가 매우 단순해지면서, 자칫 아예 다른 글자를 똑같은 글자로 해석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앞뒤 문맥과 글자를 파악해가면서 알고리즘 분석하듯 해석을 한다.
현대 중국의 간화자가 이 초서체에서 유래한 것이 많다. 또한 일본의 히라가나도 초서체를 약간 변형해서 만든 문자다.
아래는 한문 文武(문무)를 초서체로 쓴 것. 히라가나가 아니다!
- ↑ 다른 셋은 그 유명한 석봉 한호, 아름다운 예서체의 안평군 이용, 인수체로 유명한 자암 김구다. *
- ↑ 서예가이면서 한학자인 월천 권경상의 경우, 초서의 발생에 대해서 '장초' 때문에 초서가 예서에서 나왔다-는 주장을 소개한 바 있다. 영상 15분 6초부터
- ↑ 그래서 해서는 느릿한 걸음, 행서는 일반적인 걸음이라는 표현이 있다.
- ↑ 서예인들끼리 하는 농담 중에 어떤 가난한 선비가 부자 친구에게 쌀좀 꾸어달라 편지를 보냈는데 하필이면 초서로 쓰는 바람에 친구가 글자를 못알아봐서 굶어죽었다(...)는 드립이 있다.
- ↑ 비중으로 따지면 조선시대가 더 높다.
- ↑ 특히 고문서학에서 초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90% 이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왕실문서는 무조건 해서로 적는게 원칙이지만 관청문서, 민간문서로 넘어가면 초서는 100% 등장한다. 최소 가로길이가 미터로 시작하는 결송입안/분재기류로 넘어가는 순간 초서와 이두가 함께 공존하는 아스트랄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 ↑ 세상이 좋아져서 어지간한 사료는 (국역은 아니더라도)전산화가 되어있어서 해서만 알아도 왠만한 연구는 가능하다. 다만 이두로 적혀 있을 경우 이야기가 좀 다르다. 그래도 이두도 사전이 제공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안된다.
- ↑ 다만, 쓸 줄 알면 붓의 궤적을 따라가는데는 수월할 수 있으므로 '상대적으로'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