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리 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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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ffrey Chaucer. 1343~1400.

제프리 초서.
작품을 초서로 썼다 카더라

영문학의 아버지[1]이자 희대의 엄친아.

캔터베리 이야기의 저자.

1 소개

제프리 초서가 살았던 시기는 노르만 정복 이후 기존의 앵글로-색슨 계통의 상위계층이 프랑스 출신의 노르만계로 재편된 이후의 영국이었다. 14세기까지만 해도 노르만 정복 이후 도입된 유럽의 전형적인 봉건제가 확립되었으나, 14세기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의 변혁으로 사회적인 신분체계에서도 점차 변화가 오기 시작했고, 이른바 '젠트리'라 불리는 신흥 중간계층이 성장했다. 이 시기는 구질서에서 신질서로의 변화기였고, 그 어느때보다도 사회가 혼란한 시기였다. 동시에 민족의식이 태동하는 시기이자 교회가 무식, 태만 및 성직 매매 등으로 타락한 시기이기도 했다.

신흥 중간계층이란, 양조업자, 법관, 의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재력이 있는 서민계층에서 생겨난 용어로 귀족계층과 서민계층을 잇는 개념이다[2].

초서는 런던의 부유한 양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활기넘치는 런던의 환경 속에서 물건너 프랑스어와 더불어 피지배층의 언어인 영어, 학교에 쓰이는 라틴어를 포함해 다양한 언어적 토양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가업인 양조업보다는 상류계급에서 보내는 유년기를 더 바랬던 그의 아버지는 10대 후반의 그를 대단한 귀족가문의 급사로 보냈고[3], 그곳에서 상류계층의 예절과 접대방식을 배움은 물론, 약간의 실무직도 겸하게 된다.

실무직의 위치로 프랑스, 영국, 스페인 등을 넘나들며[4] 점차 영국지배계급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1359년 군인으로서 프랑스 원정에 종군했으나, 프랑스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영국 왕실의 힘으로 풀려났고, 이 일은 그의 입지가 얼마나 왕실 내부에서 중요했는지 알게한다.

영국을 휩쓴 Black Death, 이른바 흑사병이라 일컬어 지는 두번에 걸친 재앙에서도, 리처드 2세의 폐위에서도 혀를 내두르는 처세술과 인맥으로 살아남았고, 심지어 1381년의 인두세에 항거해 벌어진 농민 봉기에서도 털끝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히 살아남았다. 그야말로 생존왕.

이후 천수를 다 누리고 영국 역대 국왕의 대관식 집전 교회당인 웨스터민스터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시인이기 이전에 영국 왕실의 저명한 문헌학자였고, 운명할 당시 경내에 살고있었기 때문. 묘비명은 '영국 제일의 저명시인(Anglorum Poeta celeberrimus)'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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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사 윌리엄에서는 주인공 윌리엄을 소개하는 음유 시인으로 등장해 극한의 말솜씨를 뽐내지만, 영문학의 아버지라는 칭호에 걸맞지 않게 작중에선 도박중독자(...)에 샌드백 포지션. [5][6] 영화에서의 초서는 시인 초서와 동명이인이라고 봐도 될 수준으로 각색이 이뤄졌지만, 초서 문학, 나아가 중세 서양 문학사에서 따온 뒤 현대적 감각의 퓨전사극으로 절묘하게 어레인지한 요소들 덕에 아주 허무맹랑한 각색도 아니다. 배우는 아이언맨 실사영화 시리즈의 자비스로 유명한 폴 베타니.

2 업적

그가 살았던 노르만 정복기의 영국은 총 3가지의 언어가 통용되는 시기였는데,

당시 영국은 유럽의 변방이자 2등국가였고, 한창 문화의 꽃을 피우던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문학수준의 발끝의 때만도 못한 문학수준을 갖춘, '별볼일 없는' 문화의 나라였다. 노르만의 지배[10]로 거의 300년간 궁정에서는 프랑스어가 사용되었고, 천한 하인계층이나 쓰는 영어로 수려한 문학을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초서는 그의 실무적, 외교적 능력 뿐 아니라 학자로서의 소양에도 충실했다. 유년기를 다양한 언어를 접하며 살아왔고, 이탈리아나 프랑스로의 잦은 방문과 여행은 그로 하여금 언어적 능력을 기반으로 해당 국가의 선진적인 문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초기 그의 문학적인 관념은 조국의 언어가 아닌, 궁정에서 통용되는 프랑스 문학에 치우쳐있었다[11]. 그는 관례의 일환으로 종종 고위계층을 찬양하는 시를 헌정해올리기도 했다. 이탈리아로의 긴 여행에서 그는 여러 문학을 접하며 Troilus and Criseyde 등과 같은 꿈 형식의 장시를 쓰기도 했고, 이런 업적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한 시인으로서의 가치를 평가받는다.

살아생전 그는 상기의 프랑스 문학이나 라틴 번안작 등을 자신의 최고 작품으로 여겼으나, 아직까지도 그를 위대한 영문학인으로 칭송받게 하는건, 아이러니하게도 말년에 쓴 캔터베리 이야기다.
  1. 우스개소리로 영문학의 할아버지란 말도 있다. 아버지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둘다 영문학에선 지대로 중요한 인물들이다.
  2. 서민보다 약간의 우월성을 갖고 있으나 귀족층보단 아래에 위치한 계층으로 서민계층이 상승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지닌 계층이다.
  3. 물론 어머니가 영국왕실의 친척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4. 심지어 백년전쟁 중 포로가 된 경험도 있다.
  5. '벼락치기' 기사인 윌리엄을, 예루살렘의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이탈리아에서 이름을 날리고. 1년간 묵언수행한 먼치킨으로 둔갑시킨다. 게다가 각각의 지역에서 그럴듯한 에피소드를 덧붙이기 까지 한다(...)
  6. 여담으로 기사 윌리엄은 제프리 초서의 'The Knight's Tale'가 모티브인데,(원제도 똑같다) 영화 스토리의 설정은 제프리 초서가 자신의 목격담과 경험담을 통해 The knight's Tale을 집필한 것으로 나온다
  7. 프랑스의 지방 귀족(노르망디 공작)인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한 이래 프랑스계가 지배층이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왕실 및 귀족들의 언어로 정착. 참고로 이전 버전에서는 프랑스가 당시 화려한 궁정 문화를 가진. 유럽에서 유일한 전제군주정이라 되어 있었으나, 프랑스의 왕이 프랑스 전역에 걸쳐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려면 아직 멀었다. 샤를 5세만 해도 왕세자로 섭정을 맡던 시절에 삼부회 때문에 곤욕을 치렀고, 역대 프랑스 왕 가운데 최초로 중앙집권에 성공한 인물은 초서의 시대로부터 백년은 지나서 등장하는 루이 11세. 또한 화려한 궁정문화란 것도, 말도 안 된다. 건축물만 보더라도 당시 프랑스는 화려함보다 견고함을 중시했고, 왕궁이라는 건물조차 조각상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으며 휑한 벽에 벽화가 드문드문 그려져 있는 수준이었다. 프랑스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화려한 궁정 문화는, 프랑수아 1세 이후에 들어서야 갖추어진다.
  8. 현재까지 각 동물들과 식물들이 가진 '학명'들은 모두 라틴어다. 아울러 법률에서도 흔하게 쓰인다. 한마디로 이 당시엔 지식인들의 언어였다.
  9. 다만 에드워드 3세가 '제발 고위층도 영어 쓰자. 그리고, 의회에서도 영어 써.' 라는 칙령을 반포한 적이 있다. 다만 그 칙령부터도 프랑스어로 되어 있었다는 게 함정. 또 잉글랜드 왕으로 영어로 읽고 쓸 수도 있었던 헨리 5세(하층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는 건, 충분히 이례적인 일이었다)가 또다시 영어 진흥책을 추진하지만 이번에도 성과가 미미했다. 잉글랜드의 고위층이 본격적으로 영어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백년전쟁에서 패하여 칼레를 제외한 유럽 대륙의 영토를 모두 잃게 된 후의 일.
  10. 윌리엄 1세 이래로, 오늘날로 치면 프랑스계가 잉글랜드의 지배층을 차지한 것.
  11. 프랑스 문학을 영어로 번역하려는 시도까지 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