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사언

조선 4대 명필
사자관체 석봉 한호예서안평군 이용인수체 자암 김구초서체 봉래 양사언

楊士彦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1517(중종 11) - 1584(선조 17)

1 개요

조선 전기의 문신·문장가·서예가. 특히 초서체에 능했다.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이며 자는 응빙(應聘)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틀무시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돈녕주부(敦寧主簿)를 지낸 양희수(楊希洙)다.


위로 형 풍고 양사준(楓皐 楊士俊 / ?-?)이 있고 아래로 동생 죽재 양사기(竹齋 楊士奇 / 1531-1586)가 있는데, 이들 삼형제가 두루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세상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2 생애

1540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명종 원년인 1545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문과에 급제한 직후 운정기(雲亭記)라는 글을 지어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삼등현감, 함흥부윤, 평창군수, 강릉부사를 지내고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 사정을 지낸 뒤 다시 외직으로 나와서 회양군수, 철원군수, 고성군수, 안변도호부사를 지냈다. 뭔가 관동, 관북 지역만 뺑뺑 도는 기분이 든다

40여년의 관직생활동안 따로 가솔들을 위해 재산을 모으지도 않았으며,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 서예와 시문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으며, 금강산 만폭동에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 元化洞天)이란 친필을 남기는 등 자연을 즐기며 신선같이 살았다.

명종 때의 유명한 예언가 남사고(南師古)에게 천문과 역술을 배워 앞날을 능히 내다보았다고 하며, 임진왜란을 예언하여 사후에 다시 한 번 이름을 알렸다.

1582년 안변도호부사로 있을 때 안변에 있는 이성계의 증조부 묘인 지릉(智陵) 일대에 화재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황해도에 유배되었다. 2년 뒤인 1584년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오려 하였으나 유배지에서 병이 들어 결국 쾌차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들로 인천도호부사를 지낸 감호 양만고(鑑湖 楊萬古 / 1574 ~ 1654)가 있다.

그 유명한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시조를 남긴 분이 바로 이 분.

3 관련 설화

양사언의 아버지 양희수는 장령을 지낸 송환정(宋環貞)의 딸 은진 송씨를 부인으로 맞았는데, 마침 양희수와 같은 마을에 살던 문화 유씨 처자는 세상에서 제일 가는 아들을 낳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백일 동안 장독대에 자리를 펴고 밤마다 알몸으로 누워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던 유씨 처자는 양희수의 재취부인으로 들어가서 얼마 뒤 양사언을 낳았다. 아들을 낳겠다는 목적은 이루었으나 재취부인의 자식으로서는 현달할 수 없다는 걸 고민하던 유씨 부인은 양사언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남산 밑에 초가집을 짓고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임금이 야행을 나왔다가 갑자기 광풍과 폭우가 쏟아져 행차가 난처해졌다. 당황해하던 행차 일행은 마침 유씨부인의 초가집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비를 피했다. 유씨부인은 이를 예견이라도 한 듯이 임금에게 진수성찬을 올렸다. 그 집에서 어린 양사언의 범상치 않은 기골을 본 임금은 장래에 큰 인물이 될 거라 깨닫고 유씨 부인에게 양사언의 장래를 약속하고 궁궐로 돌아갔다고 한다. 맹모 삼천지교 능가하네 잠깐 그 임금 이미 죽은 중종일텐데

이후 벼슬길에 오른 양사언은 금강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자연을 즐겼는데, 이로 인해 당대의 풍류인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전우치전에 따르면 단군의 옛 유적을 찾기 위해 산에 들어갔다가 화담 서경덕과 우사 전우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서경덕으로부터 천기를 예언한 예언서들을 받아 간직하며 읽고 또 읽었으며, 한편으로는 유명한 예언가인 남사고로부터 천문과 역술을 배워 통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