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 「한최고손왕전(韓崔高孫王傳)」 | ||||
한기 | 최림 | 고유 | 손례 | 왕관 |
崔林
(? ~ 244년 12월)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문관. 자는 덕유(德儒). 최염의 사촌 동생.
2 생애
청하군 동무성 출신으로 어렸을 때 출세도 늦으면서 명성도 없는데다가 용모마저 못생겨 주위 친척들조차 그를 모두 경시했으나 오직 최염만이 최림을 두고 일렀다.
"이른바 큰 그릇은 늦게 이루니, 끝내 반드시 심원한 데까지 이르리라."
이 최염의 평에서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설이 있다.
조조가 기주를 평정한 다음에 최림을 오현의 장으로 제수했는데, 너무 가난해서 말이나 수레도 없었으므로 그는 걸어가서 취임한다. 206년에 조조가 고간의 반란을 진압할 때 장척에게 장리 중 가장 덕정이 뛰어난 자를 추천해달라고 하자 장척이 최림을 추천해서 이로 인해 최림은 기주주부로 임명되었다가 별가, 승상연속이 되었고, 위나라가 세워지자 점점 승진해 어사중승으로 임명된다.
220년에 조비가 즉위하자 상서로 임명되고 밖으로 나가 유주자사로 임명되었는데, 이 때 조비의 총애를 받는 오질이 하북의 군사를 통솔하니 왕웅은 그에게 문안인사라도 올릴 것을 권고한다. 최림은 이민족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며 끝내 가지 않으니 그가 다스리는 1년 간 오랑캐의 침입은 없어졌으나 결국 그는 하한태수로 좌천되었다. 청렴을 논하는 자들은 모두 이 일을 원망했다고 한다.
최림은 대홍려로 승진한다. 최림이 대홍려였을 때 소부 직위에 있던 상림이라는 자가 계속해서 관리들을 매질하여 이웃집인 최림의 집까지 관리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날, 최림은 문을 나서다 상림을 보고 "네가 정위냐? 관리들 죄 주게."라고 놀리니 상림은 부끄러워했지만 그래도 그만두지 않았다고 한다(...).
귀자왕이 아들을 보내와 환대를 했는데, 다른 나라들도 잇따라 아들을 보내니 최림은 이들의 진정성이 의심스럽고 이들을 접대하느라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가니 돈황군에 조서를 내려 이전 시대에 여러 나라의 사자를 접대할 때의 예의에 관한 일을 참고해 영원한 법을 제정하도록 했다.
226년에 조예가 즉위하자 관내후로 봉해지고 광록훈, 사예교위로 전임되어 위법행위를 제거하고 허물이 있는 관리를 제거하거나 줄였으며, 정무를 주관할 때는 성실함을 추존하고 법령을 간편하게 해 대강만 있게 하니 임지에서 떠난 후에 관리와 백성들이 항상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유소가 고과론을 만들자 그것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에서 최림은 조조의 예를 들며 한 가지 입장만을 견지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237년에 사도와 사공의 자리가 모두 공석이라 맹강은 다음과 같은 말로 최림을 추천한다.
"무릇 재상이란 자는 천하의 존경을 받고 모범이 되어야 하며, 진실로 응당 충성스럽고 정직하며 덕망과 의리가 있는 선비를 선발해서 기용해야만 천하의 사표가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사사로이 보건대, 사예교위 최림은 천성이 자연스럽고 바르며, 고아하고 넓은 도량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뛰어난 바를 고인에게 비교해 논하면, 충심과 정직함 및 곧은 의지는 사어(史魚)[1]의 무리이며, 청렴하고 절약하는 것은 계문(季文)[2]과 같습니다. 주나 군을 감독하여 지키는 일에 있어서는 각 임지에서 치적을 세웠고, 외무를 담당하는 직책[3]에 있으면서는 만리를 맑게 정돈했습니다. 최림은 진실로 재상이 될 수 있는 기량이 있고, 삼공의 직책을 담당할 수 있는 재능이 있습니다."
또 조예가 사도의 자리에 노육에게 누가 적당하냐고 묻자 노육은
"돈독하고 품행이 지극한 사람은 태중대부 한기이고, 맑고 정직한 사람은 사예교위 최림이며, 충정이 있고 순수한 사람은 태상 상림입니다."
라고 답하니 조예는 238년 2월 11일에 한기를 사도로 삼고 같은 해 11월 24일에 최림은 사공으로 승진하면서 안양정후로 봉해져 식읍을 6백호 받았으며, 곧 안양향후로 승진한다.
황제가 노재상이 제의한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 논의를 하도록 명했는데 박사(博士) 부지(傅祗)는 공자의 공적을 빛나게 해야한다고 찬성했지만 최림은 공자와 시대가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삼황오제보다 더 칭송하는 꼴이라며 반대 의견을 주장했다.
후에 식읍의 일부를 나눠 아들을 열후로 봉했다. 244년 12월에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효후(孝侯)라 했고 아들 최술이 뒤를 이었다.
최림전에 주석으로 달린 진제공찬(晉諸公贊)에 따르면 훗날 명사가 되는 왕경(최림과 동향)을 평민 중에서 발탁한 것으로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진수가 평하길 관직 생활을 청정하게 했으며, 생활을 소박했고 재간이 있었다고 한다.
3 미디어 믹스
삼국지 11 |
삼국지 12, 13 |
삼국지 시리즈에선 평범한 문관형이다. 사서의 기록과는 달리 딱히 못생기게 묘사되지는 않는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32/무력 22/지력 66/정치력 78/매력 76.
삼국지 12에서 짤렸다가 PK에서 삭제된 사촌형을 대신하여 등장했다. 전법이 복병이라서 어느정도 가치가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