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염

1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崔琰
(? ~ 216)

자는 계규(季珪). 청하군 동무성현 출신. 조카딸 최씨조식의 아내.

조조가 죽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다.

1.1 정사

1.1.1 초기 생애

젊어서는 무예에 심취했으나 23세 때 군역을 치러야 할 처지가 되자 유학을 공부하기 시작해병역기피?! 정현의 문하에 들어갔다. 황건적의 발호로 인하여 계속 학업을 쌓기 어려워지자 그는 고향으로 바로 돌아가지는 못하여 대신 4년에 걸쳐 청주로부터 연주, 예주, 서주와 양주에 이르기까지 떠돌아다니며 견문을 쌓았다.

고향에 돌아와 지내던 중 원소로부터 초빙을 받아 원소의 막료가 되었다. 원소의 병사들이 옛무덤들을 도굴하는 일이 발생하자 그 잘못을 원소에게 간했다. 관도대전 때에 그는 기도위의 직책을 지내고 있었는데, 그가 원소에게 조조헌제를 끼고 있으니 공세에 나서지 말고 굳게 지키면서 변화를 기다려야 한다고 간하며 굳이 싸움에 나서려는 원소를 말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싸움에 크게 진 원소가 급사하고, 아버지의 자리의 놓고 원담원상의 다툼이 노골적으로 드러났을 때, 그 둘 모두 최염을 자기 편의 막료로 임용하려고 하였다. 최염은 병을 핑계로 삼아 어느 쪽으도 의지하지 않았고 성난 원상은 그를 붙잡아 옥에 가두었지만, 음기(陰夔)와 진림이 탄원하여 그는 풀려났다.

1.1.2 조조 휘하에서

업을 함락한 조조가 기주목에 오른 뒤, 최염을 불러들여 별가종사로 삼았는데, 조조는, "내가 기주 백성의 호적을 살펴보니 넉넉히 30만 병사를 모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소. 이렇기 때문에 기주가 큰 땅이라 불리는 것이구려."라고 말했다. 그러자 최염은 "명공과 원소의 오랜 싸움에 기주의 백성들이 시달렸는데, 먼저 백성들의 마음을 다독여야지 어찌하여 군사의 일부터 언급하십니까?"라고 되물어서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모두 사색이 되었는데, 조조는 실언했다며 진지하게 사과했다.

조조가 북상해 병주 토벌에 나섰을 때는 업에 남아 조비를 보좌했으며, 사냥을 즐기는 조비에게 엄중히 폐단을 간했다.

스스로 승상이 된 조조는 최염이 청렴하고 강직하다며 최염에게 동조와 서조의 속관을 거쳐 정사를 맡게 하였다. 조조가 위공에 올랐을 때는 상서로 임명되었다.

조비와 조식 두 아들 중 누구를 후계자로 삼을지 고민하던 조조가 신료들에게 글을 봉하여 의견을 내도록 했다. 최염은 조카딸 최씨를 조식에게 시집보냈는데도 불구하고 글을 봉하지 않은 채 이치를 따져 맏아들인 조비가 뒤를 이어야 옳다는 의견을 냈고, 조조는 그에게 새삼 경의를 표하며 그를 중위로 삼았다.

1.1.3 뛰어난 풍채

최염전에 따르면 최염은 음성과 자태에 기품이 있었고 눈썹은 시원스럽게 퍼져 있었으며, 두 눈은 맑았고 수염의 길이가 넉 자나 되어 더욱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조조가 흉노의 사자를 접견하게 되었는데, 조조는 자신의 용모가 뛰어나지 못하여 사자를 제압할 위엄이 없다고 여겼다. 자신은 칼을 찬 신하로 위장하고 대신 최염을 왕좌에 세워 왕 노릇을 하게 하여 흉노의 사신을 접대하게 했다. 접견이 끝난 뒤 조조는 첩자를 보내 흉노의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묻게 하였다. "보기에 위왕의 인물됨이 어떠하던가요?"이 물음에 흉노의 사자는, "위왕의 용모는 위엄이 있었지만, 용상 옆에 칼을 차고 있던 사람이야말로 영웅이었소."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조조는 즉각 사람을 보내 흉노의 사자를 처치해 버렸다. 물론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지만 그만큼 최염의 풍채가 뛰어났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1.1.4 뛰어난 인물 식견

선현행장에 따르면 최염은 모개와 더불어 인사 행정에 관해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고 전한다. 그는 10년 동안이나 인재를 평가하는 일을 했는데, 처리가 공평하고 청렴했다고 한다.

최염은 사마랑과 친한 사이였는데, 그의 동생 사마의의 재능을 일찍이 높게 평가했다. 사마랑은 최염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최염은 매번 이 의론을 견지했다.
나아가 최염은 사촌인 최림의 자질을 간파하여, "그는 대기만성형의 사람이니, 결국에는 심원한 데까지 이를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모르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유명한 사자성어 대기만성의 유래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에피소드이다.

손례노육이 처음 군부(軍府)에서 일을 시작할 때, 최염은 그들은 삼공의 재능을 가진 인물이라고 품평했는데, 나중에 정말로 최림, 손례, 노육은 모두 삼공의 관직까지 올랐다.

1.1.5 죽음

조조가 위왕에 오르니, 전에 최염이 추천했던 양훈(楊訓)이라는 사람이 조조를 칭송하는 글을 올렸는데, 최염이 그 상주문을 비평하자, 누군가가 그 비평을 트집잡아 조조에게 최염이 불만을 품고 있다며 참소했다. 불쾌해진 조조는 최염을 투옥하여 죄를 묻도록 했는데[1], 옥에 갇혀 문초받는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최염은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이에 더욱 불쾌해진 조조는 그에게 자결을 명령했다.

진수는 그를 평하여 조조가 지시하여 처형되도록 한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억울하게 죽었으며, "사관입장에서 보아 그는 어떠한 죄도 없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적었다.

1.2 평가

홍승현 교수는 최염과 모개의 죽음을 순욱의 죽음과 동일선상에 놓고 분석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이들의 죽음은 단순히 간신의 모함에 의한 불운이 아니라 조조의 권력 획득 과정에서 방해물로 인식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배제당한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뜻밖이랄까, 이는 조조에 대해 호의적인 학자인 장야신마저 같은 논지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최염과 모개의 최후에 대해 그는 "자신이 한나라를 손에 넣는 데 방해가 되거나 또는 이에 불만을 표한다면, 여태까지 아무리 큰 신임을 받고 많은 공을 세운 자라고 해도 조조는 일말의 여지없이 자신에게 엄격한 벌을 가했을 것."이라고 논평했다.

즉, 그가 생각하기에 최염과 모개가 죽은 결정적인 이유는 모함이 아닌 정치적인 문제였다는 것이다. 헌데 그에 관하여 '한나라를 손에 넣는 데 방해가 되거나 이에 불만을 표한다'는 전제가 눈에 띈다. 그렇다면 최염과 모개는 순욱과 마찬가지로 한나라의 복권에 관하여 은밀하게 노력을 하였고, 그것이 조조에게 발각되어 내침을 당한 것일까? 이는 사실상 일부 학자들이 앞뒤의 정황을 따져 도출해낸 추측이라고 여기는 것이 옳다.

그러나 하필 위의 사건이 조조가 위왕의 작위를 하사받으며 한실의 권위를 다시 한번 크게 침범한 직후에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물론 반대로 우연히 시기가 그렇게 맞아 떨어졌기에 최염과 모개가 한나라와 일부 연관을 가졌다는 추측이 성립됐다고 여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어찌되었든 간에 한 가지는 확실해진 셈이다. 조조에게 있어 찬탈로 가는 계단에 어떤 형태로든 장애물이 되는 자는 그가 아무리 공이 많고 명성이 높은 인물이라 해도 철저히 제거당할 것을 각오해야 했다는 사실. 협력 내지는 최소한 침묵이라도 지켜야만 그의 아래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었을 거라고, 조조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써 그는 문무 대신들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게한 것이다.

1.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에게 발탁될 때 백성을 먼저 생각하라고 일갈하는 모습은 정사와 비슷하다. 조조가 승상이 되자 승상부에 들어가고 조조가 위공이 되자 상서에 임명된다.

그런데 최후는 갑자기 위왕 즉위를 반대하면서 조조를 한실의 역적이라고 욕하다가 몽둥이 찜질로 처형당하는 걸로 각색되었다. 분명 억울하게 죽은 사람 맞긴 하지만 뜬금없이 한실의 충신으로 바뀌는 결말은 수혜를 입었다고 해야 할지 피해자라고 해야 할지 상당히 미묘하다.

1.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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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
삼국지 13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주로 정치력에 특화된 B+급 문관형 인재인데, 젊어서 무예에 심취했다는 기록 때문인지 무력도 50대 중반 정도를 부여받아 문관치고는 그리 약하지 않다. 물론 통솔력은 기대할 수 없다. 초창기 삼국지에선 염소 같은 얼굴(...)에 해맑게 웃는 표정이었지만 최근엔 이런 묘사는 사라졌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23/59/68/87. 매도와 고무를 가지고 있으며 모략계 병법은 없다. 결국 내정용.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21/56/70/79/76에 무난한 문관. 특기는 상업, 지리, 명사, 항변, 반박으로 5개인데 딱 기본만 넣어줬다는 느낌이다. 일단 상업 특기가 있고 정치가 79이니 상업 담당으로 쓰기엔 부족함이 없다. 참고로 삼국지 10까지의 일러스트는 사서의 기록대로 수염이 강조되면서 크게 웃는 표정이라 자못 인상이 강했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18/55/70/83/75에 특기는 안력. 특기에 대한 고증은 잘 되었지만, 워낙 효율이 낮은 특기라서 능력치에 비하면 좀 안타까운 편. 일러스트는 수염도 짧아지고 다소 평범한 인상으로 바뀌었다.

삼국지 13에서 재등장.

삼국전투기에는 같은 성씨라는 이유로 최훈 본인의 오너캐로 등장한다.

창천항로에는 사서대로 멋진 수염을 달고 위엄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조비를 후계자로 추천하지만 조조의 구현령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제거된다. 그런데 위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최염이 양훈의 조조 후빨칭송을 비판했다가 조조의 눈 밖에 나서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자기 칭송이나 하는 그런 쓸모없는 인재를 추천했다는 정반대의 이유로 조조의 심기를 거스르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 걸로 나온다. 조조 신격화를 위한 완벽한 역사 왜곡의 희생양. 이 작품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그렇지 뭐

2 삼국지평화의 가공인물

崔廉

후한의 독우로 원교가 살해당한 일로 인해 조사를 위해 안희현에게 파견되었는데, 유비에게 태수를 죽였다고 추궁하다가 아니라고 하자 단규장비에게 두들겨맞은 일과 함께 주에 도착하는 기한을 어겨 원교가 처벌을 내리려고 한 일을 언급하고 이로 인해 원한을 품어 원교를 살해했다면서 유비를 잡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관우, 장비가 이를 보고 크게 노하면서 최염은 옷이 벗겨졌다가 말을 묶어 두는 말뚝에 결박되었으며, 장비에게 채찍으로 100대를 맞고 사망했다. 그 시체는 장비가 여섯 조각으로 내어 머리를 북문에 내걸고 다리를 네 모퉁이에 걸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독우가 나와 군공으로 관원이 된 자를 가려내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유비가 중산정왕의 후예인 것과 황건적 토벌에 공을 세웠다고 소개하자 뇌물을 받아먹기 위해 황제의 친척을 사칭하면서 거짓으로 공적을 보고했다고 호통치는 등 위풍을 부렸다.

현리를 불러 현위가 백성을 괴롭혔다고 거짓으로 고발하라고 했지만 듣지 않자 현리를 핍박했으며, 유비가 독우를 만나러 갔다가 문지기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장비가 역관을 지나다가 노인들로부터 이 사실을 듣고 역관으로 들어오자 독우는 장비에게 머리카락을 붙잡혀 말을 매는 말뚝에 매어진 뒤에 버들가지로 매를 맞다가 유비에게 목숨을 애걸해 살아남는다.

유비가 도장과 도장끈을 독우의 목에 걸어넣고 반납하면서 꾸짖고 떠났는데, 독우는 현의 백성들이 풀려나고 돌아가서 이 일을 정주태수에게 알렸다.

최염은 창작 인물이지만 이 모티브가 된 사건은 있는데, 선주전 초반에서 유비와는 평소에 아는 사이로 주군에서 군공을 세운 관리가 된 자들을 추려내기 위해 안희현에 왔다가 독우가 유비를 현에서 쫓아내려 했다. 유비가 만나자고 청했지만 독우는 병을 칭하면서 거절했다가 유비에게 묶여서 가지로 2백 대를 맞았으며, 유비가 인끈을 독우의 목에 걸어뒀다가 독우를 말뚝에 묶어두고 관직을 버린 채로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다.
  1. 또는 신분을 노비로 내렸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