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경상남도 함양군에 있는 인공 숲
최치원이 조성한 인공 숲이다. 자세한 내용은 추가바람.
2 삼국시대의 인물
常林
삼국시대의 사람으로 자는 백고(伯槐). 하내군 온현 출신으로 사마의와는 동향이다. 생몰년도는 미상이다.
2.1 생애
2.1.1 어릴 때
한 번은 그가 7살 때 아버지의 친구가 놀러왔는데, 상림에게 아버지의 자인 백선을 말하면서 그가 있냐고 묻는다. 그에 이어 어째서 자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느냐고 묻자 상림은
저는 비록 머리를 숙여 손님에게 인사해야 하겠지만 아들을 보고 아버지의 자를 말씀하시니 어찌 인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1]
그의 행동에 사람들이 모두 가상히 여겼다.
2.1.2 왕광과의 일화
왕광이 반동탁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가했을 때 유생들을 소속 현에 파견했다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에 해당하는 돈과 곡식을 내야 용서해주는 특이한 방법으로 물자를 조달했다. 그런데 왕광은 거기서 자신의 위엄을 세운다면서 조금이라도 늦으면 종족을 없애버린 것.
이 때 상림의 숙부가 식객의 종아리를 친 죄로 붙잡혔는데, 집안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고 있을 때 상림은 홀로 왕광과 같은 현사람인 호모표를 찾아가 말한다.
왕부군(왕광)께서는 문무로써 높은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희 비루한 군에 오셨습니다. 저희 군은 산하로 둘러싸여 있고, 땅은 넓으면서 백성들은 풍부하고, 또 현명하고 능력을 가진 인재가 많아 선택되어 등용되는 것을 뜻대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 주상(헌제)께서는 어리고 심약해 간신들이 조정을 주물러 중원이 두려워 떨고 있으니 영웅호걸이 재능을 떨칠 시기입니다. 만일 천하의 간악한 적을 주살해 미약한 왕실을 부축하려고 하신다면 지혜로운 자는 그 바람을 바라보며 마치 울리는 것처럼 호응할 것입니다. 어지러움을 극복하는 것은 화해로움에 있으니 어떤 위험을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만일 은덕을 베풀지 아니하여 임용함에 있어서 그 사람을 잃게 되면 엎어지고 망하는 것이 장차 이르게 될 텐데, 어느 틈에 조정을 바로잡고 보살필 수 있으며, 공명을 세우는 것을 숭상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께서는 이 점을 깊이 간직하십시오.
그러면서 자신의 숙부가 억류된 일을 설명하니 호모표가 즉시 글을 올려 왕광을 문책해 숙부의 석방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자마자 왕광의 복수를 피해 상당까지 도망가서 산기슭에다가 밭을 갈고 씨를 뿌렸으며, 하늘이 도왔는지 가뭄과 병충이 있었는데도 상림은 홀로 풍성한 수확을 거둬 이웃들을 불러 되와 마로 곡식들을 나눠준다.
2.1.3 특급 승진
한 번은 하간태수를 지낸 진연의 보루에 의탁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의 진과 풍 두 성씨는 옛 씨족에서는 최고의 집단이 있었다. 장양이 이 두 집안의 부녀자들을 눈독들이고 재산을 탐했는데, 상림은 그 종족을 이끌고 계획을 세워 60여 일 동안의 포위를 견디고 보루를 지켜내는데 성공한다.
그런 그의 명성을 듣고 병주자사 고간이 표를 올려 기도위로 추천하지만 상림은 이를 거부하며, 한참이 지나 원소가 패망하고 새로운 조조군의 병주자사로 양습이 와서 주의 명사들을 추천할 때 상림은 현의 우두머리가 되어 남화현을 다스리게 된다. 정치, 교화를 훌륭하게 시행하니 파격적으로 박릉태수와 유주자사로 승진되었는데, 그 곳에서도 공적을 세운다.
2.1.4 전은과 소백의 난
211년에 조비가 오관중랑장으로 임명될 때 상림은 공조로 임명되며, 조조가 마초를 공격하기 위해 출발했을 때 수도에는 조비와 정욱 등이 지키고 있었다. 하간에서 전은과 소백이 모반을 하자 조비는 자신이 직접 적을 치려고 했으나 상림은 여기서 다음과 같이 조비를 말린다.
제가 이전에 박릉에서 벼슬을 하고 나중에 유주에서 있을 때 적들의 형세를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북방의 백성들은 안정을 좋아하고 혼란을 싫어하며, 조정의 교화에 복종한 것이 이미 오래되었으며, 국가 기강을 잘 준수하는 자가 많습니다. 전은과 소백이 개와 양처럼 서로 모여들었으나 지혜는 작고 야심만 커 해를 입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대군은 먼 곳에 있고 밖으로는 강한 적이 있으며, 장군께서는 천하의 진지가 되고 있으니 가볍게 행동하여 먼 곳으로 출정하면 설령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무용은 없는 것입니다.
조비는 그 말이 옳다고 여겨 조인을 효기장군으로 임명해 7군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해 완벽하게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한 마디로 조비 네가 가지말고 조인님을 보내라는 소리
그 후 평원태수와 동부도위에 임명되었다가 213년에 조조가 위공으로 봉해져 위나라가 세워질 때 상서가 처음으로 만들어지면서 상림이 상서로 봉해진다.
2.1.5 조비 대 이후
220년에 조비가 즉위하자 소부로 승진하고 악양정후에 봉해졌으며, 대사농으로 전임된다. 226년 조예가 즉위하자 고양향후로 승진했다가 광록훈 태상으로 옮겨졌으며, 237년에 진교가 죽은 후 노육이 그를 한기와 함께 후임 후보로 추천하지만 하기가 후임이 된다.
하지만 그의 절개가 높고 맑기에 그에게 삼공의 직위를 주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상림은 병이 심하다며 이를 거부한다. 광록대부로 제수되었다가 나이 83세에 세상을 떠나 표기장군에 추증되었고 장례는 공의 예에 따라서 했으며, 시호를 정후라고 했다.
2.2 일화
그와 같은 고향 출신인 사마의는 상림이 고향의 덕 있는 선배라고 생각해 매번 그에게 인사를 했는데, 이걸 보고 어떤 사람이 상림에게 사마의는 지위가 존귀하니 상림에게 사마의의 이런 행위를 말리라고 했지만 여기에 상림이
사마공 스스로 장유[2]의 순서를 돈독하게 하려고 하는 것은 후대 사람들을 위한 법이오. 존귀한 것은 내가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며, 인사하는 것 역시 내가 제지할 수 있는 바가 아니오.
이렇게 말하자 딴지를 걸던 자는 부끄러워하면서 물러났다.
그리고 241년 7월에 사마의의 자제 11명이 모두 열후로 봉해졌는데, 그걸 보고 자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진서에 전해진다.
가득 찬 것은 도가에서 꺼리는 바다. 사시가 변화하는 것을 내가 무슨 덕으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덜어내고 또 덜어내야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으리!
하지만 이런 그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상시는 법을 어겨 주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