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Harmon Clayton Killebrew |
출생 ~ 사망 | 1936년 6월 29일 ~ 2011년 5월 17일 |
국적 | 미국 |
출신지 | 아이다호주 |
포지션 | 1루수, 3루수, 좌익수[1]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54년 워싱턴 세너터스 자유계약 |
소속팀 | 워싱턴 세너터스/미네소타 트윈스(1954~1974) 캔자스시티 로열스(1975) |
미네소타 트윈스의 영구결번 | |||
3 | 6 | 10 | 14 |
하먼 킬러브루 | 토니 올리바 | 톰 켈리 | 켄트 허벡 |
28 | 29 | 34 | 42 |
버트 블라일레븐 | 로드 커류 | 커비 퍼켓 | 재키 로빈슨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하먼 킬러브루 | |
헌액 연도 | 1984년 |
헌액 방식 | 기자단(BBWAA) 투표 |
투표 결과 | 83.1% (4회) |
1969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 |||||
데니 맥레인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 → | 하먼 킬러브루 (미네소타 트윈스) | → | 북 파웰 (볼티모어 오리올스) |
목차
1 개요
메이저리그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홈런타자로, 별명은 킬러(Killer).
통산 성적은 22시즌 동안 타율 .256, 2086안타, 573홈런 1584타점, 출루율 .376, 장타율 .509, OPS .884, 순장타율 .252, BB/K 0.92, wRC+ 142를 기록했다.
2 커리어
1954년 5만달러의 계약금 덕분에 메이저리그에 직행[2]하지만 제대로 된 기회를 받은 것은 나이 23세였던 1959년이었다. 이 당시 그는 비록 타율은 영 좋지 않지만 좋은 선구안과 인내심을 바탕으로 타율보다 1할 이상 높은 출루율을 기록하고 5할 이상의 장타율을 기록, 홈런도 42개를 때려내며 커리어 첫번째 홈런왕이 되었다. 그 이후로도 꾸준히 30~4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하며 투고타저 시대였던 1960년대에 가장 많은 홈런을 친 타자가 되었다. 동시대 같은 팀에 있었던 토니 올리바가 정교함을 앞세웠다면 킬러브루는 오늘날의 아담 던2011년은 제외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줬다.[3]
1969년에는 커리어 하이를 찍었는데, 49홈런 140타점에 .276 .427 .584를 기록하여 MVP의 영광까지 안게 되었다.
지독한 투고타저의 시대였던 1960년대 미네소타 트윈스의 중심타자로서 커리어 통산 6번의 홈런왕과 타점왕 4회, 최다볼넷 1위 4회라는 대단한 기록을 작성했으며, 올타임 홈런 랭킹에서 573홈런으로 역대 11위에 올라있다. 당연히 미네소타 트윈스의 타격부문 기록을 여러 개 가지고 있다.
다만 선수생활 말년에는 은퇴 후 코치직 제의를 거절하고 1년간 캔자스시티 로열스에서 외도를 하기도 했다. 그래도 트윈스에서는 20년간 고생해준 레전드에 대한 예우로 그가 처음 옛 홈으로 돌아온 날 영구결번식을 열어줬고, 그 경기에서 홈런을 치자 기립박수도 받았다.
3 명예의 전당 헌액
헌액식 연설.
1984년에는 루이스 아파리시오, 돈 드라이스데일과 함께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사실 명예의 전당 투표 첫 해는 1981년이지만 하필 행크 애런과 프랭크 로빈슨이 같이 겹치며 입성이 좌절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브룩스 로빈슨과 후안 마리칼이 표를 쓸어가는 바람에 사수까지 하게 되었다고.
2011년 5월 17일 식도암 투병생활 끝에 타계했다. 미네소타 트윈스 구단 측에서는 유니폼에 그의 등번호인 3번을 패치로 달고 시즌을 보내며 추모의 뜻을 나타냈다.
4 여담
오늘날 메이저리그 로고에 등장하는 타자의 정체가 킬러브루라 카더라. 그러나 이것이 정확히 확인된 바는 없다.
킬러브루의 통산 타율은 0.256으로 이는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투표로 입성한 타자 중 가장 낮은 타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