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넬리아스 1세의 친정

1 개요

은하영웅전설의 사건. 골덴바움 왕조 은하제국 역사에 있어서 유일하게 있었던 황제의 친정이다. 우주력 668년, 제국력 359년의 사건이다.

2 발단

은하제국의 제24대 황제 코르넬리아스 1세는 선제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의 사촌동생이자 훗날 양자로 책봉된 인물이었다.[1] 코르넬리아스 1세는 즉위 후에도 선제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가 신임하던 중신들을 그대로 유임시키고 내정에 대해서도 전임 황제의 노선을 그대로 이어받아 충실하고 탄탄한 치적을 쌓아갔다.

대외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선제와는 달리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해 다곤 성역 회전에서 당한 참패의 굴욕을 씻어내기 위해, 또한 단순히 국가간 균형을 이루는 것만이 아니라 전 인류 사회를 다시금 골덴바움 왕조의 깃발 아래 재통합하기 위해서 자유행성동맹과 결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2]

황제는 다곤 성역에서의 참패가 전략적인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라 보았고 만전을 기한 전략이 수립된다면 승리란 필연적이라 여기며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고[3] 한편으로 원정에 나서기 앞서 자유행성동맹에 세 차례에 걸친 특사를 파견, 항복을 권유하기도 하는 등 모든 것을 무력으로 해결하려 들지 않는 양식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황제의 특사가 동맹 정부를 상대로 어떤 제의를 했는지는 전해지지 않으나[4] 자유행성동맹은 황제의 요구를 거절하였으며 이로써 황제로서의 도량을 충분히 보였다고 생각한 코르넬리아스는 "다곤의 보복"을 외치며 친정을 개시했다. 제국력 359년, 우주력 668년 5월, 28세의 청년 황제는 다곤 성역 회전 때 출동했던 병력보다 더 많은 대군을 거느리고 제국 수도 오딘을 출발했다.[5]

은하제국 역사상 전례가 없던 황제의 친정은 훗날 여러가지 논란거리를 파생시켰다. 특히 무려 58명의 원수가 황제를 따르고 있었던 점에서 후세 역사가들의 조소를 사기도 했는데 이렇게 원수 칭호를 남발한 것은 코르넬리아스 1세의 이해할 수 없는 기행으로, 최고사령관은 물론 소규모 분함대 지휘관에게까지 원수 칭호를 하사했다.[6][7]

3 연전연승의 원정군

다곤에서의 참패를 교훈으로 삼아 철저하게 준비된 은하제국군과는 반대로 자유행성동맹군은 다곤에서의 대승에 도취되어 제대로 준비되지도 않았고 링 파오와 유수프 토패롤과 같은 명장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만해져있던 동맹군은 자국으로 침공해 들어오는 은하제국군을 상대로 연패를 면하지 못했고 약 20여명의 제국원수를 전사시키긴 했으나 몰려드는 제국군을 막아내지 못했다.

자유행성동맹군이 다곤 성역에서 승리을 거둔지 불과 30여년도 안돼 다시금 멸망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4 내부로부터 날아든 비수

코르넬리아스 1세는 불과 몇 발짝만 더 나아간다면 인류의 재통합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은하제국 수도성 오딘의 황궁에서 궁정 쿠데타가 발생했다. 황제가 주력군을 이끌고 원정을 나가며 황궁을 비운 탓에 황위를 노린 반역자들이 책동을 일으킨 것이다.

아무리 원정에서 승승장구한다고 한들 이대로는 돌아갈 장소가 없어진다. 당장 보급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당연지사, 심지어 이대로 원정을 계속하다 반역자들이 제국을 장악해버린다면 보급이 완벽히 차단되고 반역자들과 자유행성동맹에게 협공을 당하는 최악의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었다. 결국 코르넬리아스 1세는 울분을 억누르고 원정 함대에 퇴각 명령을 내렸으며 멸망 직전까지 내몰린 자유행성동맹은 사력을 다해 본토로 돌아가는 제국군의 후방을 타격하였다.

코르넬리아스 1세는 오딘으로 돌아와 반역자들을 처단하는데는 성공했으나 동맹령에서 철수하는 과정에서 15명의 원수를 추가로 잃어버리는 큰 피해를 입었다.

5 결말

김이 빠져버린 은하제국은 물론 공세에 나설 여력을 가져본 적이 없던 자유행성동맹은 서로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지는 못해도 경계지역 인근에서 소규모 전투를 빈번하게 벌였고 은하제국은 약 70여년이 흘러서야 다시금 대규모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6 코르넬리아스 1세의 친정에 대한 평가

성공 직전에 내부반란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원정.

훗날 행성 하이네센에 그 강력한 아르테미스의 목걸이가 설치된 계기는 코르넬리아스 1세가 동맹을 거의 멸망시킬 기세를 내뿜었던 이때의경험이 "하이네센이 제국군에게 위협당하는 사태가 다시 벌어질 수도 있다." 라는 생각으로 이어진 결과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결국은 어느 극렬 홍차빠인 아군 제독에게 박살났지만...

다나카 요시키가 딱히 '불패의 진군을 계속하였다' 등을 통해 원정이 제국에게 매우 유리함만 나오고 제국의 자세한 피해 상황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딱히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어차피 이런 건 자세히 따질 가치도 없으니까), 문제는 2개 소대 58명의 원수중 35명이 전사했으며 23명의 원수가 남았다는 것인데, 딱히 기록되지는 않을 정도니 피해도 별로 있지도 않았다는 것인데 왜 전사했는지 모르겠다. 아르테미스의 목걸이에 꼴아박기라도 했나 누가 모여있을 때 자폭이라도 했나(...).
  1. 둘 사이의 나이 차이가 많았거나 황위계승을 위해 나이차를 무시했었을 수도 있다.
  2. 물론 황제의 계획에 비판적인 신하들도 있어서 이들은 명군으로 소문난 친척 형의 그늘을 벗어나려는 유치한 시도라고 황제가 못 듣는 곳에서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과거 어느 황제도 이런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보면 코르넬리아스 1세는 선대의 어느 군주보다도 진취적인 시도를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3. 이는 훗날 자유행성동맹 최고의 명장중 한 명인 양 웬리의 기본 인식과도 일치한다. 양 웬리 역시 조건만 완벽히 갖추어진다면 바보라도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기 때문. 따라서 코르넬리아스 1세의 전쟁에 대한 인식은 건강하고 상식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4. 자유행성동맹에게 '귀순'을 권유했다고만 전해진다. 은하제국의 기록으로는 다곤에서의 승리에 도취된 동맹정부는 황제의 권유를 거부하는 것을 물론, 특사에게 모욕을 주었다고 기술되어있다는 것을 보아서는 자신감을 가지고 제국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올린 것은 확실해 보인다.
  5. 선제가 신임하던 중신, 법무상서 오스발트 폰 뮌처는 이 원정을 끝까지 반대했으나 황제가 뜻을 돌리지 않자 전격 사임하였다. 황제는 원수 칭호를 내려 뮌처를 달래려했으나 '당연히' 소용없었다.
  6. 단 한 척의 함선과 단 한 명의 병사까지 남기지 않고 모두 원정을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당연히 원정군과는 별개로 제국 본토에 방어를 위한 함대가 남아있어야만 하고 원정을 강력하게 반대하던 법무상서 뮌처에게 원수직을 주어 달래려고 했던 황제의 행적을 볼 때 원정에 나가는 장군들에게만 원수 칭호를 하사했다고 보기도 어려우니 당연히 원정군과는 별개로 제국 본토에 남은 원수들이 있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당대 제국 원수의 숫자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80여명 정도가 존재했을 것이다. 후세 역사가들의 조소가 이유없는 것이 아니었던 셈.
  7. 120여 년 후인 프리드리히 4세 시대의 제국 원수는 단 5명이었다. 당대 제국군의 규모는 대략 20만 척에 달했고 5명의 원수, 그나마 1명의 원수는 비전투 분야를 담당하는 원수였으니 제국군에는 단 4명의 원수만이 필요했다는 결론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