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켄 덴노

일본의 역대 덴노
45대46대47대
쇼무 덴노코켄 덴노준닌 덴노
47대48대49대
준닌 덴노쇼토쿠 덴노코닌 덴노

일본의 46, 48대 덴노. 이름은 아베노 내친왕(阿部內親王)

21살이 되던 때 일본 최초로 여성 황태자가 되었고[1] 부황 쇼무 덴노의 양위로 덴노가 되었다. 즉위 초기에는 어머니와 조카가 국정을 장악하였다.

1 신라와의 분쟁

고켄 덴노가 즉위한 해인 752년에 속일본기에는 신라의 왕자인 한아찬 김태렴이라는 자가 700명을 거느리고 왔다고 적고 있다. 이들은 신라왕(경덕왕)의 명령으로 왔다고 하면서 덴노에게 인사를 올리고 도다이지 등의 절에 예물을 바쳤다. 고켄 덴노는 김태렴에게 "전에 신라가 무례해서 죄를 물으려고 했던 참에 이렇게 신라왕이 알아서 자기 아들을 보내 예를 닦으니 기특하다. 앞으로는 국왕이 직접 못 오겠거든 꼭 신라왕의 표문을 가져오도록 해라."라고 말했고, 이듬해 신라에 답사로 오노노 다모리라는 사람을 보냈다. 일본에서 사신이 왔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실려 있는데, 경덕왕에게 푸대접만 당하고 돌아와야 했다.[2] 이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경덕왕은 이때 아들도 없었는데[3] 김태렴이라는 인간이 애초에 신라의 사신이자 왕자인 양 속이고 일본으로 들어가서 일본 조정을 단체로 속여먹은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해석은 각자 알아서.

그리고 753년 정월에 당나라 조정에서 열린 신년 하례식에서 여러 나라에서 온 사신들이 당현종을 알현하고 하례하는 자리에 마침 신라의 사신과 일본의 사신 오토모노 고마로(大伴古麻呂)가 함께 있었는데, 신라의 사신이 고마로보다(고마로는 토번 사신의 옆자리인 서반 제2석이었다) 상석인 대식국 사신 바로 옆자리(동반 제1석)에 있는 것을 본 고마로가 "신라는 오랜 옛날부터 일본의 속국인데 왜 우리보다 상석에 앉아있나요?"라고 따지자 당의 장군 오회실이 고마로의 눈치를 보면서 신라 사신과 고마로의 자리를 바꿔 주었다고 되어 있다.[4]

다만 이 기사는 속일본기에만 나오는 기록인데다 이 해에 신라 사신은 고사하고 대식국이나 토번에서도 신년 하례식에 사신이 참석하지 않았고, 한 나라의 사신의 자리를 바꾸는 것도 장군 한 사람이 바꾸라고 한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 재상급 대신들이 모여 의논해서 결정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점을 보면 신빙성이 상당히 의심스럽다는 지적이 따른다. 속일본기에서의 해당 부분도 오오토모노 고마로가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보고하는 형식으로 수록 된 기사라, 고마로가 적당히 꾸며냈을 가능성이 있는 셈.서로가 사이좋게 속고, 속이는 1대 1 주고 받기 꼴.

이후 후사가 없던 고켄 덴노는 오오이를 황태자로 책봉하였고 병든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오오이에게 양위하였다.

2 복위

어머니가 사망하자 상황 고켄 덴노는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 사이 승려 도쿄(道鏡)를 총애하면서 사촌 준닌 덴노(오오이)가 총애하는 오시카쓰(후지와라노 나카마로) 등과 갈등을 계속 빚었는데, 사촌인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는 입지를 지키기 위해 난을 계획하였으나 실행하기도 전에 발각되어 나카마로도 죽었다.[5] 그리고 코켄 덴노는 준닌 덴노를 폐황시켜 유배를 보내고[6] 자신이 다시 덴노가 되었다.

3 쇼토쿠 덴노로서

반대세력을 제거한 코켄 덴노는 도쿄를 더욱 증용하였고, 법왕이라는 칭호를 하사하여 황족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게 하였다. 그러자 도쿄는 쇼토쿠 덴노의 후계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었고 코켄 덴노도 도쿄에게 황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이 과정이 실로 골때리는데, 도쿄는 자신의 측근을 시켜 "하치만신(八幡神)께서 도쿄에게 덴노의 자리를 전하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라 하셨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했는데, 우사 하치만 신궁에 와케노 기요마로라는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했더니 기요마로 앞에 나타난 하치만신은 아예 신탁을 주지 않았고 기요마로는 "덴노의 자리는 덴노의 일족에게만 계승하도록 하라는 계시이고 앞서 퍼진 소문은 엉터리다"라고 해석하고는 돌아가서 그대로 고해버렸다. 하지만 여제와 도쿄는 이 일을 두고 거꾸로 기요마로에게 화를 내면서 그를 좌천시키고 이름까지 케가레마로(穢麻呂)[7]로 강제로 개명시켜 버렸다.[8] 이 일은 후지와라씨의 분노를 사게되어 코켄 덴노는 추방되었다. 그리고 이후 여성이 덴노가 되지 못하도록 하였다.[9]

독신으로 평생을 지낸 코켄 덴노는 770년 천연두로 사망하였다.

4 매체에서의 등장

일본의 만화가 사토나카 마치코가 코켄 덴노를 주인공으로 하는 『여제의 수기』라는 만화를 그린 적이 있다.

2010년에 일본 NHK에서 방송된 2부작 사극 『대불개안』에서는 이시하라 사토미가 맡았다.

  1. 손아랫남동생 모토이 왕은 태어난지 1년만에 사망했다.
  2. 경덕왕이 아예 사신을 접견도 하지 않았다고.
  3. 혜공왕이 태어난 것은 758년의 일이다. 경덕왕 항목 참조.
  4. 이 부분은 중국에서 제작한 역사 다큐멘터리 『대명궁』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는데, 현종 황제 앞에서 당당하게 "자리 바꿔 줘요!"라고 항의하는 일본 사신과 "일본 애들이 우리 괴롭혀요 찡" 하면서 처량한듯 엎드리는 신라 사신의 모습이 포인트라면 포인트... SBS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역사전쟁』에서도 이게 소개가 됐다.
  5. 이전 항목에는 '나카마로'와 '오시카쓰'가 분리되어 있었는데, 나카마로와 오시카쓰는 동일인물이다. 준닌 덴노가 즉위하고 태보(우대신)직에 임명되고 나서 에미(惠美)라는 성을 사성받았고 이름도 오시카쓰(押勝)으로 바꾼 것. 이름의 의미는 말 그대로 "일본 안에 그와 비길 자 없다"는 뜻으로 할아버지 후히토(不比等)의 이름과도 의미가 통한다. 에미 성에 대해서는 추가바람.
  6. 준닌 덴노라는 시호 자체도 메이지 시대에야 추증된 것이다. 그 전까지는 유배지인 아와지(淡路)의 이름을 따서 아와지 폐제(淡路廢帝)라고 불렸다.
  7. 해석하면 "더러운 놈"이라는 뜻...
  8. 재미있게도 측천무후도 자신의 정적인 황후 왕씨와 소 숙비의 성씨를 강제로 좋지 않은 글자로 바꾸게 하고 죽인 적이 있다.
  9. 에도 시대에 메이쇼 덴노가 즉위할 때까지 일본에서는 여성 덴노가 나오지 않았다. 고켄 덴노의 죽음은 또한 덴무계 덴노의 단절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