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명궁

중국어 : 大明宮(정체자) / 大明宫(간화자)
영어 : Daming Pa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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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궁 복원 상상도

대명궁국가유지공원 공식 홈페이지
대명궁 관련 다큐멘터리

대명궁 평면도

1 개요

당나라 장안에 건축된 궁전이다. 장안성이 처음 조성될 때의 정궁인 태극궁의 동쪽에 위치해 태극궁을 '대내(大內)'[1]라고 부른 것에 대비해 통칭 '동내(東內)'라고도 불렸다. 참고로 대명궁이 세워진 후에는 동내인 대명궁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태극궁은 '서내(西內)'라고 불렸다.

장안성(長安城) 동북쪽 용수원(龍首原)에 위치. 당의 정치 중심지였으며, 당시 세계적으로도 가장 규모가 큰 궁전 건축군이었다. 평면 규모로 현존 세계 최대인 명나라·청나라 시대 자금성의 4.5배에 달하는 등 궁궐의 규모면에서는 이후 어느 시대를 보아도 이보다 큰 건축물들은 나오지 않았다(동서양 모두 포함). 정월 대보름이면 이곳을 포함한 장안성 전역에서 원소관등(元宵觀燈)이라는 이름의 등불놀이 행사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동아시아 각국의 사신들이 모이는 자리이기도 했다.

사족을 달면, 우리나라도 삼국시대 때 가장 건물이 컸고, 조선시대에는 건축물이 삼국시대에 비해 더 작아지고, 금구와 유약바른 기와 등 고급 장식을 쓰지 않게 되었다. 일본의 가장 큰 목조 건축인 도다이지 역시 당대인 745년 건축되었다.

2 연혁

태종 정관 8년(634) 10월, 당태종태상황으로 지내던 부친 당고조가 더위를 피해 휴양할 수 있는 여름 궁전으로 영안궁(永安宮)을 짓기 시작했다. 1년 후인 정관 9년(635) 6월 25일, 영안궁을 사용할 예정이었던 태상황이 세상을 떠나면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궁궐의 이름을 대명궁으로 개칭하면서 같은 해에 공사가 재개되었다. 당태종은 대명궁을 창건한 후에도 황성 안에 있던 태극궁에서 거주했지만 고종 용삭 2년(662) 당고종이 대명궁을 대규모로 확장 공사하면서 봉래궁(蓬萊宮)으로 개칭하고는 이곳을 정궁으로 삼아 거처를 이어했다. 고종 함형 원년(670)에는 봉래궁에서 다시 함원궁(含元宮)으로 개칭했으며, 중종 신룡 원년(705)에서야 대명궁으로 명칭이 환원되었다. 당현종당헌종이 궁전을 중수해 전각을 증축하고 태액지를 준설했다.

고종부터 시작해 희종까지 17명의 황제가 234년 동안 거주한 당나라의 정궁이었으며, 주차(朱泚)와 황소(黃巢)가 여기서 황제를 자칭하기도 했다. 당말의 혼란기에 전화로 피해를 입기 시작한 대명궁은 소종 건녕 3년(896) 전소되었고 이후 폐허로 방치되었다가 20세기 중반부터 발굴이 시작되어 1961년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에 지정되었다. 현재는 대명궁국가유지공원(大明宫国家遗址公园)이 되었으며, 2010년 대명궁의 정남문인 단봉문 자리에 단봉문유지박물관(丹凤门遗址博物馆)을 개장했다.

단양에 있는 연개소문 세트장이 대명궁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밑의 복원 모양을 축소한 형태로 만들어 놓았다.

헝디엔에 있는 진황궁 세트장은 진나라~한나라 건축양식보다 이쪽에 더 가깝다. 95부작 삼국은 낙양 황궁으로 진황궁 세트에서 찍었는데, 오히려 예전에 찍은 84부작의 세트가 당시 양식에 가깝다.

3 주요 건축

3.1 궁성

대명궁을 둘러싼 궁성의 길이는 동서 1.5km, 남북 2.5km로 총 7.6km이며 면적은 3.2㎢였고, 궁성에는 문이 9개가 있었다. 남쪽 궁성에는 정남문인 단봉문(丹鳳門)이, 단봉문 서쪽에는 흥안문(興安門)과 건복문(建福門)이, 단봉문 동쪽에는 망선문(望仙門)과 연정문(延政門)이 있었다. 북쪽 궁성에는 정북문인 현무문(玄武門)이, 현무문 바로 북쪽에는 중현문(重玄門)이, 현무문 서쪽과 동쪽에는 각각 은한문(銀漢門)과 청소문(青霄門)이 있었다. 동쪽 궁성에는 좌은대문(左銀臺門)이, 서쪽 궁성에는 우은대문(右銀臺門)과 구선문(九仙門)이 있었다. 궁성의 정문인 단봉문만 5개의 문이 있었으며 나머지 문들은 모두 문이 3개였다.

3.1.1 단봉문

단봉문(丹鳳門 / 丹凤门)
단봉문 복원 상상도단봉문유지박물관

단봉문은 대명궁의 정남문으로 길이 74.5m, 너비 33m이며 문루 아래로는 다섯 개의 문이 나 있다. 고종 용삭 2년(662)에 건설되었으며 숙종 지덕 2재(757) 때 명봉문(明鳳門)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단봉문으로 환원되었다. 조칙의 반포, 대사면령, 개원 등 국가의 중대사를 공표하던 곳이다. 태극궁의 정남문인 승천문(承天門) 남쪽으로 승천문가가 펼쳐진 것을 본떠 단봉문 남쪽에도 단봉문가가 조성되었는데, 승천문가는 태극궁이 장안성을 설계할 때부터 있던 것이라 방(坊)을 자르는 것과 같은 일을 할 필요가 없었지만 대명궁은 장안성이 완성된 후에 추가로 조영되었으므로 단봉문 남쪽에는 가도를 만들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단봉문 남쪽에 있던 방 2개를 잘라 단봉문가를 냈고, 그 결과 광택방(光宅坊), 영창방(永昌坊), 익선방(翊善坊), 내정방(來庭坊)의 방 4개가 생겼다. 2010년 10월 1일, 단봉문터를 발굴 조사한 자리에 단봉문을 실물 크기의 철골 구조 모형으로 만들면서 (석재와 목재를 사용한 복원이 아니다!) 그 내부에 '단봉문유지박물관(丹凤门遗址博物馆)'을 개장했다.

3.1.2 현무문

현무문(玄武門 / 玄武门)
현무문 복원 상상도현무문(앞쪽)과 중현문(뒤쪽)

현무문은 대명궁의 정북문으로, 문 바깥쪽에 겹성이 하나 더 있고 그 겹성에 중현문(重玄門)이 나 있어서 다른 방위에 있는 문들과 달리 겹문 구조로 되어 있다. 고조 무덕 9년(626) 7월 2일, 진왕 이세민이 친형제인 황태자 이건성과 제왕 이원길을 참살하고 권력을 장악한 현무문의 변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3.2 전조(前朝)

전조는 황제의 공식적인 업무와 국가적인 행사가 거행되던 의례용 공간이다. 이곳에는 함원전(含元殿), 선정전(宣政殿), 자신전(紫宸殿) 3조(三朝)의 대전이 있었다.

3.2.1 함원전

함원전(含元殿)
함원전 복원 상상도함원전 유지

함원전은 대명궁의 정전(正殿)이자 전조 3전 중 첫 번째 전각으로 외조(外朝)라고도 한다. 단봉문에서 약 500m 뒤쪽에 위치해 있으며 전각의 기단부는 길이 70m, 너비 40m, 높이 15.6m이고 전각은 정면 11칸(67.33m)에 측면 4칸(29.5m)의 중첨무전정(重檐廡殿頂) 건물이다. 고종 용삭 3년(663)에 건축된 후 희종 광계 2년(886)에 전소되었으며 국가의 주요 대사가 거행되던 장소이다. 설날이나 동지에 조회를 보고 외국 사절을 접견하며, 황제의 즉위식을 비롯한 각종 궁정 의례, 개원이나 사면과 같은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함원전 앞에는 거대한 광장이 있어 군대의 열병식 등이 행해지기도 했다. 함원전을 중심에 두고 왼쪽에는 상란각(翔鸞閣 / 翔鸾阁)이, 오른쪽에는 서봉각(栖鳳閣 / 栖凤阁)이 용미도(龍尾道 / 龙尾道)로 연결되어 凹자 평면을 이룬다.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진행되기 전에는 함원전 앞에 계단이 일자로 쭉 뻗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발굴 결과 계단은 기단부를 따라 양 옆으로 배치된 형태였다.

3.2.2 선정전

선정전(宣政殿)
선정전 복원 상상도선정전 유지

선정전은 함원전 북쪽에 있으며 대명궁의 전조 3전 중 두 번째 전각으로 중조(中朝)라고도 한다. 함원전을 나와 300m 북쪽으로 가면 선정문(宣政門 / 宣政门)이 있고, 선정문을 지나면 선정전이 나온다. 전각의 기단부는 길이 70m, 너비 40m이다. 선정전을 둘러싼 행랑에는 여러 관청이 들어서 있었는데, 동쪽 행랑에는 문하성, 사관등 이 있었고 서쪽 행랑에는 중서성, 전중성 등이 있었다. 이곳은 황제가 평소에 정무를 처리하던 공간이어서 상조(常朝)라고도 했다. 매년 삭망(望朔)에 황제가 조회를 열고 황족 종실과 관련된 업무를 살폈으며 과거 시험 때 전시(殿試)가 치러지기도 했다. 숙종 지덕 2재(757) 12월에는 태상황이 된 당현종이 이곳에서 당숙종에게 국새를 건네주기도 했다.

3.2.3 자신전

자신전(紫宸殿)
자신전 복원 상상도자신전 유지

자신전은 선정전 북쪽에 있으며 대명궁의 전조 3전 중 세 번째 전각으로 내조(內朝)라고도 한다. 선정전을 나와 자신문(紫宸門 / 紫宸门)을 지나면 자신전이 위치해 있다. 정무를 마친 황제가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자 평소 생활하는 곳이었으며, 이곳을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5품 이상의 관원에 한정되었는데 이러한 자격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켜 입각(入閣)했다고 표현했다. 현재 자신전 유지에는 전각의 옛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기둥, 서까래, 치미 등의 실물크기 모형과 함께 나무를 식수했다. 자신전 동편에는 욕당전(浴堂殿)과 온실전(溫室殿 / 温室殿)[2]이, 서편에는 연영전(延英殿)과 함상전(含象殿)이 대칭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3.3 내정(內庭)

내정은 황제의 생활 공간으로, 주요 풍경구를 형성하는 호수 태액지(太液池)와 불교 사찰인 호국천왕사(護國天王寺)와 도교 사원인 현원황제묘(玄元皇帝廟)를 비롯해 자신전(紫宸殿), 봉래전(蓬萊殿), 능기전(綾綺殿), 욕당전(浴堂殿), 선휘전(宣徽殿), 온실전(溫室殿), 연영전(延英殿), 태화전(太和殿), 사정전(思政殿), 함상전(含象殿), 인덕전(麟德殿), 환주전(還周殿), 승환전(承歡殿), 명의전(明義殿), 습취전(拾翠殿), 선거전(仙居殿), 장안전(長安殿), 금란전(金鑾殿), 주경전(珠鏡殿), 청사전(淸思殿), 대복전(大福殿), 삼청전(三淸殿), 함빙전(含冰殿), 포마전(跑馬殿), 승향전(承香殿), 장각전(長閣殿), 현무전(玄武殿), 자란전(紫蘭殿), 함량전(含涼殿) 등의 전각이 있었다.

3.3.1 태액지

태액지(太液池)
태액지 상상 복원도태액지 유지

태액지는 대명궁 북쪽의 후원을 구성하는 호수로 면적 14만㎡, 수심 2~3m였다. 한때 봉래지(蓬萊池)라고 불리기도 했다. 호수 주변에는 정자와 누각이 늘어서 황실 가족들이 풍경을 감상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3.3.2 인덕전

인덕전(麟德殿)
인덕전 복원 상상도인덕전 유지

인덕전은 태액지 서쪽 고지대에 자리한, 중국 역사상 가장 큰 군체 건축으로 장방형 기단부의 길이는 동서 77m, 남북 130m이다. 인덕전은 하나의 단일한 전각이 아니라 정면 9칸에 측면 4칸인 전전(前殿), 정면 9칸에 측면 5칸인 중전(中殿)과 후전(後殿), 전전 좌우에 두 개의 정(亭), 중전 좌우에 욱의루(郁儀樓 / 郁仪楼)와 결린루(結鄰樓 / 结邻楼) 및 경운각(景雲閣 / 景云阁), 전전 동쪽 행랑의 회경정(會慶亭 / 会庆亭), 후전의 장일각(障日閣 / 障日阁), 이들 전·정·루를 연결하는 행랑 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평면 구조의 거대 건축군이었다. .

3.3.3 함량전

함량전(含涼殿)
함량전 복원 상상도함량전 유지

함량전은 태액지 남쪽 언덕에 자리한 전각으로, 봉래전과 함께 자신전 북쪽에 있었다. 이곳은 무더운 여름에 황제와 황실 가족이 더위를 피하던 장소였으며, 고종 용삭 2년(662) 6월 22일 당예종이 이곳에서 태어나기도 했다.

4 세부 디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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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특정 궁궐을 가리키는 명칭이 아니라, 임금이 거처하는 곳을 가리키는 일반명사.
  2. 온실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곳이 황제의 겨울 거처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유지가 발견되지 않아 고고학적인 증명은 어려운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