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공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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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35대 경덕왕 김헌영36대 혜공왕 김건운/김천운37대 선덕왕 김양상
시호혜공왕(惠恭王)
김(金)
건운(乾運) / 천운(天雲)
생몰년도음력758년 ~ 780년 4월 (23세)
재위기간음력765년 ~ 780년 4월 (16년)

1 개요

신라 제36대 왕. 태종 무열왕 직계에서 나온 마지막 국왕이다.[1]

2 출생의 비밀?

경덕왕의 장자. 《삼국사기》에는 '건운'이라는 휘만 적혀 있는데 경남 사천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천운(天雲)이라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대체로 건이나 천이나 똑같은 의미로 하늘의 운을 타고났다는 의미로 지었다는게 학자들의 견해다. 아마도 경덕왕이 직접 지었을 이 이름부터 범상치가 않다.

삼국유사》의 표훈대덕의 이야기에 따르면 본래 여자로 태어나야 할게 남자로 태어나는 바람에(...)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궁녀들과 어울리면서 여자같은 행동을 했고 결국 하늘의 뜻을 무시한 나머지 신라 멸망의 문을 열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보면 혜공왕이 진짜 여자이거나 남자다운 남자였다고 해도 어차피 왕위 쟁탈은 일어났을껄? 안타깝게도(?) TS모에화는 없다 여자로 태어나야 할 사람이 남자로 태어났다라는 전설은 무기력한 혜공왕을 은유한 전설이라는 해석도 있다.

경덕왕이 만월부인(滿月夫人)과의 사이에서 매우 늦게 얻은 아들로 경덕왕은 아들을 낳은 후 불과 8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혜공왕은 8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어머니 만월부인의 섭정을 받게 된다.

3 소년 군주의 치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만큼 그간 강화되어 오던 왕권도 약화되었다. 사실 이는 경덕왕 후기부터 일어났던 현상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수 있고 혜공왕 대에 이르러서는 그런 현상이 더욱 심화되어 자연스럽게 귀족들의 반란을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혜공왕 4년인 768년에 김대공, 김대렴 형제가 난을 일으키는데 바로 이 난이 소위 96각간의 난이다. 또한 대아찬 김융이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집권초기 소년군주 시절 반란이 연달아 일어났다라는 점은 왕권이 탄탄하지 못 해서 정국이 처음부터 매우 혼란스러웠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혜공왕이 성인이 된 후에도 섭정이었던 어머니 만월부인과 상대등이 된 외사촌 김양상(훗날의 선덕왕)에게 의지해 그들에게 국정을 모두 맡겨버리고 본인은 방탕하고 사치스럽게 지냈다는 것이다.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있다면 김양상에 의해 경덕왕의 관제개혁 및 중국화 정책이 중단되고 원상복구 되었다는 점. 이로 미루어보면 관제개혁 및 중국화 정책은 진골귀족층 사이에서 상당히 여론이 안 좋고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하긴 애초에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관제개혁과 중국화 정책이 추진되었으니, 귀족들이 좋아할 리가 없다. 결국 혜공왕 때 관제개혁과 중국화 정책이 폐지된 것은, 거꾸로 말하면 중앙집권 및 왕권 강화 정책이 여기서 영원히 멈추게 되었다는 소리다. 하긴 이건 경덕왕 대의 녹읍 부활로도 예견된 것이었지만...

4 왕권 강화의 길

일반적으로 암군으로 평가받는 혜공왕이지만 혜공왕이 이런 상황을 타개해보려고 애쓴 흔적이 없지는 않다. 혜공왕 12년의 기록을 보면 정월에 감은사로 행차해 동해를 바라보았다(행감은사망해)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망"은 바라보다라는 뜻도 있지만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도 있으며 보통 이 구절을 감은사에 행차해 망제를 지냈다라고 해석한다. 감은사가 보통의 절이 아니라는걸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내용이라 볼수있다. 감은사는 문무왕과 신문왕이 지은 절이며 감은사-대왕암-이견대로 이어지는 어찌보면 태종 무열왕계 왕통의 호국성지라 할수 있는 곳이다. 혜공왕이 이곳에 행차해서 제사를 지낸 대상은 동해의 용왕이 되었다는 문무왕일 가능성이 높고 이는 문무왕의 정치를 하겠다라는 의지의 표명이었다고 해석해볼수 있다.

또한 감은사 행차 다음달에는 국학에 나가 강의를 들었다라는 기록이 이어진다. 국학은 유학의 중심지로 혜공왕이 국학에 나가 강의를 청강한건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던걸로 보인다. 이는 유학자들과의 연계를 통해 혜공왕이 친정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어보인다.

또한 동국통감에 의하면 오묘의 신위를 바꾸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이때 오묘는 미추왕, 진지왕, 문흥왕(김용춘), 태종 무열왕, 문무왕의 다섯 신위를 모셨는데 혜공왕은 진지왕과 문흥왕의 신위를 옮기고 그자리에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성덕왕과 경덕왕의 신위를 모셨다. 이 또한 왕권을 강화하려는 포석이라 볼수 있다. 또한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신위는 절대 옮길수 없는 불천지위라고 천명했다. 불천지위의 규정은 혜공왕이 무열왕과 문무왕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점을 분명히 하여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는 행보였다고 풀이해볼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행보들을 보면 혜공왕은 어느 시점에서는 어머니와 외사촌에게서 벗어나서 자신이 직접 정치를 해보려고 나섰을 가능성이 있음을 드러낸다.

5 좌절과 비극적인 최후

그러나 이런 혜공왕의 마지막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건 이런 혜공왕이 행보를 보인 재위 12년의 겨울에 경주에 지진이 일어났고 이듬해 봄 3월에도 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이 일어난 다음달에 상대등 김양상이 혜공왕에게 정치를 극론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김양상이 혜공왕의 친정시도 때문에 하늘이 노해서 지진을 일으킨것이라는 주장을 했을것이라 추정한다. 묘하게 김양상이 글을 올린 6개월 뒤에 이찬 김주원시중으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김주원은 무열왕계 후손이란 점에서 혜공왕이 김양상을 견제하기 위해 김주원을 키우려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그러나 혜공왕의 피살 전까지 나오는 이야기의 거의 대부분이 자연재해(지진, 금성이 달을 침범, 누런 안개, 흙비)란 점을 보면 결국 김양상과의 힘겨루기에서 혜공왕이 패배했을 가능성이 커보인다.

780년, 느닷없이 이찬 김지정이 왕의 실정을 비난하며 김지정의 난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혜공왕과 그의 어머니 만월부인과 비빈 그리고 혜공왕의 어린 자식들 등 일가가 모조리 살해당하고 내물왕계인 상대등 김양상이 스스로 왕위에 올라 선덕왕이 되었는데, 일련의 사건들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준다. 학계 일각에서는 김지정이 혜공왕을 겨냥한것이 아니라 오히려 혜공왕과 대립한 김양상을 겨냥한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삼국유사》에는 혜공왕을 죽인 것이 김양상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김지정의 난을 틈타서 김양상이 혜공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혜공왕을 끝으로 신라의 중대왕조는 막을 내리고, 하대왕조로 접어든다. 신라의 하대왕조는 하극상 막장의 시대로 들어가고, 호족들이 난립하여 후삼국시대가 펼쳐지게 된다. 중간중간에 신라는 옛 시절로 회복할 길이 있었으나, 살리지 못하고 고려에 흡수된다.

6 동성애자?

본래 여자로 태어나야 했으나 억지로 남자로 태어나게 한 탓에 행동이 여성스러웠다는 《삼국유사》의 기록때문에 혜공왕의 방탕은 아마도 동성애가 아니었을까라는 추측을 하는 이들도 있다.[2] 어쩌면 신라의 엘라가발루스였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집적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그저 추측만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굳이 동성애자가 아니라도 여성스러운 성격과 취향을 가진 남성도 있으니까. 학자에 따라서는 혜공왕이 정치적으로 무력하다보니 권위가 제대로 서지 못 해서 정적들이 여성스러운 성격을 빌미 삼아 혜공왕을 마구 깎아내렸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7 기타

768년(혜공왕 4년) 때 당에서 보낸 사신 귀숭경 일행의 일원이었던 고음은 당나라로 돌아가 당대 신라에 대해 파악한 정보들을 정리해 신라국기를 저술했다. 전문은 남아있지 않지만, 신당서삼국사기에서 이 책에 기록된 신라 사회상을 인용했다.

8 삼국사기 기록

一年夏六月 혜공왕이 왕위에 오르다
一年 죄수를 사면하다
一年夏六月 왕이 태학 박사들에게 상서를 강의하다
二年春一月 해가 두 개 나타나다
二年春二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春二月 암소가 다리가 다섯인 송아지를 낳다
二年春二月 강주에서 땅이 꺼져 연못이 되다
二年冬十月 하늘에서 북소리가 나다
三年夏六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年秋七月 당에 사신 김은거를 보내 책봉을 청하다
三年秋九月 김포현의 벼이삭이 모두 쌀이 되다
四年 혜성이 나타나다
四年 당에서 왕과 왕의 어머니를 책봉하다
三年夏五月 죄수를 사면하다
三年夏六月 서울에 천둥이 치고 우박이 내리다
三年夏六月 큰 별이 황룡사 남쪽에 떨어지다
三年夏六月 우물과 샘이 모두 마르고 호랑이가 궁궐에 들어오다
三年秋七月 대공과 대렴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다
三年秋九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三年冬十月 신유를 상대등으로 삼고, 김은거를 시중으로 삼다
五年春三月 임해전에서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다
五年夏五月 누리의 재해가 있고 가뭄이 들다
五年夏五月 백관에게 인물을 천거하도록 명하다
五年冬十一月 치악현의 쥐가 평양을 향해 가다
五年冬十一月 눈이 내리지 않다
六年春一月 서원경에 행차하며 죄수들을 사면하다
六年春三月 흙비가 내리다
六年夏四月 왕이 서원경에서 돌아오다
六年夏五月十一日 혜성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다
六年夏六月二十九日 호랑이가 집사성에 들어오다
六年秋八月 김융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하다
六年冬十一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六年冬十二月 정문을 시중으로 삼다
八年春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니 당 대종이 관직을 주다
九年夏四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九年夏四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十年夏四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十年秋九月 김양상을 상대등으로 삼다
十年冬十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十一年春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十一年春三月 김순을 시중으로 삼다
十一年夏六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다
十一年夏六月 김은거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하다
十一年秋八月 염상이 정문과 반역을 꾀했다가 죽임을 당하다
十二年春一月 관직의 이름을 모두 옛 것으로 회복시키다
十二年春一月 감은사에 행차하여 망제를 지내다
十二年春二月 국학에 행차하여 강의를 듣다
十二年春三月 창부에 사 8인을 더 두다
十二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十二年冬十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十三年春三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十三年夏四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十三年夏四月 상대등 김양상이 왕에게 정치를 극론하는 글을 올리다
十三年冬十月 김주원을 시중으로 삼다
十五年春三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3]
十五年春三月 금성이 달에 들어가다
十五年春三月 백좌법회를 열다
十六年春一月 누런 안개가 끼다
十六年春二月 흙비가 내리다
十六年春二月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다
一年夏四月 왕과 왕비가 반란군에게 살해되다

당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많으며, 반란도 수차례 일어났으며 끝내 왕과 왕비는 반군에게 살해당했다.

  1. 다만 이것은 부계 한정이며 뒤를 이은 선덕왕도 모계쪽으로 무열왕계 직계 후손이다. 즉, 무열왕계 마지막 직계 국왕은 선덕왕으로 보는게 합당하다.
  2. 관리 직업의 하나인 도류와 어울렸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로서는 남자만 궁중의 관원이 됐고 도류가 여자라면 기록될 이유도 없기 때문.
  3. 당시 기록으로 파악하기로 규모 6.7의 대형 지진으로 추정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