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타 섬 전투

1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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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te 라는 지명이 크레타 섬이다.

제2차 세계대전중이던 1941년, 그리스 침공의 마무리를 위해 동지중해 최대의 섬 크레타를 점령하기 위해 펼쳐진 독일 팔슈름예거 최후의 공수작전.
아무튼 이탈리아의 쓸데없는 야망 때문에 벌어진 최악의 섬 전투

전선 형성의 배경은 그리스 침공 항목을 참조. 그러나, 크레타 섬 전투는 좀 더 복잡한 문제들이 끼어들고 있었다.

사실 독일로서는 그리스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크레타 섬을 점령할 필요가 없었다...아니 원래 그리스를 공격할 필요조차 없었다. 어차피 그리스 전선 자체가 이탈리아베니토 무솔리니의 똘기짓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형성되어 강제로 끌려간 측면이 컸고, 안그래도 독소전쟁의 준비로 시간과 병력이 빠듯한 상황에서 막강한 영국 지중해함대를 상대하며 크레타 섬을 공격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독일의 최고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는 크레타 섬을 계속 연합군이 장악할 경우 동지중해의 불침항모가 될 것을 우려했다. 크레타 섬에서 발진하는 영국 폭격기들이 발칸 지역, 특히 독일이 애지중지하는 추축동맹국 루마니아의 플로에슈티 유전지대를 폭격한다면 독일의 석유수급능력은 엄청난 타격을 받는것과 동시에 북아프리카 전역에 보내야하는 안전한 보급선도 필요했기 때문에 히틀러는 어떻게든 크레타 섬을 점령하고 싶어했다.

사실 영국군도 굳이 크레타 섬을 지킬 이유가 없었다. 영국군 수뇌부 입장에선 그리스 본토에서 발진하는 독일 공군기를 상대로 힘겨운 전투를 벌이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독일 전투기들, 특히 Bf109영국 본토 항공전때와 달리 보조연료탱크를 장착한 상태여서 크레타 섬에서의 공중전에 전혀 문제가 없었고, 영국도 이제야 본토 방공전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정도의 공군력밖에 확보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영국으로선 본토 항공전과 달리 사력을 다해 독일 공군과 한판 승부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비록 성가신 이탈리아 해군을 타란토 공습으로 침묵시켰다지만, Ju87이 돌아다니는 해역을 수상함대로 어술렁거리는건 자살행위였다. 아무리 막강한 영국 지중해함대라도 제공권을 잃어버리면 독일 공군의 밥이 될뿐이었다. 여기에 영국 그리스 원정군도 크레타에서 다시 이집트로 철수하길 강력 희망하고 있었다. 이는 동시기에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는 독일군이 예상치 못한 반격을 개시, 리비아 대부분을 뺏기고 토보록을 간신히 사수하는 와중에서 반격을 위한 추가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영제국의 전시수상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와 똑같은 생각, 즉 크레타 섬을 어떻게든 유지하면 불침항모로 굴리면서 폭격기를 띄워 루마니아 플로에슈티 유전을 불바다로 만들수 있겠지? 그리고 잘만하면 이탈리아 본토나 남부 독일도 두들겨팰수 있겠지? 란 생각으로 크레타 섬 사수를 지시했다.

2 준비 및 작전

2.1 독일군

독일군은 주력 대부분을 소련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어서 소규모 병력밖에 차출할 수 없었고, 설사 지상군을 투입한다 하더라도 영국의 지중해 함대가 기다리고 있는 바다로 뛰어나온다는건 자살행위였다. 때문에 독일은 제7공수사단과 제5산악사단으로 구성된 제11공수군단을 편성, 항공전력과 팔쉬름예거 중심으로 크레타 섬을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최초 투입된 부대들이 주요 비행장을 점령하고, 후속부대가 비행장들로 병력을 증파하며, 약간의 기계화부대는 징발한 수송선 및 동맹국 이탈리아의 협력을 얻어 해로로 수송, 팔쉬름예거와 합류하는 것이 작전의 핵심이었다.

머큐리라는 작전명이 부여된 크레타 침공에서 독일군 팔쉬름예거는 크게 3개 전투단을 구성, 각각 동쪽의 이라클리온, 중부의 레팀논, 서부의 말레메 비행장을 점령하기로 계획했다. 특히 서부전투단의 경우 말레메 비행장만이 아니라, 비행기로는 절대 수송이 불가능한 귀중한 전차와 중화기를 싣고 올 수송선단을 입항시킬 하니아 항만까지 확보해야 했다.

이들 중장비, 중화기의 수송을 위해 독일군은 이탈리아의 협조를 요청했으나 이탈리아는 약간의 수송선어뢰정 등 소형함 20여 척을 내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독일 입장에선 대형함 몇 척이라도 나와서 지중해 함대를 유인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타란토 공습으로 호되게 당한 이탈리아 해군은 여전히 항구에 짱박혀 있었다.(…)

머큐리 작전은 5월 16일 발동 예정이었으나 항공작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인 기상조건 문제로 연기되어 최종적으로 5월 20일로 작전이 실행되었다.

2.2 영국군

영국군도 특별히 방어전 준비를 한 건 아니었다. 그리스 원정군 생존자 5만여 명 중 4만여 명은 이집트로 철군, 롬멜에 대한 첫 반격작전인 브리티시 작전에 참가하거나 예비대로 편성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영국 제8군으로선 어떻게든 고립된 토브룩 요새를 구원하고 롬멜을 격퇴해야 했기에 크레타 방위전에 큰 신경을 쓰기 어려웠다. 항공전력도 대부분 아프리카 전선에 묶여 있었다.

때문에 섬에 남은 영국군 1만여명을 중심으로 방어작전이 준비되었고, 부족한 병력을 메꾸기 위해 그리스군 잔류자 및 민간인 자원자 등을 중심으로 민병대가 편성되어 일단 머리수는 약 3만을 채우긴 했지만 전차와 같은 중화기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수준에 불과했고, 심지어 소총같은 소화기와 탄약이 크게 부족했다.

대신 영국군의 유일한 강점이라 할 수 있는 해군은, 독일군의 해상수송을 차단하기 위해 전함 워스파이트와 항모 포미더블을 포함한 상당수 함정을 크레타 섬 및 인근 해상에 투입하여 초계활동에 나섰다.

3 전투

5월 20일 오전 8시를 기해 Ju 52 수송기들이 말레메 비행장 주변에 나타났고 비행장 및 주변 마을 등지로 수송기들이 착륙하거나 공수병들이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독일 팔슈름예거 최악의 날이 찾아왔다.

말레메 비행장 및 주변 지역은 영국군도 핵심 침공예상지역으로 선정하여 영국군 예하 21, 22, 23 뉴질랜드 대대가 집중배치되어 철저하게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게다가 독일 공군의 실수로 인해 비행장에 선제공습을 가한 지 한참 후에 팔쉬름예거가 투입되는 바람에 수비대가 정신을 차리고 전열을 재정비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하지만 문제는 달이 떠있는 야간작전도 아니고 태양이 작렬하는 주간작전에 투입된 독일군은 수비대 입장에선 하늘에서 떨어지는 좋은 사격훈련용 표적지였고, 강행착륙하는 수송기들은 집중사격의 대상일 뿐이었다. 결정적으로 훈련할때도 문제를 발견못하고 연전연승으로 개선 안하고 그대로 사용된 낙하산을 대규모 공수작전에서도 사용하면서 독일공수부대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다

낙하산의 문제로 인해 빈약한 무장으로 공수된 공수부대는 작전 단 한 시간만에 이미 사상자수는 수백명에 달했고, 제1돌격연대 예하 어느 중대는 중대정원 126명 중 112명이 전사, 사실상 전멸에 달하는 피해를 입었다. 단 하루만에 병력 600명 중 400명이 죽은 대대도 있었다. 단순히 큰 피해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단위부대 전멸에 가까운 피해가 속출한 것이다.

독일군 공수부대 제2파가 들이닥친 이라클리온도 다를 바 없었다. 오후 4시 15분을 기해 시작된 이라클리온 공수작전도 영국/호주/그리스 연합부대의 거센 방어에 직면했다. 화력이 가장 부족한 그리스군 담당지역을 돌파하는가 싶었지만 곧 예비부대의 반격으로 실패로 돌아갔고, 독일군은 비행장 한켠에 확보한 약간의 교두보에 몰려있는 상태에서 절망적인 첫 날을 보내야했다. 독일군 폭격기들이 SOS를 받고 대대적 폭격에 나섰으나 별 효과는 없었다.

거기다 독일군이 간신히 점거하나 싶던 일부 마을과 도시에서도 반독 폭동이 일어나 시민들이 구식 소총같은 무기로 독일군들을 무참히 학살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제대로 무장하지 못한 시민들에게까지 공수부대가 당하는 이유는, 당시 독일의 기술적 문제로 인해 팔쉬름예거는 낙하산으로 강하할 경우 권총외에는 무기를 휴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장 낙하산 방향도 두 팔을 허우적거려야 간신히 조정하는 상태였는지라... 그래서 소총등 다른 무기와 여분의 탄약은 따로 상자에 넣어서 낙하산 투하를 했는데, 이 상자들이 적진 한가운데 떨어지거나, 크레타의 험악한 산골짜기 깊숙이 박혀버리는 등 회수하기 참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냈고, 덕분에 무기를 회수하려다가 죽는 팔쉬름예거도 많았다.


전투 첫 날을 요약하는 사진. 줄줄이 잡힌 독일군 포로들이 보인다. 이보다 더 당일의 모습을 설명해주는 사진들도 많지만 다 끔직하거나 혐오스런 사진들이라….

이처럼 전투 첫 날 이미 상황은 파국을 향해 치달았다. 그러나 독일군은 중부의 말레메 비행장 인근의 107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유일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그리고 이는 전투의 향방을 갈랐다.

동부와 서부에서의 작전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는 걸 깨달은 독일군은 21일부터 제5산악사단 병력과 수송기로 수송 가능한 모든 중화기를 모조리 말레메 비행장으로 쏟아붓기 시작했다. 21일 오후가 되면 말레메 비행장이 승부처라는걸 모르는 양국 지휘관은 아무도 없었다. 독일군은 107고지를 발판으로 말레메 비행장을 점령했고 21일 오후에 단행된 뉴질랜드군의 탈환 작전은 탄약이 부족해진데다가 비전투손실을 무릅쓴 독일군의 증원강행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다행히도 같은 날 독일군의 호송선단을 영국 함대가 발견, 일방적인 공격끝에 대다수의 수송선을 격침하고 몇 척 남지 않은 수송선은 그리스로 되돌아가는 큰 성과를 이룩하면서 저지했으나 다음날인 22일 영국 해군의 함포사격을 등에 업은 뉴질랜드군 마오리 대대의 말레메 비행장 야습이 실패로 돌아갔고, 독일군은 모든 증원병력을 말레메로 돌리면서 말레메 교두보는 점점 단단해졌고, 독일군의 병력과 중화기도 빠르게 늘어만 갔다. 더군다나 독일군의 해상수송을 차단하려던 지중해함대가 독일 공군의 폭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는 등 악재가 계속되었다. 이때 입은 피해로 지중해함대는 크레타 작전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23일이 되면서부터 독일군은 본격적으로 교두보를 확대해나가기 시작했고 공중수송도 더 이상 방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 더군다나 영국군의 모든 시선이 독일군으로 쏠린 틈을 타 당시 이탈리아령이던 로도스 섬에서 소규모 부대가 크레타 섬 최동단 일대에 상륙, 제2교두보가 확보되었다. 이로서 크레타 섬의 운명은 결정났으며 잔존 연합군은 모두 남부 항구지대로 기나긴 후퇴를 시작했다. 이들의 머리 위로는 이제는 익숙한 Ju 87이 무차별 폭격을 퍼붓는 중이었다.

전투는 영국군이 철수한 5월 31일까지 계속되었으며, 철수하는 수송선단에 탑승한 병력도 수송선을 집중공격한 Ju 87때문에 상당한 희생을 겪었다. 게다가 혼전의 와중에 철수연락을 받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철수에 실패한 5천여명의 연합군은 대부분 항복하고 극소수만이 남아 게릴라전을 펼쳤으나 이들도 1941년이 끝나기 전에 모두 죽거나 항복했다.

그리고, 크레타 섬을 완전히 장악한 독일군은 앞서 시민들에게 공격받은 것을 잊지 않고 잔혹하게 복수해서 상당한 민간인 피해가 추가적으로 발생했다. 독일군 종군 기자가 찍은 민간인 학살 사진콘도마리 학살 ##

추축군 군인들중에서 적과 민간인을 구별 못할리 없는 정예들인데, 적군도 아닌 민간인들이 나타나서 자신들을 향해 무기들고 공격해오고, 자기들이 써야할 무기까지 탈취해서 저항을 해왔으니 자업자득으로 볼 수 있겠지만 이건 엄연히 군인들의 입장이고
천만의 말씀이다. 원래 제네바 협약상으로 민간인도 일정 수준의 장비와 조직을 갖추면 준군사조직으로 인정받아서 교전권을 확보하는데다가, 침략국에게 공격당한 국가의 주민은 당연히 반항할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민간인이 전투중 교전으로 인해 전사한 것이 아니라 전투 후에 민간인을 마을에서 끌어낸 후 제대로 된 재판 없이 현지에서 즉결총살한 것은 당연하게도 제네바 협약중 중대한 위반행위인 민간인이나 포로의 학살로 친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건 전쟁범죄다.

4 결과

공수부대의 생명은 불시의 기습이야. 그게 없어지면 평범한 보병보다 못하지. 자네들의 시대는 이제 끝났네. -아돌프 히틀러, 공수부대 훈장 수여식에서

겉으로 보기엔 명백한 영국군의 패배였다. 4,000여 명이 전사하고 17,000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10여 척의 함정이 격침되거나 파손되었는데 이중에는 순양함 3척 격침 피해에 항공모함 포미더블 대파, 전함 워스파이트 중파와 같은 핵심 주력함 피해도 있어서 한동안 지중해 해상작전에 커다란 제약이 있을 정도였다. 이는 이탈리아 잠수정에 의한 퀸 엘리자베스 대파, 유보트에 의한 바함 격침으로 더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독일의 상처뿐인 승리라는 것이 후대의 평가이다. 독일군 제7공수사단은 전면재편성에 들어가야 했으며 1939년 이후 크고 작은 전역에서 경험을 쌓은 베테랑 공수부대원들 4천여 명이 희생되었다. 이로서 독일군 팔쉬름예거는 대규모 작전을 벌일 능력과 의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거기에 작전에 투입한 수송기 다수까지 상실하여 추가적인 팔쉬름예거 훈련도 어려워졌다.

결국 이게 원인이 되어, 독일군은 전쟁이 끝날때까지 공수작전다운 공수작전은 하지도 못한 채 몰타를 점령하지못해 아프리카전선을 말아먹고 최정예라 불리는 팔쉬름예거들은 일반 보병전투에서 소모되었다. 독일군 최후의 공수작전은 벌지 대전투때 이루어졌는데, 크레타에서 입은 소모를 끝내 회복하지 못하여 질적으로나 숫적으로나 참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전투 하나 때문에 몰타를 점령못하는 사태까지 번지자 결국 아프리카 군단은 전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