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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그랜트 헨리 힐(Grant Henry Hill) |
생년월일 | 1972년 10월 5일 |
신장 | 203cm [1] |
체중 | 102kg |
포지션 | 스몰포워드 |
드래프트 | 1994년 드래프트 1라운드 3순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 지명 |
등번호 | 33번 |
역대 소속팀 | 디트로이트 피스톤스(1994~2000) 올랜도 매직(2000~2007) 피닉스 선즈(2007~2012) LA 클리퍼스(2012~2013) |
수상내역 | NBA All-Star 7회 (1995-1998, 2000-2001, 2005) 올해의 신인상 (1995)[2] All-NBA First Team (1997) All-NBA Second Team 4회 (1996, 1998-2000) NBA All-Rookie First Team (1995) NBA Sportsmanship Award 3회 (2005, 2008, 2010) |
1995년 NBA 올해의 신인상 | |||||
크리스 웨버 | → | 그랜트 힐, 제이슨 키드 | → | 데이먼 스타더마이어 |
전 nba 선수. 현 애틀랜타 호크스의 공동 구단주.[3]
1 성장기
그랜트 힐은 텍사스의 댈러스 태생으로 독자로 태어났다. 보통 NBA선수들이 형제가 2명 이상인 것에 비하면 약간은 이례적인 케이스이다.
그의 아버지인 캘빈 힐은 예일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고 또 NFL의 댈러스 카우보이스팀의 러닝백으로 나름대로 좋은 커리어를 쌓았다. 어머니인 자넷도 명문대학인 웰슬리 칼리지를 졸업했는데, 힐러리 클린턴과 대학동문이다. 룸메이트였다고.
집은 어느정도는 부유했던 것으로 보이며, 아버지 캘빈 힐이 미식축구 선수를 은퇴하고 난 후 가족은 버지니아 주 레스톤으로 이주했다. 그랜트 힐은 농구선수로서 두각을 많이 나타내었고, 1990년 McDonald's All-American Team에 선정되면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2 대학시절
수많은 대학들이 힐에게 구애를 펼쳤다. 그의 어머니는 흑인선수의 지위향상에 많은 노력을 하는 존 톰슨 주니어 감독이 있는 조지타운 대학교를 원했지만, 아버지는 농구명문인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를 원했다. 하지만 힐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역시 농구명문 대학교인 듀크 대학교에 진학해 4년을 다 채웠다. 이 기간동안 힐은 크리스찬 레이트너와 바비 헐리와 함께 2년 연속 NCAA 챔피언을 맛보았다.
대학시절 보여준 포스가 워낙 엄청나서 그의 대학시절 등번호이자 현재 그가 애용하는 등번호 33번은 듀크 대학교 영구결번으로 등록되어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그랜트 힐은 1994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신청을 한다.
3 데뷔와 함께 전성기
1994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3순위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 지명된다. 이때 당시 디트로이트는 배드보이스 1기의 해체 이후로 내리막을 타고 있었다. 힐은 팬들의 성원과 당시 배드보이스의 멤버 중 유일하게 남아었던 조 듀마스의 지지와 뒷받침 덕분에 단숨에 팀의 리더로 올라섰다. 94-95시즌이 끝난 후 힐은 제이슨 키드와 함께 올해의 신인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팀으로서는 데이브 빙이후 오랜만에 나온 신인상 수상자이기도 했다.
당시 인기가 엄청나게 높아서 94-95시즌에 열린 올스타전 팬투표에서 샤킬 오닐을 밀어내고 1위를 기록해서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올스타전 본 게임에 참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때 당시가 마이클 조던의 은퇴 후인데다가 복귀 전이었기 때문에 앤퍼니 하더웨이와 함께 NBA의 차세대 아이콘으로 주목을 받았다.
95-96시즌에는 조던의 복귀 후 첫 풀 시즌이었음에도 힐의 인기는 높았다. 조던을 제치고 또한번 올스타전 팬투표 1위를 하는 등 그야말로 전성기를 달렸다.[4] 1996년에는 드림팀3의 일원이 되어서 1996 애틀란타 올림픽에 참가해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96-97시즌에는 래리 버드 이후 평균 20득점이상 9리바운드 이상 7어시스트 이상을 해낸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그랜트 힐의 개인적인 성공이 팀의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완전히 약체인건 아니지만 전형적인 중위권과 하위권을 허덕이는 중간그룹의 팀이었다. 그리고 메탈 시티의 팬들은 그의 플레이가 배드보이스와 비교해 너무 '신사적'[5]이라며 까기도 했다 카더라.
그리고 그후...
4 처절한 몰락
1999-2000시즌을 마치고 FA가 된 힐은 타 팀으로의 이적을 결심했다. 팀 던컨과 더불어 그해 FA 최대어였던 힐에게 여러 팀이 달려들었지만 힐의 선택은 올랜도 매직이었다. 7년 93M의 조건에 사인 앤 트레이드 형식으로 이적했으며 그 댓가로 디트로이트는 처키 앳킨스와 벤 월라스를 받았다. 당초 올랜도 매직은 팀 던컨-그랜트 힐 듀오 결성을 꿈꿨으나 던컨이 스퍼스에 잔류를 선언하자 발빠르게 힐을 잡고 플랜 B로 트레이시 맥그레디를 영입했다. 팬들은 힐-티맥의 조합에 그분과 피펜에 이은 또다른 슈퍼 듀오의 활약을 기대하며 새 시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랜트 힐의 불운이 시작되었다.
2000년에 당한 발목부상이 올랜도에 와서 제대로 발목을 잡아버렸다. 2000년 플레이오프에서 발목부상을 안고 억지로 뛴 것이 화근이었다. 2000-2001시즌. 단 4경기만 출전하고 나머지 모든 경기를 결장했다. 팬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근데 이 불운이 끝이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다음 시즌에도 달랑 14경기 출전. 그 다음시즌에도 29경기 출전. 03-04시즌엔 아예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그랜트 힐의 팬들은 이런 힐의 몰락을 슬퍼하고 아쉬워했으며, 본의가 아니게 먹튀 혹은 유리몸으로 욕을 먹어야했다.[6] 한때 리그의 아이콘으로 대접받던 그는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에 사라져갔다. 같이 리그의 아이콘으로 추앙받던 앤퍼니 하더웨이가 똑같이 부상으로 몰락한 것 때문에 올드팬들은 여전히 이 때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한다.
5 부활 그리고 회춘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에 잊혀졌던 힐은 04-05시즌에 정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게 부활했다. 67경기에 출전하면서 오랜만에 많은 경기를 뛰었고, 올랜도 매직에 들어온 후 가장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2004년 12월 15~21주차 기간 동안 좋은 활약을 보여주면서 이주의 선수로도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힐은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05년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이제 더이상 과거의 전성기 시절의 모습은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팬들은 그저 힐이 코트에서 달릴 수만 있다는 것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가 다시 부상이 재발해서 05-06시즌에도 많은 경기를 결장했다. 이때 팬들은 다시 불안해했지만, 06-07시즌에도 다시 상당수의 게임을 뛰었다. 06-07시즌이 끝나고 올랜도와 계약이 만료되었던 힐은 피닉스 선즈로 이적했다.
하지만 당시 많은 팬들은 힐의 선택이나 피닉스 선즈의 선택에 의문을 표했다. 그도 그럴 것이 피닉스 선즈는 당시 닥치고 달리고 넣는 공격농구를 한 것에 비해, 힐은 그동안 발목 부상으로 씨름한데다 나이도 30대 중반인 노장선수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전망은 백업요원정도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피닉스 선즈에서 보낸 초창기 두 시즌은 벤치에서 출전하기도 했으나 주로 주전으로 출전했고, 그 후에는 아예 풀타임 주전으로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피닉스 선즈 의료진의 유능함 덕분인지 힐은 회춘했다. 이유가 하도 발목부상으로 시달린 덕분에 무릎 상태가 매우 싱싱(??)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피닉스의 달리는 농구에 무리없이 적응할 수 있었다. 38세의 나이에 슬램덩크를 꽂아넣기도 했다. 또 피닉스 선즈 로스터 중에서 가장 수비 잘하는 선수였기에 수비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피닉스에 있는 기간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2라운드를 돌파하기도 했다. 물론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LA 레이커스에게 패하긴 했지만.
이후 2011-12 시즌이 끝나고 LA 클리퍼스로 이적했다. 클리퍼스에서 한 시즌을 뛴 후, 2013년 6월 1일 현역 은퇴를 선언하면서 선수 생활을 마쳤다. [7]
6 그 외
아내가 가수 타미아이다. 이 두 사람은 1999년 7월 24일에 결혼했고, 슬하에 딸 둘이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외모를 많이 닮아서인지 딸들도 귀엽다.
우리나라에 1995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당시 김국진이 진행하는 일밤코너인 김국진의 한판승부에 출연, 미션을 수행하기도 했다.
정말 잘 나가던 시절에 스프라이트 음료 광고를 찍었는데, 당시 월간지 루키와 했던 인터뷰에 따르면 실제로도 스프라이트 음료를 매우 좋아해서 아예 집에다 자판기를 설치해놓고 원하는 대로 뽑아먹었다고(...) 경기 전이나 경기 중에도 마셨다고 한다.[8]
그의 발목부상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말이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데뷔 초부터 경기당 40분 가까이 뛸 정도로 혹사를 겪은데다, 플레이 스타일이 드웨인 웨이드같이 드리블 돌파에 전적으로 승부하는 타입의 스윙맨이라 그만큼 하체의 부담이 심했던 것. 그런데 여기에 찰스 바클리가 그의 부상으로 두고 "그랜트 힐이 발목 부상을 당한건 휠라의 쓰레기 같은 신발 때문이다."라고 독설을 날린 바 있다. 근데 어느 정도는 신빙성이 좀 있었던 게, 당시 휠라는 스포츠의류에서는 알아주는 브랜드였지만, 농구용품 쪽으로는 거의 무지에 가까웠는데, 자기네들도 농구 쪽으로 진출해보자 하는 심보로 선수를 물색하다 힐이 낚인(??)것이다.[9] 힐이 발목부상을 당했을때도 휠라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10] 결국 휠라는 힐과의 계약이 만료되자 슬쩍 그가 신던 농구화를 리트로 해버렸다. 그 후 힐은 나이키와 아디다스를 번갈아 신다가 최종적으로는 아디다스를 신었다.
NBA Open Court 에서는 한때 "잃어버린 기회들" 특집에 힐에 대해서 다룬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그가 패널로 있던 자리에서 그 대화가 이뤄졌는데 계속되는 부상에 대해서 "과거를 회상하며 좌절했던 적이 있느냐?" 라는 질문을 받자 그는 "그저 뛸 수 있는 것에 감사하다" 라고 하였지만 한때는 좌절감을 느끼며 다 때려치고 싶었다고.... 하지만 몸이 나아지자 다시 코트에 뛰고 싶었다고 한다. 동료 패널들이 너무 겸손하다고 이야기하다가 불끈했는데 자기 딸이 힐을 가리켜 "아빠, 르브론이나 듀란트, 앤써니 같은 애들 못막지?" 라고 물어본게 기억나서 (...) 하지만 YouTube에서 그랜트 힐의 전성기를 보고 난후에는 딸이 "아빠, 정말 잘했었네?" 라고 알아줘서 기분 좋았다고 하더라.
이날 동료 패널들 (같이 코트에서 뛴 스티브 스미스, 스티브 커 등등) 에 의하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선수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괜히 포스트 조던이라고 부르는게 아니었다고....
현재는 NBA 프로그램 inside stuff의 MC로 얼굴을 비추는 중이다. 방송에서의 활약도 꽤나 잘나가는듯.
2015년 애틀란타 호크스의 공동 투자자로 참가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기사- ↑ 1994년 드래프트 측정 결과 맨발 신장 6' 8" = 203cm
- ↑ 제이슨 키드와 공동으로 수상
- ↑ 정확히 말하면 애틀란타 호크스는 사모펀드 '아레스 매니지먼트'가 인수했는데 투자자중 한명이 바로 그랜트 힐이라고.기사
- ↑ 조던은 초월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인물답게 87~93시즌, 97~98시즌까지 총 9번 올스타 투표 1위를 차지했다. 86시즌을 부상으로 거의 못 뛰었고, 94, 95시즌은 은퇴한 상태니(95시즌 막판에 복귀했지만 이미 올스타전이 끝난 상태) 제대로 뛰고도 올스타투표1위를 놓친건 루키시즌과 96시즌뿐이다. 다시 말해 전성기의 조던을 인기로 누른 건 힐이 유일하다 ㅎㄷㄷ. 참고로 조던 다음으로 올스타 투표 1위를 많이 차지한 건 줄리어스 어빙과 빈스 카터로 각각 4회씩.
- ↑ 그랜트 힐을 대표하는 별명이 '코트의 신사'. 실제로 명문대 출신 부모 밑에서 정규 교육을 잘 받아 흑인문화와는 거리가 있었던 힐을 싫어하는 흑인도 적지 않았다. 이럴때 쓰는 속어가 버락 오바마도 가끔 듣는 오레오.
- ↑ 국내에서도 'NBA의 최악의 조합'으로 '그랜트 힐의 발목'이 꼽히기도 했다.
- ↑ nba토크쇼 오픈 코트에 나와서 밝힌 바에 따르면, 어느날 경기 직전에 연습을 하다가 젊은 선수들이 화려하게 덩크하는 것에 자극받아(클리퍼스에는 블레이크 그리핀,디안드레 조던 등 운동능력 뛰어난 선수들이 즐비하다) 자기도 덩크를 꽂았다고 한다. 당시 경기에서는 일분도 뛰지 않았는데 통증이 느껴져서 검사해보니 부상을 당했다고. 힐은 "연습하다가 부상당하는 걸 보니 갈때가 됐구나 싶었죠"라고 회고했다.
힐 형 ㅠㅠ. - ↑ 후에 인터뷰에서 젊었을적엔 케이크나 패스트푸드등을 그렇게 먹고도 몸이 멀쩡했다라고 말하는걸 봤을때 꽤나 군것질이나 저런 음식들을 좋아하는것같다. 물론 나이가 점차 들면서부터 몸이 예전같지 않았고 다이어트를 위해 저런 고칼로리 음식을 금하는등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했다고.
- ↑ NBA 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 KBL의 오피셜 스폰서로 참여하면서 국내 여러 구단에게 용품 스폰서도 같이 했다.
- ↑ 보통 농구선수가 발목부상을 당할 때는 고전적인 방법 중 하나로 발목을 완전히 덮는 농구화를 신는 것이 있다.